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01월 15일 |
---|---|
쪽수, 무게, 크기 | 368쪽 | 570g | 140*210*21mm |
ISBN13 | 9791160947045 |
ISBN10 | 116094704X |
발행일 | 2021년 0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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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68쪽 | 570g | 140*210*21mm |
ISBN13 | 9791160947045 |
ISBN10 | 116094704X |
MD 한마디
김초엽 소설가와 김원영 변호사는 공통점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손상된 신체를 보완하는 기계(보청기와 휠체어)와 만났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 사이보그가 그려갈 미래를 논한다. 사이보그의 존재론과 윤리에 관한 두 사람의 통찰이 빛난다. - 손민규 사회정치 MD
추천의 글 들어가며 _ 김원영 1부 우리는 사이보그인가 1장 사이보그가 되다 _ 김초엽 다이아몬드 행성의 사이보그 남자 | 낯설고도 익숙한 장애인 사이보그 | 향상하는 대신 전환하는 기술 2장 우주에서 휠체어의 지위 _ 김원영 반려종 휠체어 | 거울 앞에 선 장애인 사이보그 | 의족과 휠체어는 몸의 일부일까 | 휠체어가 되어서 3장 장애와 기술, 약속과 현실 사이 _ 김초엽 장애를 극복하는 따뜻한 기술? | “우리는 장애를 종식시킬 겁니다” | 기술은 장애의 종말을 가져올까 4장 청테이프형 사이보그 _ 김원영 화성에서 살아남은 휴먼 | 인간을 넘어선 인간 | 호킹만큼 인간적이지 않다면 |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문제 삼는 존재 | 청테이프 같은 존재들 2부 돌봄과 수선의 상상력 5장 불화하는 사이보그 _ 김초엽 보이지 않는 장애 | 사이보그라는 낙인 | 사이보그는 로봇 외골격의 꿈을 꾸는가 | 사이보그 신체 유지하기 | 단일한 사이보그는 없다 6장 장애-사이보그 디자인 _ 김원영 뼈 공학의 한계 | 향유고래의 뼈와 안 보이는 보청기 | 패션과 디스크레션 | 테크놀로지, 장애, 페티시즘 | 불쾌함의 골짜기를 피해서 | 장애를 디자인하기 7장 세계를 재설계하는 사이보그 _ 김초엽 불구의 기술과학을 선언하다 | 지식 생산자로서의 장애인 | 보편적 설계, 장애 중심적 설계 | 빨대 퇴출은 비장애중심주의일까 | 유튜브와 해시태그, 장애권리운동의 새로운 물결 | 가상공간의 접근성 | 남아 있는 질문들 8장 슈퍼휴먼의 틈새들 _ 김원영 장애를 고치는 약 | 치료를 받아서 캡틴 아메리카 되기? | 매끄러움의 유혹 | 심리스한 디자인과 이음새 노동 | 매끄러운 세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 | 덜컹거림을 감수하는 힘 3부 연립과 환대의 미래론 9장 장애의 미래를 상상하기 _ 김초엽 우리의 다른 인지 세계 | 당신의 우주선을 설계해보세요 | 화성의 인류학자들 | 사이보그 중립 10장 잇닿아 존재하는 사이보그 _ 김원영 두 발로 선다면 의존하지 않아도 될까 | 나를 돌보는 로봇, 내가 돌보는 로봇 | 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삶 | 연립의 존재론 - 함께 있음을 돕는 기술 대담 _ 김초엽, 김원영 파트너가 되다 | 생존 이상의 이야기 | 장애와 과학기술의 복잡한 관계를 바라보기 | 몸 혹은 존재를 드러낼 계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 장애 경험의 고유성 | 사이보그라는 상징에 관하여 | 인간과 기술문명의 불가분의 관계 | 우리의 삶이 교차한 순간 나오며 _ 김초엽 감사의 말 참고문헌 |
2022년을 마무리하며 독독녀 연말 독서모임으로 공동 책을 정했다. 둘이서, 셋이서는 이전에도 같은 책을 정해서 독서모임을 진행해본 적이 있지만 멤버 전원이 모두 같은 책 한 권을 정한 것은 처음이라 매우 기대됐다.ㅎㅎ 그리고 눈오는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1박 2일 여행까지 ! 폭설주의보가 내린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아늑한 한옥에서 하루종일 책을 붙잡고 있던 우리의 독서모임을 기억하며..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의존,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p.40
겨울서점 추천으로 알게되어 내가 제안한 책이었다. 김겨울 작가님은 이 책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했다. 타노스가 핑거스냅으로 인구 절반을 없앤다면, 휠체어를 탄 사람은 휠체어도 함께 사라져야 할까? 안경은? 이어폰은? 그렇다면 스마트폰은? 생각해보면 '기계'나 '기술'과 우리를 구분짓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할만큼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웠다.
