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0년 1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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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20쪽 | 764g | 153*224*30mm |
ISBN13 | 9791164136452 |
ISBN10 | 1164136453 |
발행일 | 2020년 12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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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20쪽 | 764g | 153*224*30mm |
ISBN13 | 9791164136452 |
ISBN10 | 1164136453 |
MD 한마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이 다시 정의를 묻는다. 현대 많은 사회에서 합의하는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차등'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까? 마이클 샌델은 미국에서 능력주의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개인의 성공 배후에는 계급, 학력 등 다양한 배경이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회를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 손민규 사회정치 MD
서론: 대학 입시와 능력주의 입시의 윤리 | 능력 지표 따내기 CHAPTER 1. 승자와 패자 포퓰리즘적 불만에 대한 진단 | ‘테크노크라시’와 시장 친화적 세계화 | 빈부격차를 그럴싸하게 설명하는 법 | 능력주의 윤리 | 굴욕의 정치 | 기술관료적 능력과 조직적 판단 | 포퓰리즘의 준동 CHAPTER 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왜 능력이 중요한가 | 우주적 능력주의 | 구원과 자기 구제 | 과거와 지금의 섭리론 | 부와 건강 | 자유주의적 섭리론 | 역사의 옳은 편 | 도덕 세계의 궤적 CHAPTER 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고된 노력과 정당한 자격 | 시장과 능력 | 자기 책임의 담론 |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 포퓰리즘의 반격 | 과연 “하면 된다”가 맞나? | 보는 것과 믿는 것 CHAPTER 4. 최후의 면책적 편견, 학력주의 무기가 된 대학 간판 | 불평등의 해답은 교육? | 최고의 인재들 | 스마트해지기 위한 일 | 대중을 내려다보는 엘리트 | 학위가 있어야 통치도 한다 | 학력 간 균열 | 기술관료적 담론 | 테크노크라시냐 데모크라시냐 | 기후변화 논란 CHAPTER 5. 성공의 윤리 기술관료의 지배냐 귀족의 지배냐 | 능력주의의 어두운 면 | 능력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 완벽한 능력주의는 정의로운가? | 재능은 자신만의 것인가? | 노력이 가치를 창출하는가? | 능력주의의 두 가지 대안 | 능력주의에 대한 거부 | 시장과 능력 | 시장 가치냐 도덕적 가치냐 | 쟁취한 자격인가, 권리가 인정된 자격인가? | 성공에 대한 태도 | 운수와 선택 | 재능 계산하기 | 능력주의의 등장 CHAPTER 6. ‘인재 선별기’로서의 대학 능력주의 쿠데타 | 능력주의의 폭정,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다 | 코넌트의 능력주의 유산 | 돈 따라 가는 SAT 점수 | 불평등의 토대를 더욱 다지는 능력주의 | 명문대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이유 | 능력주의를 더 공평하게 만들기 | 인재 선별 작업과 사회적 명망 배분 | 상처 입은 승리자들 | 또 하나의 불타는 고리를 넘어라 | 오만과 굴욕 | 유능력자 제비뽑기 | 인재 선별기 부숴버리기 | 명망의 위계질서 | 능력에 따른 오만 혼내주기 CHAPTER 7. 일의 존엄성 일의 존엄성 하락 | 절망 끝의 죽음 | 분노의 원인 | 일의 존엄성 되살리기 | 사회적 인정으로서의 일 | 기여적 정의 | 일의 존엄에 대해 논쟁하자 | ‘열린 어젠다’의 오만 | 금융, 투기 그리고 공동선 | 만드는 자와 가져가는 자 결론: 능력, 그리고 공동선 |
마이클 샌델 교수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이후 8년 만에 새로운 화두, ‘공정’을 들고 우리 곁을 찾아왔다.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의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과연 무엇이 공동선을 만드나?)’로 지난 9월 출간됐다.
현재 ‘공정’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는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가령 기업은 ‘공정 채용’ 문제로 혼란에 빠져 있고, 정치권에선 ‘공정 경제’ 관련 법안으로 떠들썩하다.
책에서 샌델 교수는 “우리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개인의 능력을 우선시하고 보상해주는 능력주의 이상이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노력한 대로 받는다’는 능력주의 이상이 허구라고, ‘공정함은 곧 정의’라는 통념을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러고 보면 금수저와 흙수저로 대비되는 것처럼 이미 사람들은 스타트 선상에서부터 각자 다른 조건에서 시작한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인 사람이나 교육을 많이 받은 집안에서 자라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계층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갖기 마련이다. 이는 곧 부의 세습이요, 자본의 대물림이다.
