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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이우일의 영화 이야기

김영하 이우일의 영화 이야기

김영하 글 / 이우일 그림 | 마음산책 | 2003년 02월 0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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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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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03년 02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14쪽 | 479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9351351
ISBN10 898935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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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들으면 심각하게들 생각하지만 내겐 별스럽지 않은 과거가 하나 있다. 다름아니라 열 살 때 연탄가스를 마시는 바람에 그 이전의 기억을 다 날려먹은 사건이다. 그 무렵 우리 가족은 양평읍에 살았었는데 아버지는 군인이라 집에 잘 들어올 수 없었고 때마침 동생은 친척집에 간 터라 문제의 그날은 나와 어머니만 집에서 자고 있었다(고 한다. 내 기억엔 없으니까). 그 다음 기억은 양평 읍내의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것이었다. 옆엔 나보다 상태가 좀 심각했던 어머니가 아직 정신을 못 차린 채 누워 계셨다. 그렇지만 어린 마음에 사람들이 바나나 사들고 오는 것만 좋아서 헤벌레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사실 이것도 나중에 재구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익숙한 장면 아닌가?).

(중략)

그런데 그때 몰랐던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와 불현듯 내 유년에 관해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거나 하면 마치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것처럼 멍해져버리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 시기가 있기는 있었던 걸까? 도대체 초등학교 1학년, 2학년때 나는 뭘했던 걸까?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중략)

부모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초등학교 1,2학년 때의 나는 매우 산만하고 정신없는 아이였고 소방차를 좋아해 불만 나면 거기로 '출동'하는 골치 아픈 아이였다는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부모님께서 혹시 딴 집 아이 얘기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혹시 우리 부모는 어렸을 적 김영하라는 이름의 아이를 어디선가 잃어버리시고는 고아원에서 날 주워와 가짜 기억을 입력해놓은 게 아닐까? 연탄가스를 마셨다는 것도 사실은 거짓말이고 뭔가 이상한 물질을 주입하여 내 고아원 기억을 없애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어쨌거나 나는 연탄가스를 마시기 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대학생이 되어서야 알게된 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중요한 것(어쩌면 단순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렸을 적에는 기억 혹은 추억이라는게 전혀 중요하지가 않다. 어린아이들에겐 현실과 미래가 더 중요하다. 과거의 추억이래봐야 얼마 되지도 않고 그거 회상하고 앉아 있을 한가한 시간도 별로 없다. 군인인 아버지 탓에 여섯 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다녔던 나같은 애한테는 더욱 그랬다.

(중략)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때의 기억이 별로 아쉽지 않다. 조용한 방 안에 고요히 앉아 내면을 응시하다 보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응답을 듣는데, 그 응답은 이런 거이다. 기억은 중요하지 않다. 기억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억은 비로소 중요해진다. 기억을 잃으면 모든 걸 잃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고 스크랩을 하고 자료를 모은다. 그렇게 기억에 집착하는 이들 덕분에 우리는 과거를 잊지 않을 수 있지만 도대체 왜 과거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빠져 있다면 그 기억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러니 내게는 '메멘토'가 기억의 불완전함을 다룬 영화라기 보다는 기록에 대한 집착을 이야기하는 영화로 보였다. 그럴 수밖에. 기억이 불완전하다는건 당연한 일이고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기억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것. 잘 생각해보면 우리를 속이는 건 기억이 아니고 오히려 기록이다. 레너드도 그렇지만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 pp.4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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