신입생 때부터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해주신 친절한 교직원 분들이 계셨지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몰라 요청도 하지 못했다.
p.33
질의응답 시간이 두려운 이유다. 질문만 들어도 이해도, 관심도, 해박함, 센스 등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아는 게 있어야 질문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다. 해당 매체에서 이미 언급한 말을 또 묻는다면 말을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걸 들켜버리고 말테니까.. 아무튼, 요청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그 도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기 힘드니 어려운 상태일 것이므로.. 도와줄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떻게 도와야할지 모르는 사람도 똑같긴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애인 대상으로 설립된 기관에서는 얼마든지 적당한 도움을 먼저 제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잘듣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그 기술은 먼 미래가 아니라 현실과 가까운 곳에 줄곧 있었는데, 오랫동안 나에게 선택지로서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중략)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p.35
기술에 가장 의존하는 인간이 과연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보다 장애인이 현대 기술에 바라는 것은 많지 않을 수 있다. 장애를 아예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을 하는 데에 당장 어려운 점을 도와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일 수 있다는 거다.
평생을 어떤 음역대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기가 갑자기 보청기나 인공이식으로 듣게 되었을 때에 무조건 행복감을 느낄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김초엽 작가님도 보청기를 늘 착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잘 들리는' 것이 늘 필요하지는 않을 뿐더러, 불편하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바로 그 기술로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이보그라는 정체성
과거에는 종교나 국가가 인간의 정체성 물음에 일정한 답을 내려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 성별, 신체 조건을 그 사회의 정치적, 신학적 권위가 부여한 내용대로 규정하고 살았다.
우리의 시대는 소위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이며 개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답하기 위해 각자 투쟁한다.
p.57
우리 시대에는 '순수하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나'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중략)
외부와 분리된 독립된 '정신'을 가진 '나'라는 주체는 애초에도 환상이었을지 모르지만 점점 더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p.102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수도없이 닥치고 말았던 모순과 정확히 일치해서 놀랐다. 작가가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본인의 정체성을 인식할 때에 불가피하게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태어나자마자 본 것은 앙앙 울고있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나를 바라본 부모님이나, 의료진이나, 분만실 천장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보는 그 공간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서 내 크기를 가늠한다. 하물며 표정이나 말로 감정을 읽는 것도 보고 배우지 않나. 언어조차도 우리가 대충 싸잡아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지 명확하게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드는 감정을 문자로 꺼내어놓는 과정 자체가 생략과 일반화다.. 점점 일이 커지므로 여기서 마무리해야지...
우리는 실제로 더 발전된 휠체어를 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더 크게 결핍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른다.
p.61
그러니까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다.
p.67
'일반인' 눈으로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아무리 휠체어를 본인 몸과 자연스럽게 익힌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다리만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건 철저히 우리 입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유튜브에서 눈물참기 영상으로 유명해서 기억이 날듯한 영상이라 가슴이 시큰했다.(매우 찔렸다. 작가가 지적하는 바로 그 생각을 나도 똑같이 하며 울었다.) 시각장애인에게 눈을 선물하고, 청각장애인에게 목소리를 선물하며 장애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 ... '쇼'다.