여기서 우리는 ‘능력주의적 경쟁에서 비롯된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봉착한다. ‘그렇다’라고 답변한다면 당신은 능력주의 옹호론자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 그리고 훈련, 교육, 영양 등등 똑같이 접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코로나19 시대 강남 엄마들은 신이 났다는 소식이 들린다. 선행 학습과 고액 과외를 맘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수업하다 보니 학력 격차도 점점 심해지는 모양이다.
샌델 교수는 특유의 문답과 예시로 독자들을 논리의 향연으로 이끄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번 신간 역시 그가 펼치는 논리 전개는 스스로 생각하기, 스스로 실천하기에 이르는 소크라테스식 해법이 주된 방식이다. 이제 교수와 함께 능력주의와 관련한 철학과 윤리 문제를 살펴보기도 하자.
책은 2019년 3월 미국에서 터진 대형 입시 스캔들로 시작한다. 33명의 부유한 학부모들은 자녀를 명문대에 넣기 위해 입시 부정에 가담했다. 윌리엄 싱어라는 브로커는 학부모들에게 거액을 건네받아 SAT 답안지를 조작하거나 가짜 체육특기생을 만들어냈다. 그는 무려 8년간 2500만 달러를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11월 한국에서도 미국 명문대에 입학시켜주겠다며 학부모들에게 입시 컨설팅 명목으로 거액을 받고 고교 성적증명서 등 서류를 조작한 일당이 적발됐다.
이 스캔들은 대중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분노는 단지 ‘특권층 부모들이 불법적 수단으로 자녀들을 명문대에 입학시켰다’는 데 그치지 않았다. ‘누가 앞서가고 있으며, 그것이 왜 허용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만들어냈다. 샌델 교수가 이번 책에 착안하게 된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중략)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 51쪽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샌델 교수는 1980년부터 하버드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쳐오면서 해가 지남에 따라 학생들의 의견이 바뀌는 것은 없는지 살펴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에 따르면 199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는 현상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성공은 자신의 덕이며,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따라 얻은 것’이라는 신념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고 진단한다. 능력주의는 전혀 공정하지 않으며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주는 가혹한 현실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에 따르면 능력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의견 불일치는 공정성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성공과 실패 또는 승리와 패배를 어떻게 정의하는가도, 그리고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승리자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도 문제다.
저자는 오늘날 민주사회의 정치 담론 중심에 있는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복지국가 자유주의’를 비교 분석한다. 이에 따르면 두 사상 모두 성공관에 있어 능력주의와 구별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능력을 정의의 기반으로 삼는 일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공통적이다.
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경제 불평등을 줄이려는 정부 노력에 반대하면서 자유시장이 각자에게 걸맞은 보상을 해준다고 보았다. 또한 소득이나 부의 재분배를 반대하기 위하여 “시장은 능력에 대한 보상과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와 반대로 롤스는 “공정한 기회를 보장하며 계층 차이에 따른 불이익을 완전히 보상해 주는 체제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로 부르기에는 불충분하다”면서 “재능의 차이는 계층의 차이 만큼이나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우연적 요소”라고 지적했다. ‘부자는 돈을 벌 만한 자격이 있어서 번 것’이라는 주장을 반박해 재분배를 옹호했다. 하이에크와 롤스 모두 ‘경제적 보상이 개인의 자격에 근거하면 안 된다’고 봤다. 이처럼 두 사람은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것을 가져야 한다’는 능력주의 신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샌델 교수의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능력주의자들이 초래하기 쉬운 오만과 굴욕에 벗어나 공동선을 만들고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샌델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민주당을 주된 비판 대상으로 삼는다. 오바마 전 대통령을 비롯한 좌파 엘리트들의 능력주의적 태도와 기술관료적 통치가 세계화에서 낙오된 패자들을 제대로 품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능력주의의 폭정’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원한 것은 경제적 불평등 해소를 통한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스스로가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다는 ‘존중’인데 그것을 미처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파고든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이 제시하는 대안은 ‘일의 존엄성’ 회복이다.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교수가 전제하는 것은 ‘시장의 성과는 각자가 공동선에 기여한 것의 참된 사회적 가치를 반영한다’는 논리를 뒤엎는 것이다. 시장의 낙인에서 벗어나 우리가 공동선에 진정으로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노력의 일환이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 343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더 바람직한 공정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샌델 교수는 ‘운’이 주는 능력 이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태도로 연대하며, 일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곳이든 일정 능력은 필요로 하는 법. 다만 능력을 극대화되어야 할 이상으로 보기보다 일정 관문을 넘을 수 있는 조건으로만 보는 등 사회적 합의를 거쳐 어떤 기준을 정해놓을 필요가 있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라는 명제는 자유시장경제의 핵심 테마이자, 능력주의의 이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로 대변되는 능력주의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공정하다고 생각해왔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에 따라 그에 합당한 결과를 얻는다는 명제 앞에 선뜻 반론을 제시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설사 그런 반론이 제기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패자의 변명이나 자기합리화로 치부하고 무시할 뿐이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능력주의의 이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로 잘 알려진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도 그 중 하나이다. 그는 능력주의의 이상이 잘못되었다며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공정함이 과연 정의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책 [공정하다는 착각]은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능력주의에 얽힌 공정함과 정의에 대해 살펴보며, 그것이 정말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인지를 짚어보고 있다.
