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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의 국경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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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284쪽 | 314g | 120*205*17mm
ISBN13 9791192884394
ISBN10 1192884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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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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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큰 쐐기풀들이, 이 숱한 샘들을 덮어버렸듯,
녹슨 써레를, 사용한 지 오래된
닳고 닳은 쟁기를, 돌로 만든 롤러를 덮어버린다.
이제 느릅나무 밑동만이 쐐기풀들보다 높이 솟아 있다.

농가 안뜰의 이 구석이 난 제일 좋다.
꽃나무에 달린 여느 꽃송이뿐 아니라
소나기의 상쾌함을 입증하려 할 때만 빼고는
결코 사라진 적 없는, 쐐기풀들 위의 먼지가 좋다.
---「키 큰 쐐기풀들」중에서

바위 같은 진흙이 조금 녹았고, 실개천들은
생울타리에서 꼬리같이 흔들리는 꽃송이들 밑에서
반짝이며 길 양옆으로 흘러내려갔다.
하지만 대지는 햇살에 개의치 않고 내처 잠을 자려 했고,
나도 오래된 장원의 농가와, 연륜이나 규모로 보아
그와 동급인 맞은편의 교회당과 주목이 있는 곳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금박을 입히는
그 가는 햇살을 2월의 귀여운 물상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었다. 교회당과 주목과
농가는 일요일의 정적 속에 잠들어 있었다.
산들바람은 지푸라기 하나 들어 올리지 못했다. 가파른 농가 지붕은,
거무스름하게 빛나는 기와들로, 한낮의 해를
즐겁게 했다. 또 지붕 여기저기에는
흰 비둘기들이 자리 잡았다. 딱 하나의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짐마차 말 세 마리가 앞갈기 사이로 졸린 듯
문 너머를 바라보다가, 파리 한 마리,
유일한 파리를 쫓아버리려고 꼬리를 휙 휘둘렀다 .

겨울의 뺨은 마치 봄과 여름과 가을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조용히 미소 짓는 것처럼
발개졌다. 하지만 그건 겨울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오래된 이 잉글랜드가 ‘쾌활하다’라고 불린 이래로
오랜 세월 동안 기와와 초가지붕 밑에 안전하게 누워 있던,
농가와 교회당에서 잠 깨어 일어난
변함없는 지복(至福)의 계절이었다.
---「장원의 농가」중에서

그래, 애들스트롭이 기억난다-
그 역 이름이, 찌는 듯한 어느 오후
급행열차가 뜻밖에도
거기 멈춰 서는 바람에. 6월 말이었다 .
증기가 쉭쉭 소리를 냈다. 누군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텅 빈 플랫폼엔 떠나는 이도
들어오는 이도 없었다. 내가 본 건
‘애들스트롭’ 역 이름과
버드나무들, 분홍바늘꽃, 풀밭,
피리풀, 하늘 높이 떠 있는
조각구름들에 못지않게 조용하고
또 호젓하고 아름다운 마른 건초 더미들뿐이었다.
그 순간 검은지빠귀 한 마리가 근처에서
울었다. 그러자 녀석 주변에서, 더 어렴풋이,
점점 더 멀리서, 옥스퍼드셔주와
글로스터셔주의 새들이 일제히 울어댔다.
---「애들스트롭」중에서

밤낮으로 내내, 겨울 빼고 어떤 날씨건 간에,
여관과 대장간과 가게 위쪽에서
십자로의 사시나무들은 마지막 잎들이
우듬지에서 떨어질 때까지 함께 비에 관해 얘기한다.

대장간의 용광로에서는 망치와 편자와 모루가
울리는 소리가, 여관에서는
쨍강 소리와 콧노래와 고함과 제멋대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50년간 들렸던 소리들이 .

사시나무들의 속삭임은 묻히지 않고,
다른 온갖 소리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
빛이 사라진 창유리 위로, 누구도 지나다닌 적 없는
하늘처럼 텅 빈 길 위로, 유령들의 거처인 고요한 대장간과

고요한 여관에서 유령들을 불러내고,
적나라한 달빛을 받거나 두꺼운 모피를 걸친 어둠 속에서,
폭풍 속에서나 나이팅게일들이 노래하는 밤중에
반드시 십자로를 유령의 방으로 바꿔놓는다.

근처에 인가가 없었더라도 똑같았으리라.
온갖 날씨와 사람들과 시대 위로
사시나무들은 잎을 흔들어야만 하고 또 사람들 귀에 들릴 테지만
사람들은 내 시에 귀 기울이는 것 이상으로 그 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으니.