미국에서는 '오티즘 스피크스' 같은 기관들이 많은 돈을 모금하지만 이 돈은 자폐인과 그 가족의 일상을 지원하는 대신, 자폐의 원인과 위험 인자들을 밝히는 연구로만 흘러 들어간다.
p.82
독모를 하면서 새롭게 주목하게 된 포인트였다.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을 모델로 써서 모금한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모금한 돈이 쓰이는지 알고 있을까? 정말로 장애인을 위한 일일까?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이 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사실을 알고서도 똑같이 모금을 할까? 션언니 말대로 지금껏 단체에 기부한 기부금이 사실은 정말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쓰인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장애 등급과 같은 명시적인 '증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이중고에 처하는 셈이다.
p.123
장애는 그 자체로 개인의 다른 특성을 모두 지우는 부정적 정체성으로 여겨진다. '무능함'과 쉽게 연결되므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비장애인들은 경험하지 않는 부당한 사회적 평가를 얻거나 일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필요한 도움을 얻는 것)과 낙인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많은 경우 장애를 숨기고 비장애인으로 패싱되는 것을 선택한다.
p.125
나의 무지로 지나친,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을 줄 기회조차 눈치채지 못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나는 자원봉사를 할만큼 공동체적인 선을 가진 사람이 아니지만 이건 내 삶을 비집고 자원봉사할 장소를 알아보고, 신청하고, 그 장소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라 대중교통에서 임산부석을 당연히 비워두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행동하는 것으로 도울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말이다.
공간, 건축물, 그리고 사회적 가정은 한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 방식이 된다.
p.132
공감한다. 위에서 환경과 분리된 나의 정체성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문제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최적화된 집에서는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다가, 집만큼 최적화된 설계가 갖춰지지 못한 사회로 나오는 순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적일지라도 장애인을 포함한 모두가 자기 정체성을 '정상인', '장애인'이 아닌 본인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필요할까 싶다.
디자인
나의 변형된 몸을 가급적 위장해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디스크레션)과 숨겨왔던 나의 '비정상성(비표준)'을 나만의 개성으로 과감히 드러내고 싶은 마음(패션)이 긴장 속에서 공존했기에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p.160
시상식에 초대받은 저자가 무대에 오른다면 휠체어를 타고 오를지, 몸과 매끄럽게 밀착된 의족 위로 매끈하고 그럴듯한 정장을 빼입을지 고민하는 대목이었다. 장애인을 대표하는 작가로써 정상성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렇다고 무대에 기어 올라가는 것이 그 시상식을 보는 사람들에게 모두 좋은 시선으로 보일지 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여름휴가 하나만 생각해보아도 사진빨 잘 받는 옷, 이번 기회에 다 써가는 화장품도 위시리스트에 넣어놓은 번듯한 걸로 장만하고 싶은 마음인데 시상식은 오죽했을까 싶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의족도 기계와 몸의 접합부위가 편리한 것이 우선인지, 혹은 그 이음새가 빈틈없어서 미학적으로 매끈하거나 심지어는 나무 의족에 패턴을 그려넣기까지.. 그들만의 의족 패션쇼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과연 새로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페티시즘은 어떤 사물이나 특정 신체 부위를 종교적으로 또는 미적(예술적)으로, 혹은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집착하는 태도를 말한다. 페티시적 욕망의 공통점은 사물이나 신체를 둘러싼 현실의 복잡한 맥락이나 사회적 관계, 당초 목적 등을 소거하고 그 자체를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 무엇으로서 이상화하고 열망한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의 특징으로 종종 거론되는 테크노페티시즘은 테크놀로지가 문제 해결의 도구이자 수단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상징적, 성적, 미학적 대상으로 고양되는 경향이다.
p.166
테크노페티시즘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실 이제껏 페티시는 무조건 성적인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지체장애인이라면 휠체어나 의족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를 선망하기도 하고, 신체 일부가 절단된 절단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성적으로 욕망하는 경향(디보티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보철과 신체 사이 '이음새'가 주는 불편함과, '티 나지 않게' 걷기 위해 익숙해져야 하는 노력 등이 모두 무시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장애인 몸에 대한 편견, 동정의 시선이 아닌 새로운 인식이 맞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도구로 남지 않게 되면 어떤 '불쾌함'을 느낀다.
