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06년 1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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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719쪽 | 1002g | 153*224*40mm |
ISBN13 | 9788983711892 |
ISBN10 | 8983711892 |
포함 과학 2만원/3만원 이상 구매 시, 우주 굿즈/파도 문진 증정 (택1/포인트 차감)
출간일 | 2006년 12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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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719쪽 | 1002g | 153*224*40mm |
ISBN13 | 9788983711892 |
ISBN10 | 8983711892 |
전 세계 60개국에 방송되어 6억 시청자를 감동시킨 텔레비전 교양 프로그램을 책으로 옮긴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Cosmos)』. 현대 천문학을 대표하는 저명한 과학자인 칼 세이건은 이 책에서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난해한 개념을 명쾌하게 해설하는 놀라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그는 에라토스테네스, 데모크리토스, 히파티아,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다윈 같은 과학의 탐험가들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가며 과거, 현재, 미래의 과학이 이뤘고, 이루고 있으며, 앞으로 이룰 성과들을 알기 쉽게 풀이해 들려준다. 이 책은 모두 13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칼 세이건은 이 책에서 10조 개의 별들을 품고 있는 은하가 10조 개 있는 광막한 대우주의 세계에서 은하수 은하의 변방, 자그마한 노란색 별 태양이 이끄는 태양계의 한구석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지구에 이르기까지 코스모스에 대해 우리 인류가 알게 된 것들, 알게 된 과정들, 그리고 알아 갈 것들을 소개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코스모스 특별판은 수록 이미지가 흑백으로 실려 있다. |
Chapter 1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 Chapter 2 우주 생명의 푸가 Chapter 3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Chapter 4 천국과 지옥 Chapter 5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 Chapter 6 여행자가 들려준 이야기 Chapter 7 밤하늘의 등뼈 Chapter 8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 Chapter 9 별들의 삶과 죽음 Chapter 10 영원의 벼랑 끝 Chapter 11 미래로 띄운 편지 Chapter 12 은하 대백과사전 Chapter 13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 감사의 말 부록 1 부록 2 참고 문헌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PICTURE CREDITS |
코스모스 : 과학으로부터 배우는 생존 전략
지구에서 과학을 하는 생물 종은 인간밖에 없다. 과학이 인간의 진화 과정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과학하기가 유효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과학하기는 아직 완벽하지 못하므로 잘못 사용될 수 있다. 과학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다. 과학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줄 안다는 것이 하나의 특성이다. 또한 모든 분야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또 다른 특성도 있다. 그리고 과학하기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첫 번째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란 가정은 모조리 철저하게 검증돼야 한다. 과학에서 권위에 근거한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스모스의 682쪽의 모든 이야기는 결국 위의 얘기로 귀결된다고 생각했다. 핵무기를 통한 전쟁 억지라는 아이디어는 과연 과학적일까? 우크라이나의 신나치 세력을 퇴치하고자 특수작전이라며 전쟁을 일으킨 푸틴의 권위는 인정될 수 있을까? 선거에서 표를 얻을 수 있다며 이대남 주장을 중심으로 갈라치기를 한 윤석열과 이준석의 가정은 선거에서 이겼다고 하여 옳았던 가정일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무리 생활을 통해 진화했으므로 상호동반자적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고 상대방을 보살피고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의 본성은 무리 생활을 통한 진화의 당연한 결과이고 이러한 진화의 과정에서 우리 마음에는 희생의 정신이 깊이 새겨졌다고 설명한다. 상대를 없애려는 모든 태도는 진화에 역행한 행동이라는 말이다.
우리 손에 모두 다섯 개의 손가락이 달려 있는 것은 인간이 데본기에 번성했던 지골이 다섯 개인 어류에서 진화했기 때문이란다. 인간의 진화과정을 보면 모순적인 우리의 모습을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비록 기분도 안 좋고, 수용하기도 껄끄럽지만, 그게 과학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정치인들이 생명을 건듯한 싸움을 하면서도 말로는 공존과 발전, 화해와 협력을 말하면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하다. 폴 맥린이 제시한 도발적인 학설에 의하면 인간 뇌의 고차원적인 기능들이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뇌간의 상단부를 모자처럼 뒤덮고 있는 영역을 R-영역이라 부르는데 이 부위는 수억 년 전 인간이 아직 파충류였던 시기에 발달했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악어의 두뇌가 아직 남아 있는 셈이다. R-영역은 변연계가 둘러싸고 있는데 바로 이 부위가 포유류 시기에 생긴 뇌라고 한다. 이 변연계는 수천만 년 전 인간이 포유류이고 아직 영장류로 되기 이전 시기에 발달한 부위이다. 끝으로 뇌의 가장 바깥 부분인 대뇌 피질이 영장류였던 시기에 생긴 부위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방인과 외계인에 대한 적개심을 갖거나, 내 편과 네 편을 구분하여 죽이고 싶을 정도의 격렬한 분노를 갖고 싸우는 것은 악어의 뇌가 시키는 것이고, 상호 동반자적 관계를 회복하길 원하고 상대방과 연대하며 서로를 보살피고 사랑하려는 마음은 그게 생존에 더 효율적이라는 영장류의 대뇌피질이 시키는 생각이고 행동이라는 것이다. 정치인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미워지지만 진화의 차이라면 연민의 정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때 우주 한 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성장해, 자신의 기원을 더듬을 줄도 알게 된 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고 저자는 호소한다. 모든 주장이 과학의 이름으로, 과정의 검증을 통하여 권위에 빌붙지 않은 주장이라 공감한다. 우리 사회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추상적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갈릴레이와 코페르니쿠스와 숱한 과학자들이 실험과 검증을 통하여 세상을 이해했던 방식이 시민사회에 두루 퍼져 소모적인 고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칼 세이건의 부재가 아쉽기만 하다.