어떤 바람이 불어오든 간에 잎을 달고 있는 동안 그들과 나는
우리는 끊임없이 지나치게 비통해하는
다름 아닌 사시나무일 수밖에 없고,
다른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사시나무들」중에서

크리스마스 2주 전, 집시들이 어디서건 눈에 띄었다.
포장을 씌운 마차들이 황야에 멈춰 섰고, 여자들은 장터까지 줄지어 걸었다.
“신사 양반, 복 받을 얼굴이세요”라고 한 여자가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더 복 받을 얼굴인데’라고 나는 생각했다. ‘누더기 속
그런 우아함과 뻔뻔함이 복이라면.’ “가엾은 아기를 위해
1페니만 적선하세요.” “사실 잔돈이 없네요.
당신이 1파운드 금화의 잔돈을 거슬러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에요, 어쩌나.”
“그럼 파이프 담배 반만 나눠 주시겠어요?”
그건 건네주었다. 그만한 승리로도 그녀는 흡족해하며 웃었다.
더 주었어야 했지만, 그녀의 우아함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그에 걸맞은 잔돈을 실제로 건네주기도 전에 그녀는
일행과 합류하려고 아기와 분홍색 조화(造花)들과 함께
저 멀리 가버렸다. 그때 난 한 푼도 값을 치르지 않았다,
지금 내가 잉크에 펜을 적시면서 그녀 남동생의 음악에
한 푼도 값을 치르지 않고 있듯. 그는 탬버린을 두들기며
발을 굴러, 지나가는 노동자들을 씩 웃게 했는데,
그새 그의 하모니카는 천박한 술꾼들의 떠들썩한 춤곡인
〈언덕들 너머 저 멀리〉로 바뀌어 있었다. 이 곡과 그의 눈길은
장 전체보다, 농부와 경매인, 행상인, 풍선 장수,
굽은 막대를 든 가축상, 수송아지, 돼지, 칠면조, 거위, 오리,
크리스마스에는 시체가 될 짐승들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다.
무릎을 꿇은 소조차 그 집시 같은 눈은 갖고 있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나를 위해 내가 막 등장한 유령처럼 자세히 또 유심히 살폈던,
아주 사납게 폭풍우 몰아치는 하늘보다 어둡고 소란스러운
초목 우거진 우묵한 땅을 사람들로 바글거리게 했다. 차츰 짙어지는 어둠은
땅속의 저승 같았으리라, 그 집시 소년이
〈언덕들 너머 저 멀리〉라는 곡을 연주하며 곡조에 맞춰 발을 구를 때
그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빛나던 섬광과 초승달이 없었더라면.
---「집시」중에서

여자를 그는 좋아했다, 삽 모양 턱수염을 기른 밥,
히스 우거진 황야의 늙은 농부 헤이워드는. 하지만 그는
말도 사랑했다. 그 자신이 콥종(種)의 말 같았고,
피부도 말가죽 색이었다. 또 그는 한 나무를 사랑했다.

그 안에 깃든 생명 때문에 그는 대부분의 생명체를 사랑했지만,
유독 한 나무를 사랑했다. 오솔길을 따라
그는 느릅나무를 심었고, 거기선 이제 겨우살이지빠귀의 노래가
천천히 비탈길을 오르는 열차에 탄 여행객들에게 들리곤 한다.

그때껏 그 길은 덤불과
나이팅게일들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얻었어야 할
이름 하나 없었다. 누구 탓도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무언가에 때로 이름을 못 지어주기도 하는 법이니까.

세월이 많이 흘러 밥 헤이워드는 죽었고, 지금은
느릅나무에서 떨어지는 빗방울과 엷은 안개로
오솔길이 어둑한 수렁으로 변한 탓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이
이름만, ‘밥의 오솔길’이란 이름만 남아 있다.
---「여자를 그는 좋아했다」중에서

언덕을 내려오며 나는 배가 고팠지만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추웠지만, 북풍을 막아줄 정도의
체온은 있었다. 피곤했지만, 그래서 지붕 아래서의
휴식이 가장 달콤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는 여관에서 음식을 먹고 불을 쬐고 쉬면서
내가 얼마나 배고프고 춥고 피곤했는지 깨달았다.
그날 밤의 모든 것은 여관 밖으로 말끔히 쫓겨났다
올빼미의 울음, 언덕 위로 길고 또렷하게 터져 나온

아주 음울한 울음만 빼고
그건 전혀 즐거운 지저귐도 아니고 즐거움을 자아내지도 못하면서
그날 밤 여관에 들어섰을 때 내가 벗어났던 게 뭔지,
다른 이들은 벗어날 수 없었던 게 뭔지 뚜렷이 알려주는 울음이었다.