테크놀로지는 도구 이상일 때 우리를 더욱 매료시키지만, 도구가 아니게 되는 순간 기묘한 공포로 다가온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수많은 SF 소설의 원형인 이유다.
p. 169
프랑켄슈타인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병에 걸려서 한 두마디로 끝낼 수 없지만 첨언을 해보자면, ..
기술이나 도구에 주체성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테크놀로지가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섰을 때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예측할 수 없음에 있지 않을까 한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이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 이름을 내내 달고 다니지만 사람으로 인식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그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본능대로 흘러다니며 사회화한다. 나름의 사회화를 거친 괴물이지만 인간의 시선으로는 인간일 수 없고, 인간이어서도 안되는 존재.. 하지만 뇌와 몸체 그 어느 것 하나 사람이 아닌 것이 없다. 아닐 이유가 없다. 인간적인 슬픔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과연 괴물을 사람이 아닌 생명체로만 보는 사람들이 잔인할까, 제대로 된 사회화를 거치지 못한 채로 힘만 세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감성을 가진 괴물이 잔인한 걸까. (물론 살육은 죄가 분명하지만 말이다.)
사이보그가 단지 먼 미래의 히어로가 아니라, 우리 옆에 ( 아니 잘 보이지도 않는 ) 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반대로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장애인을 인식하는 시선이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소설 속 괴물에게 더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성역할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시 유행했던 영화 '조커'의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 조커의 일생은 눈물흘리며 공감하는 이 사회가 얼마나 기괴한지 지적하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서인거지, 상황을 알고보면 모두가 이해될 거다.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이다.
p.203
기능적으로 강한 인간이 되기보다 취약한 신체에 자긍심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강한 상태'란 도대체 무엇일까.
p. 232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좇다보면 오히려 처음부터 누굴 위한 것이었는지 목적성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인 우리는 보행에 문제가 없고, 모든 방면에서 건강한 신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없는 매우 특정한 신체일 수 있기 떄문이다.
'보편성'과 '강한 상태'는 주관적이면서 사회적인 단어라 그 의미가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어의 정의부터 의문을 가지고 보는 것은 기존의 상태, 즉 '보편성'을 재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장애는 단지 신체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의 문제이기도 했다. 테크놀로지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 그 자체가 심미적(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디자인'처럼 다뤄진다. '심리스'가 디자인에서 유래한 말이었음을 기억하자.
p. 238
그러나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사회 조직을 이음새 없이 직조하는 '심리스-스타일'의 밑바탕에는 그 '매끄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덜컹거림'을 수선하고 버티는 손길이 촘촘히 닿아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학자 하대청은 이 손길을 '돌봄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p. 241
심리스한 세계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이음새를 없애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시대의 '강한 인간'이란 반대의 능력, 즉 완전히 매끄러운 세계에 예측하지 못한 구멍을 만드는(이음새를 띄우는) 역량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p. 245
집에 환자가 생기면 가족들은 자연스레 보호자가 된다. 당연하게도 수발을 들고, 일거수일투족을 본인의 생활루틴처럼 보살펴야 한다. 그들이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 어쨌거나 그들 스스로건, 주변의 보살핌이건 '덜컹거리는' '이음새'를 메우기 위한 노동이 필요하다.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생활을 위해서.
속옷 디자인에서나 들어본 심리스가 기능성이 아니라 디자인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은 인상적이다. 편리함보다 '심미성'인 것이다.
카지노 사업장은 1980년부터 2008년까지 네 배 이상 관광객 수가 늘었고 수익률도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디자인의 힘이 있었다. 쉴에 의하면 그 디자인은 게임과 게임 사이, 심지어 '잭팟'이 터진 게임과 그다음 게임 사이에 존재하는 이음새조차 철저히 없애는 것이었다.
p.246
매끄럽게 설계된 세계 어딘가에 적용하지 못한 장애인이 출현하는 것은 지루하고 의미 없는 유튜브 영상 한가운데 배터리가 5퍼센트 남았음을 알리는 사인처럼 이음새를 만든다.