최근 들어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진 것은 왜일까? 아마 극심한 불평등에 따른 포퓰리즘적 저항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런 포퓰리즘적 저항은 바로 주류정당과 집권 엘리트들이 자아낸 분노가 불을 댕긴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런 분노는 지난 40년간 추구해온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공공선을 경제적 가치로 규정하고, 불평등으로 인한 승자와 패자를 능력주의적 개념으로 정의 내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들을 오만으로, 패자들을 굴욕과 분노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저자는 먼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살펴보며, 능력주의의 기원을 서구문화의 도덕적 직관에 깊게 뿌리내린 성서신학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성공이란 행운이나 은총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분투로 얻은 성과이기에, 사회가 능력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지위를 배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는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며 각자 스스로 필요한 것을 정당하게 얻을 수 있도록 했고,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는 자본주의 정신의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능력주의적 사고방식에 적합한 윤리의식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성공은 미덕의 증표가 되었고, 나의 부유함은 나의 몫이며 따라서 실패도 그들 몫이라는 것이 능력주의 윤리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능력주의 윤리는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을 주는 한편,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복지국가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련 리스크를 개인에게 전가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소득불평등이 클지라도 계층이동이 가능하리라 생각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고, 이런 담론은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을 정당화 시켰다고 한다. 다시 말해 능력주의의 약속은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가능성의 약속이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런 교육을 개인 책임으로 돌리면서 교육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시했고, 사람을 승자와 패자로 나누는 일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능력주의에 대해 두 가지 반론을 제기한다. 하나는 정의에 대한 것으로 설령 능력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해도 그게 과연 정의로운 사회인지를 묻고, 다른 하나는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 능력주의가 공정하다고 해도 그게 과연 좋은 사회인지를 묻는다. 그는 먼저 성공에 대한 모든 불공정한 장애물을 제거했다고 상상한다. 그럴 경우에도 가장 포괄적인 교육체제 안에서 가난한 집 아이가 풍부한 관심과 자원과 인맥을 갖춘 집안의 아이와 평등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하기란 어렵고, 설사 이마저 제거했다고 하여도 문제는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경주를 시작하느냐의 여부라고 말한다. 저자는 능력주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이러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 또한 능력주의 이상은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하고 노력의 중요성만을 과장한다. 그로인해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분노를 자아내게 만들뿐 아니라 공동선 개념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주의 성공개념의 핵심은 무엇일까? 저자는 교육과 일을 꼽는다. 먼저 능력주의 시대의 고등교육은 사회적 이동성의 엔진이 되지 못하고 특권층 부모가 자녀에게 특권을 물려줄 기회만을 제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에 재학하는 절대 다수의 학생이 이미 상층부 집안 출신이며, 이는 미국의 대학들이 대부분 기회를 늘리기 보다는 특권을 공고히 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정치가들이 불평등 증가의 해법이 사회적 이동성증가이며, 사회적 이동성을 늘리는 방법이 교육이라는 주장과 배치되는 결과이기도 하다. 경쟁률이 높은 인기대학들은 능력 위계질서의 정점에 있는 대학들로 이러한 승자독식형 재선별은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라고 그는 경고한다. 그런가 하면 능력주의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정체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마저 깎아내리고 있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임에도 시장은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하고, 노동자에게 던져주는 쥐꼬리만한 보상도 당연시하기에 능력주의가 일으킨 불평등이 강력한 분노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일의 존엄성을 복구해줄 유일한 정치 어젠다는 분배적 정의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기여도에 대한 배려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타개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행운’이라는 ‘우연’이 주는 능력이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연대하며, 일 자체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교육영역에서 내놓은 대안은 수학능력평가시험인 SAT의존도를 줄이고, 동문자녀/체육특기생/기부금입학자에 대한 혜택을 없애 명문대에 더 많은 사람이 입학하도록 하는 것이다. 더불어 지원자 중 수학능력상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만 걸러내고, 지원자 중에서 추첨하여 선발하자고 한다. 일정관문을 넘는 조건으로만 능력을 보고 나머지는 운이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는 대안제시 뿐만이 아니라 이에 대한 반론을 예상하고 나름의 답변까지도 준비해놓고 있다. 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급여세를 없애고 금융거래세를 신설하는 것과 같이 사회적 기여 측면에서 일을 생각하자고 한다. 물론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들이 근본적으로 능력주의가 가져온 폐해들을 해결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들이 실시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만약 우리사회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논란과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말 것이다. 그렇지만 삶의 영역에서 행운이 좌우할 수 있음을 인정할 때 능력주의가 가져다주는 오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수긍이 가기도 한다.