내 음식에는 소금이 뿌려져 있었고 내 휴식 또한
별 아래 누운 모든 이들, 기뻐할 수 없는
병사들과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그 새의 울음소리로
소금 뿌려지고 진지해졌다.
---「올빼미」중에서

벚나무 가지들이 휘어져, 지금은 다 죽고 없는 이들이
지나다니던 오래된 길에서 마치 결혼식을 위해서인 듯
풀밭 여기저기에 꽃잎들을 떨어뜨린다,
결혼할 이 하나 없는 이 이른 5월 아침에.
---「벚나무들」중에서

해가 빛나곤 했다. 우리 둘이 함께
천천히 걷다가,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고,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때로 생각에 잠겼다가 때로 얘기하고는 밤마다

쾌활하게 헤어지는 동안. 어떤 문에 기댈 건지
서로 의견이 갈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앞으로의 일과
요즘 일어난 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시로부터

먼 곳의 전쟁에 관한 소문들로 화제를 돌렸는데 ,
말벌들이 상하게 한 어떤 사과의
향긋한 누런 껍질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지상의 가장 당당한 작은 꽃들로

보초를 서고 있는 진보라색 곽향초석잠이나,
마치 볕이 들지 않는 하계(下界)의 들판에서 태어난 듯한
연보라색 크로커스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엔 둘 다 내키지 않아 하며

멈춰 설 때까지만 그랬다. 저 멀리
동쪽의 병사들이 그때 바라보던 달이
떠오르면서 전쟁이 마음속에
다시 떠올랐다. 그런데도 우리의 눈은

십자군 전쟁이나 카이사르의 전투들을
똑같이 잘 떠올릴 수 있었다. 모든 게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그 소문들처럼
달빛 아래 반짝이는

개울물처럼 지금의 그 산책들처럼
산책을 한 우리 두 사람,
떨어진 사과들, 그 모든 이야기와
침묵처럼 다른 이들이 똑같은 달 아래

그 들판에서 다른 꽃들을 헤치고 나아가면서
얘기를 나누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조수(潮水)가 조만간 뒤덮을 때의
기억의 모래밭처럼.
---「해가 빛나곤 했다」중에서

겨릿말의 놋쇠 머리테가 이랑을 돌며 번득였을 때,
연인들은 숲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묵정밭 한 귀퉁이를 뒤덮은
쓰러진 느릅나무의 가지 사이에 앉아,
쟁기가 노란 들갓 구역을 좁혀가는 걸
지켜보았다. 말들이 나를 짓뭉개는 대신
휙 방향을 틀 때마다 농부는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는 날씨에 대해, 그러고는 전쟁에 대해
한마디 하거나 묻곤 했다.
보습의 날을 닦으며 그는 숲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놋쇠 머리테가 한 번 더 번득일 때까지 이랑을 따라
몸을 비틀었다.
폭풍설이 쓰러뜨린 느릅나무의 꼭대기 쪽
딱따구리가 파놓은 둥근 구멍 옆에 내가 앉자
농부가 말했다. “언제 저걸 치워주려나?”
“전쟁이 끝날 때겠죠.” 그렇게 대화는 시작되었다?
1분의 대화와 10분의 뜸,
또 1분의 대화와 똑같은 뜸.
“전쟁에 나갔었어요?” “아뇨.” “나가고 싶진 않겠죠, 아마?”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나가야겠죠.
팔 하나쯤은 내줄 수 있는데. 다리를 잃고 싶진
않아요. 머리를 잃게 된다면, 글쎄, 그럼,
더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되겠지만요……. 여기서도 많이들
나갔나요?” “그럼요.” “많이들 목숨을 잃었죠?” “그럼요, 꽤 되죠.
올해는 두 겨리로만 농사를 짓게 되네요.
내 친구 한 명도 죽었어요. 프랑스에 가서
이튿날 전사했죠. 지난 3월이었는데,
바로 이렇게 눈보라가 치던 날 밤이에요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 친구가 여기 남아 있었더라면 저 나무를 옮겼을 거예요.”
“그럼 나도 여기 앉아 있질 못했겠군요. 모든 게
달라졌겠죠. 딴 세상 같았을
테니까요.” “그럼요, 더 나은 세상이 되었겠죠. 물론
우리가 만사를 내다볼 수 있다면 다 좋게 보였을 거예요.” 그때
연인들이 다시 숲에서 나왔다.
말들이 출발했고, 마지막으로
나는 보습과 비틀거리는 겨릿말 뒤로
흙덩이들이 바스러지고 뒤집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겨릿말의 놋쇠 머리테가」중에서

나는 잠의 국경에 다다랐다,
누구나 길을, 아무리 똑바르건
굽어 있건, 이르건 늦건 간에,
잃을 수밖에 없는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숲에.
누구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처음 동이 튼 순간 이래로
저 위 숲 가장자리까지
여행자들을 속였던
숱한 길들과 오솔길들이
갑자기 지금 흐릿해지더니
가라앉는다.

여기서 사랑은 끝나고,
절망과 야망도 끝난다,
모든 즐거움과 모든 괴로움은
더없이 달콤하거나 더없이 쓰라리더라도
여기 가장 숭고한 임무들보다도 달콤한
잠 속에서 끝난다.

어떻게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나 혼자 들어가고 떠나야만 하는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해
지금 외면하지 못할
어떤 책도 또 더없이 소중한 눈길을 지닌
어떤 얼굴도 없다.

높다란 숲이 우뚝 솟아오른다.
흐릿한 잎들이 앞쪽에
선반 위에 선반을 내려뜨린다.
숲의 침묵을 나는 듣고 따른다,
길을 또 나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도록.
---「소등(消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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