p. 249
유튜브 자동재생, 릴스가 자동으로 반복재생/다음 영상 재생되는 것과도 동일한 것 같다. 틈을 주지 않는 것은 힘이 될 수 있구나. 그만둬야 하는 강력한 동기가 생기지 않는 한 더이상 흥미를 끌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핸드폰만 붙잡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2022년을 마무리하며 독독녀 연말 독서모임으로 공동 책을 정했다. 둘이서, 셋이서는 이전에도 같은 책을 정해서 독서모임을 진행해본 적이 있지만 멤버 전원이 모두 같은 책 한 권을 정한 것은 처음이라 매우 기대됐다.ㅎㅎ 그리고 눈오는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1박 2일 여행까지 ! 폭설주의보가 내린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아늑한 한옥에서 하루종일 책을 붙잡고 있던 우리의 독서모임을 기억하며..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의존,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p.40
겨울서점 추천으로 알게되어 내가 제안한 책이었다. 김겨울 작가님은 이 책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했다. 타노스가 핑거스냅으로 인구 절반을 없앤다면, 휠체어를 탄 사람은 휠체어도 함께 사라져야 할까? 안경은? 이어폰은? 그렇다면 스마트폰은? 생각해보면 '기계'나 '기술'과 우리를 구분짓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할만큼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웠다.
신입생 때부터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해주신 친절한 교직원 분들이 계셨지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몰라 요청도 하지 못했다.
p.33
질의응답 시간이 두려운 이유다. 질문만 들어도 이해도, 관심도, 해박함, 센스 등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아는 게 있어야 질문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다. 해당 매체에서 이미 언급한 말을 또 묻는다면 말을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걸 들켜버리고 말테니까.. 아무튼, 요청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그 도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기 힘드니 어려운 상태일 것이므로.. 도와줄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떻게 도와야할지 모르는 사람도 똑같긴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애인 대상으로 설립된 기관에서는 얼마든지 적당한 도움을 먼저 제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잘듣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그 기술은 먼 미래가 아니라 현실과 가까운 곳에 줄곧 있었는데, 오랫동안 나에게 선택지로서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중략)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p.35
기술에 가장 의존하는 인간이 과연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보다 장애인이 현대 기술에 바라는 것은 많지 않을 수 있다. 장애를 아예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을 하는 데에 당장 어려운 점을 도와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일 수 있다는 거다.
평생을 어떤 음역대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기가 갑자기 보청기나 인공이식으로 듣게 되었을 때에 무조건 행복감을 느낄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김초엽 작가님도 보청기를 늘 착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잘 들리는' 것이 늘 필요하지는 않을 뿐더러, 불편하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바로 그 기술로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이보그라는 정체성
과거에는 종교나 국가가 인간의 정체성 물음에 일정한 답을 내려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 성별, 신체 조건을 그 사회의 정치적, 신학적 권위가 부여한 내용대로 규정하고 살았다.
우리의 시대는 소위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이며 개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답하기 위해 각자 투쟁한다.
p.57
우리 시대에는 '순수하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나'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중략)
외부와 분리된 독립된 '정신'을 가진 '나'라는 주체는 애초에도 환상이었을지 모르지만 점점 더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p.102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수도없이 닥치고 말았던 모순과 정확히 일치해서 놀랐다. 작가가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본인의 정체성을 인식할 때에 불가피하게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태어나자마자 본 것은 앙앙 울고있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나를 바라본 부모님이나, 의료진이나, 분만실 천장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보는 그 공간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서 내 크기를 가늠한다. 하물며 표정이나 말로 감정을 읽는 것도 보고 배우지 않나. 언어조차도 우리가 대충 싸잡아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지 명확하게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드는 감정을 문자로 꺼내어놓는 과정 자체가 생략과 일반화다.. 점점 일이 커지므로 여기서 마무리해야지...
우리는 실제로 더 발전된 휠체어를 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더 크게 결핍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른다.
p.61
그러니까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다.
p.67
'일반인' 눈으로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아무리 휠체어를 본인 몸과 자연스럽게 익힌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다리만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건 철저히 우리 입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유튜브에서 눈물참기 영상으로 유명해서 기억이 날듯한 영상이라 가슴이 시큰했다.(매우 찔렸다. 작가가 지적하는 바로 그 생각을 나도 똑같이 하며 울었다.) 시각장애인에게 눈을 선물하고, 청각장애인에게 목소리를 선물하며 장애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 ... '쇼'다.