최근 들어 능력주의에 관한 책들이 많이 눈에 뛴다. 그만큼 현대 세계가 능력주의의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있고, 그만큼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마이클 샌델은 미국사회의 능력주의 폐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우리사회 역시 예외는 아니다. 승자에겐 오만을 그리고 패자에겐 굴욕을 안겨주는 능력주의의 민낯은 어쩌면 우리사회가 더욱 심할지도 모르겠다. 사다리의 길이는 길어지고, 그 간격은 더없이 넓어진 지금 우리는 비로소 공정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되묻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에게 필요한 공정과 정의에 대해서 새삼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불평등 논의가 나오는 이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다.’
인간이 이타적이고 근면한 존재라면 가능할 지도 모를 이상(理想)이다. 하지만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성인(聖人)이 아닌 대부분의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에도 바쁘다. 따라서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거나 노력해서 무엇인가 이루어낸 사람과 별다른 노력 없이 살아온 사람이 같은 혜택을 받게 된다면, 굳이 나서서 노력하고 희생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 결과 하향평준화가 가속되어 생산성이 하락하고 사회 전체가 결핍으로 허덕이는 파국을 맞이한다. ‘결과의 평등’만을 추구한다면 빚어지게 될 비극이다.
반면, 능력주의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p. 4]. 과정에서의 공정을 전제로 결과에서의 불평등을 인정하는 ‘기회의 균등’을 추구한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같은 출발선에서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뭔가를 이루고, 그 과실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에서 ‘같은’ 출발선이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게다가 결과에서의 과도한 불평등은 경제 시스템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약화시키고 나아가 실질적인 사회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축소시킨다. 이는 ‘기회의 평등’에 담겨있는 한계 때문이다. “기회의 평등은 부정의를 교정하는 데 필요한 도덕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정적 원칙이며, 좋은 사회를 만드는 적절한 이상이 아니다.” [p. 348]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와 ‘대처리즘(Thatcherism)’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본격화된 이후 ‘20 대 80 사회’를 거쳐 ‘1 대 99 사회’가 출현한 것은 이를 보여준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하지만) 1900년대와 2000년대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을 이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였다. 성공의 길에 놓은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등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이는 소득 사다리의 단 사이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로 먼저 사다리에 오르려 경쟁하는 과정에서만 공정함을 추구할 뿐이다.” [p. 145]
이미 소득 불평등이 교육 불평등을 낳고, 교육 불평등이 계층 이동의 사다릴 없애는 악순환이 현실이 되었기에 “노력과 재능 만으로 누구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미국인의 믿음은 더 이상 사실과 맞지 않는다. 기회 균등에 대한 담론이 과거와 같은 반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사회적 이동성은 더 이상 불평등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빈부격차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무엇이든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직접 다뤄야만 하며, 사다리를 오르는 사람들을 돕는 방안으로는 무마될 수 없다. 사다리 자체가 점점 오르지 못할 나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p. 51]
뿐만 아니다.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속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 앤서니 엣킨슨의 <불평등의 넘어> 처럼 불평등을 줄이자는 얘기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저자는 “능력주의가 과도해지면서 능력과 도덕 판단력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한 편이 성과를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새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하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되어, 이것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p. 5] 즉, 앞선 자[승자]에게는 오만을, 뒤처진 사람[패자]에게는 굴욕이 부과되는 가혹한 잣대 때문에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조건의 평등을 위해
저자는 기본적으로는 ‘운’이 주는 능력 이상의 과실을 인정하고, 겸손한 마인드로 연대하며, 일 자체의 존엄성을 더 가치 있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첫째, 내가 이런 저런 재능을 갖게 된 건 내 노력이 아니라 행운의 결과다. 그리고 행운에 따른 혜택 (또는 부담)은 내게 당연히 보장된다고 할 수 없다.
두 번째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p. 200]
저자는 이런 ‘행운’이라는 요소를 평등에 고려해서, 기존의 ‘결과의 평등’이나 ‘기회의 평등’이 아닌 ‘조건의 평등’을 새롭게 제시한다. ‘기회의 평등’은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실제로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 점을 무시하고 동일 업적에 대해 동일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기회의 평등’을 강요한다면 계층의 대물림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조건의 평등’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 ‘조건의 평등’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원칙 하에 기본적인 경쟁 환경 및 조건을 균등하게 다져 ‘상대적 평등’을 이루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임스 트러슬로 애덤스(James Truslow Adams, 1878~1949)가 얘기한 ‘아메리칸 드림’,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 [p. 350]을 이룰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조건의 평등’은 개인의 이익 추구와 사회 전체 이익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 이 리뷰는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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