우리가 평등을 얘기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2.
아리스타르코스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위대한 유산은 지구와 지구인을 올바르게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구와 지구인이 자연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위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보편성으로 확장됐고 옆으로는 인종 차별의 철폐로까지 이어졌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위대한 유산은 별들의 영역 너머로까지 그 적용범위가 확장됐다. 18세기 말, 영국 국왕 조지 3세의 궁정 음악가이자 천문학자였던 윌리엄 허셜은 별들의 분포를 지도로 작성했다. 허셜이 작성한 별들의 지도에는, 은하수의 띠가 흐르는 평면 안에서 어느 방향으로 보든지 비슷한 수의 별들이 늘어서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 지구가 은하수 은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과연 그럴까?
미국의 미주리 주 출신 할로 섀플리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구상 성단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새로이 고안해 냈다. 구상 성단에서 특정한 패턴으로 밝기가 변화하는 별을 찾아내고 그 변광 주기에서 그 별의 원래 밝기를 추정한 다음 겉보기 밝기와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그 별까지의, 즉 구상 성단까지의 거리를 계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밝기를 알고 있는 가로등의 희미한 정도로부터 나와 그 가로등 사이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같은 이치에서 별까지의 거리도 측정할 수 있다. 그 결과는?
1915년 섀플리는 “태양계는 은하의 중심이 아니라 은하의 외진 변방에 있다.”라는 참으로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허셜의 오류는 궁수자리 방향에 있는 많은 양의 미세 고체 입자들 때문이었다. 성간 티끌이라 불리는 이 고체 입자들이 별빛을 아주 효과적으로 흡수. 산란하기 때문에, 허셜은 성간 티끌의 장막 너머에 존재하는 어마어마한 수의 별들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태양계가 은하의 중심핵으로부터 약 3만 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고 확실하게 알고 있다.
은하수 은하의 중심 지역에는 구상 성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별들이 많다. 은하의 중심핵에서는 육안으로도 밝은 별들을 100만 개 이상이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수는 고작 수천 개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한 곳에 있는 ‘사람들’도 그들의 태양, 아니 태양들이 뜨고 지는 것을 계속 보겠지만, 태양들이 진다고 해서 깜깜한 밤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확인하면 우리의 위상을 확실히 알 수 있다.
태양이 속해 있는 은하라는 것도 뭐 그리 대단한 존재도 못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주의 후미진 구석을 차지하고 겨우 십여 개의 구성원을 거느린, 작은 은하군의 그저 그렇고 그런 ‘식구’ 일뿐이다. 그런데 그 우주에는 지구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의 은하들이 널려 있다.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과 대면하게 될 때마다 우주에서 인류의 지위는 점점 강등됐다. 한 발짝 한 발짝 무대의 중심에서 멀어질 때마다 강등당하는 인류의 지위를 한탄하던 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가슴과 가슴 깊숙한 곳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초점이며 지렛대의 받침목이기를 바라는 아쉬움이 아직 숨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녕 코스모스와 겨루고자 한다면 먼저 겨룸의 상대방인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 여태껏 인류가 멋모르고 부렸던 우주에서의 특권 의식에 먹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코스모스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자신의 위상과 위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주변을 개선할 수 있는 필수 전제이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의 이야기는 과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생각이 얼마나 오만불손하고 우주 질서와 맞지 않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오니아에서 시작된 과학과 탐구 실험의 정신이 사라진 것은 실용적 가치를 얕잡아 보는 풍조가 만연 하면서였다. 기능인에 대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과 천시 때문에 전도가 유망하던 이오니아의 실험 중심적인 방법론은 그 후 2,000년 동안이나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다. 과학은 실험에 의존하지 않고는 발전을 할 수 없다. 실험에 대한 혐오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테네인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대범한 생각들은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해당됐지, 구성원 전부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의 정체성은 손을 사용하는 그들의 육체노동에 있었다. 육체노동은 바로 노예임을 뜻했다. 한편 과학 실험도 육체노동이었다. 노예 소유자들은 당연히 육체노동과 거리를 뒀다. 그러나 과학을 할 만큼의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도 일부 사회에서 체면치레로 ‘gentle-men’이라 불러 주는 바로 노예주들뿐이었다. 그러니 과연 누가 과학을 했겠는가? 거의 아무도 과학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슷한 경향을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엘리트 계층의 경직된 사고는 과학정신 쇄락의 원인이라고 네이선 시번이 찾아냈다. 중국의 경우가 그랬고, 현대 (정치적) 제3세계의 커다란 문제도 그렇다. 고등 교육의 기회가 주로 부유층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이다. 부유층 출신은 당연히 현상 유지에만 관심이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일을 하여 무엇을 만든다던가, 또는 기존의 지식 체계에 도전하던가 하는 일을 매우 어려워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런 나라들에서 과학이 뿌리내리기는 지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 사회에서 편히 살던 인물이었다. 그들은 노예 제도의 부당성에 괴로워하기보다 오히려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지를 폈으며, 전제 독재 군주를 섬겼고 육체와 정신의 분리를 가르쳤다.(노예 사회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생각이다.) 그들은 또 사상과 물질을 별개의 것이라고 가르쳤다. 어디 그것뿐인가. 그들은 하늘에서 지구를 분리시켰다. 이것이 서양의 정신세계를 2,000년 이상 지배해 온 분리의 사상이다.