미국에서는 '오티즘 스피크스' 같은 기관들이 많은 돈을 모금하지만 이 돈은 자폐인과 그 가족의 일상을 지원하는 대신, 자폐의 원인과 위험 인자들을 밝히는 연구로만 흘러 들어간다.
p.82
독모를 하면서 새롭게 주목하게 된 포인트였다.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을 모델로 써서 모금한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모금한 돈이 쓰이는지 알고 있을까? 정말로 장애인을 위한 일일까?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이 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사실을 알고서도 똑같이 모금을 할까? 션언니 말대로 지금껏 단체에 기부한 기부금이 사실은 정말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쓰인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장애 등급과 같은 명시적인 '증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이중고에 처하는 셈이다.
p.123
장애는 그 자체로 개인의 다른 특성을 모두 지우는 부정적 정체성으로 여겨진다. '무능함'과 쉽게 연결되므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비장애인들은 경험하지 않는 부당한 사회적 평가를 얻거나 일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필요한 도움을 얻는 것)과 낙인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많은 경우 장애를 숨기고 비장애인으로 패싱되는 것을 선택한다.
p.125
나의 무지로 지나친,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을 줄 기회조차 눈치채지 못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나는 자원봉사를 할만큼 공동체적인 선을 가진 사람이 아니지만 이건 내 삶을 비집고 자원봉사할 장소를 알아보고, 신청하고, 그 장소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라 대중교통에서 임산부석을 당연히 비워두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행동하는 것으로 도울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말이다.
공간, 건축물, 그리고 사회적 가정은 한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 방식이 된다.
p.132
공감한다. 위에서 환경과 분리된 나의 정체성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문제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최적화된 집에서는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다가, 집만큼 최적화된 설계가 갖춰지지 못한 사회로 나오는 순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적일지라도 장애인을 포함한 모두가 자기 정체성을 '정상인', '장애인'이 아닌 본인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필요할까 싶다.
디자인
나의 변형된 몸을 가급적 위장해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디스크레션)과 숨겨왔던 나의 '비정상성(비표준)'을 나만의 개성으로 과감히 드러내고 싶은 마음(패션)이 긴장 속에서 공존했기에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p.160
시상식에 초대받은 저자가 무대에 오른다면 휠체어를 타고 오를지, 몸과 매끄럽게 밀착된 의족 위로 매끈하고 그럴듯한 정장을 빼입을지 고민하는 대목이었다. 장애인을 대표하는 작가로써 정상성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렇다고 무대에 기어 올라가는 것이 그 시상식을 보는 사람들에게 모두 좋은 시선으로 보일지 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여름휴가 하나만 생각해보아도 사진빨 잘 받는 옷, 이번 기회에 다 써가는 화장품도 위시리스트에 넣어놓은 번듯한 걸로 장만하고 싶은 마음인데 시상식은 오죽했을까 싶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의족도 기계와 몸의 접합부위가 편리한 것이 우선인지, 혹은 그 이음새가 빈틈없어서 미학적으로 매끈하거나 심지어는 나무 의족에 패턴을 그려넣기까지.. 그들만의 의족 패션쇼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과연 새로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페티시즘은 어떤 사물이나 특정 신체 부위를 종교적으로 또는 미적(예술적)으로, 혹은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집착하는 태도를 말한다. 페티시적 욕망의 공통점은 사물이나 신체를 둘러싼 현실의 복잡한 맥락이나 사회적 관계, 당초 목적 등을 소거하고 그 자체를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 무엇으로서 이상화하고 열망한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의 특징으로 종종 거론되는 테크노페티시즘은 테크놀로지가 문제 해결의 도구이자 수단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상징적, 성적, 미학적 대상으로 고양되는 경향이다.
p.166
테크노페티시즘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실 이제껏 페티시는 무조건 성적인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지체장애인이라면 휠체어나 의족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를 선망하기도 하고, 신체 일부가 절단된 절단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성적으로 욕망하는 경향(디보티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보철과 신체 사이 '이음새'가 주는 불편함과, '티 나지 않게' 걷기 위해 익숙해져야 하는 노력 등이 모두 무시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장애인 몸에 대한 편견, 동정의 시선이 아닌 새로운 인식이 맞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도구로 남지 않게 되면 어떤 '불쾌함'을 느낀다.
테크놀로지는 도구 이상일 때 우리를 더욱 매료시키지만, 도구가 아니게 되는 순간 기묘한 공포로 다가온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수많은 SF 소설의 원형인 이유다.
p. 169
프랑켄슈타인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병에 걸려서 한 두마디로 끝낼 수 없지만 첨언을 해보자면, ..
기술이나 도구에 주체성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테크놀로지가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섰을 때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예측할 수 없음에 있지 않을까 한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이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 이름을 내내 달고 다니지만 사람으로 인식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그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본능대로 흘러다니며 사회화한다. 나름의 사회화를 거친 괴물이지만 인간의 시선으로는 인간일 수 없고, 인간이어서도 안되는 존재.. 하지만 뇌와 몸체 그 어느 것 하나 사람이 아닌 것이 없다. 아닐 이유가 없다. 인간적인 슬픔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과연 괴물을 사람이 아닌 생명체로만 보는 사람들이 잔인할까, 제대로 된 사회화를 거치지 못한 채로 힘만 세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감성을 가진 괴물이 잔인한 걸까. (물론 살육은 죄가 분명하지만 말이다.)
사이보그가 단지 먼 미래의 히어로가 아니라, 우리 옆에 ( 아니 잘 보이지도 않는 ) 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반대로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장애인을 인식하는 시선이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소설 속 괴물에게 더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성역할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시 유행했던 영화 '조커'의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 조커의 일생은 눈물흘리며 공감하는 이 사회가 얼마나 기괴한지 지적하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서인거지, 상황을 알고보면 모두가 이해될 거다.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이다.
p.203
기능적으로 강한 인간이 되기보다 취약한 신체에 자긍심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강한 상태'란 도대체 무엇일까.
p. 232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좇다보면 오히려 처음부터 누굴 위한 것이었는지 목적성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인 우리는 보행에 문제가 없고, 모든 방면에서 건강한 신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없는 매우 특정한 신체일 수 있기 떄문이다.
'보편성'과 '강한 상태'는 주관적이면서 사회적인 단어라 그 의미가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어의 정의부터 의문을 가지고 보는 것은 기존의 상태, 즉 '보편성'을 재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장애는 단지 신체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의 문제이기도 했다. 테크놀로지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 그 자체가 심미적(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디자인'처럼 다뤄진다. '심리스'가 디자인에서 유래한 말이었음을 기억하자.
p. 238
그러나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사회 조직을 이음새 없이 직조하는 '심리스-스타일'의 밑바탕에는 그 '매끄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덜컹거림'을 수선하고 버티는 손길이 촘촘히 닿아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학자 하대청은 이 손길을 '돌봄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p. 241
집에 환자가 생기면 가족들은 자연스레 보호자가 된다. 당연하게도 수발을 들고, 일거수일투족을 본인의 생활루틴처럼 보살펴야 한다. 그들이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이
※ ○으로 대체된 키워드들은 개인 정보로 검열되었습니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크게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장애학과 기술 사이의 유기성을 다룬다. 그럼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당사자성’이다.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규정짓고 활동하는 공동 저자 김초엽과 김원영은 책 앞날개에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와 '휠체어를 탄다.' 를 소개 글 가장 마지막에 써넣으며 본인의 입지를 밝히고, 장을 번갈아 가며 관련 담론을 펼친다.
그렇다면 동양인/여성/시스젠더/○○섹슈얼/비장애인 신체/중산층인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비록 로즈마리 갈런드-톰슨이 '정상인'이라 부르는 규범으로부터는 조금 어긋나있을진 몰라도 나는 내가 속한 이 땅에선 아주 보통의 인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비록 소수자성을 향한 타자의 혐오를 느껴본 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난데없는 PTSD로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남들과 별다를 게 없는 존재라고 확신한다. 또한 어떤 순간적 '힘듦'으로 불평할 시간이 있다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행하려 노력한다.