전체 우주의 변두리 후미진 구석,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단지 십여 개의 구성원을 거느린 작은 은하군, 그 작은 은하군의 또 다른 후미진 구석에 위치한 은하의 변두리에 위치한 볼품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을 변두리 촌놈들이 특별한 듯 노예와 귀족을 구분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우주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차별하는 것에 어찌 대응을 할 수 있을지 무력감을 느낀다. 우리가 지구인으로서 차별을 없애고 평등을 얘기하는 이유는 우주적 관점에서 너무나 명징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평등을 얘기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 1.
플라톤주의자들과 그들의 기독교 후계자들은 지상의 세계는 때 묻고 골치 아픈 곳인 반면에 천상계는 완벽하고 신성하다는 특이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지구가 근본적으로 하나의 행성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우주 시민으로서 지구인의 위상을 망각한 채 살았다. 지구가 하나의 행성이며 지구인은 우주 시민이라는 생각은 피타고라스 이후 3세기가 지난 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os)에서 시작한다.
아리스타르코스는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이고 모든 행성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의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별들도 우리의 태양과 같은 존재일 것으로 생각한 사람도 아리스타르코스였다. 그는 태양을 별들의 반열에 가져다 놓은 장본인이다. 눈앞에 손가락을 세워놓고 처음에는 왼쪽 눈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오른쪽 눈으로 손가락을 본다면, 멀리 떨어져 있는 배경에 대하여 내 손가락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손가락이 눈과 가까울수록 그 움직이는 듯한 거리가 크다. 이러한 시선 방향의 차이에 따른 겉보기 움직임의 변화, 즉 시차(視差, parallax)를 통해서 손가락까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다. 내 두 눈 사이의 간격이 넓으면 넓을수록 손가락의 겉보기 위치는 그만큼 더 많이 이동한다. 관측이 이루어진 두 위치 사이의 거리가, 즉 기선이 길면 길수록 시차가 크게 관측되고, 따라서 더 멀리 떨어진 물체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사람의 두 눈 사이의 간격은 일정하게 고정돼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구는 관측자에게 움직이는 관측대를 제공한다. 즉 지구가 6개월이 지나면 궤도의 정반대 편에 오므로 지구에서의 기선이 실제로 3억 킬로미터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별들이 천구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6개월의 시간 간격을 두고 관측한다면 매우 멀리 있는 천체라도 그 거리를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6개월의 시간차를 두고 별을 관측해보아도 그 별의 시선 방향에는 변화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그 의미는? 별들이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에 비해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별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같은 물체라도 관측자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작게 보인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태양은 더 작고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태양에서부터 얼마나 멀리 달아난다면 태양이 하나의 별같이 작고 흐린 점으로 보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실험을 처음 시도한 인물은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오니아의 전통을 그대로 따라서, 굵기가 다른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동판을 태양을 향해 들고, 어느 크기의 구멍을 통해서 본 태양의 밝기가, 전날 밤에 자신이 보아 둔 천랑성의 밝기와 비슷한지 조사했다. 결과는 태양의 겉보기 지름의 2만 8000분의 1이 되는 구멍으로 본 태양의 밝기가 천랑성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결과를 통해서 천랑성은 지구와 태양 사이의 거리보다 2만 8000배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추론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 거리를 측정하려면 태양과 천랑성의 원래 밝기가 같다는 가정이 필요하다. 그런데 천랑성은 태양보다 원래 더 밝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천랑성까지의 실제 거리는 8.8광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