찬찬히 짚어보면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작가, 그리고 나 사이에는 앞서 말한 '정상인' 템플릿에서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차이만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더 큰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처음 알았다. 활자로 썼을 땐 사소할지 모를 이 정체성의 간극이 근본적인 대역을 태초부터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느끼는 소수자성은 두 다리로 걷지 못하거나 남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종류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보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기 증명의 연속이다. "여자라고 임금을 적게 받아서는 안 된다.",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성소수자도 동반자 법 아래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비수도권 자들에 대한 처우가 수도권과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등. 이런 단순한 입장들은 어떻게 보면 '장애인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차원보다는 훨씬 쉽고 편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보조를 요청하지 않아도 어쨌거나 '남들'만큼의 제 기능은 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의 외침이다.
그러니 전복될 가치관조차 없어 얼떨떨했다는 감상이 더 적합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읽는 내내 고개를 수도 없이 끄덕였으나, 이입한 횟수는 그와 비례하지 않았다. 감히 공감해도 되는지조차 어렴풋했다.
분명 성 소수성을 주제로 꺼낼 때도 비슷할 테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릴 때마다 에이즈와 예수님을 들먹이며 나타나는 반反동성애 연대협회는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지리멸렬하고도 지긋지긋하게 주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의 주인공 자레드는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지만, 그가 주체적으로 결론 내린 본인의 정체성은 교회 사회 안에서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져 전환 치료를 받게 된다. 제목 그대로 주변인들로부터 본연의 존재가 지워지는 경험은 불쾌하고 비자주적이다. 그런데 장애는? 우리는 장애에 대해 생애 얼마 동안 생각하고 걱정하고 분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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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각 대한민국 서울은 전쟁통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지난 2021년 12월부터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시위를 지속하고 있으나,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장연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권리 확보 선전을 불법행위로 간주하는 등 '시민 불편과 불안을 초래하는 시위를 계속한다면 더 이상 관용은 없다'고 발표했다한국일보, “못 만날 이유 없다”던 오세훈, 전장연과 단독 면담 불발” 2023.01.19. 혹자는 이를 두고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시민은 어엿한 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단 입장만 굳혔을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처음 시위가 벌어졌을 때, 평소 버스나 자전거로 통근하던 나는 회사 동료들의 불평으로 아침을 맞았다.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지연돼서 지각했다느니, 왜 하필 출근 시간대에 시위하냐느니 따위의 이야기였다. 이어지는 얘기들은 듣지 않아도 됐다. 귀결되는 논점은 단 하나. "괜한 불똥에 멀쩡한 본인들이 피해를 보았단 것".
사실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거나, 크립 테크노 사이언스라거나, STS 같은 학문은 이 책에 소개된 것을 넘어 더 깊이 알아볼 시도를 하거나 연구로 이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기엔 아주 의아하다. 내가 이전에 썼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독후감에서 예술의 존재 가치에 관해 의심한 적 있듯, 그것들을 알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연이은 투쟁과 끊이지 않는 논란에 기사 전문 대신 헤드라인만 읽고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중, 문득 한창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던 시절, 영어권 국가 혹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그곳에선 휠체어를 탄 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볼 수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저상버스가 아닌 차량이 오리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는 타지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김원영 작가는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와 같은 의문을 던진다. 흔히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하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 권리인 이동권은 투쟁해야만 겨우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곧잘 감동 받곤 하는 마케팅에서도 이런 시선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인간적인 신기술'의 뛰어난 업적으로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농인, 가족의 목소리를 듣게 된 청각장애인, 로봇 다리를 장착하고 다시 뛸 수 있게 된 지체장애인의 모습을 조명하고 비장애인은 눈물을 훔치는 광경은 앞서 언급한 성소수성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교정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짓는다. 곧 도래할 최신 과학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줄거란 믿음은 기후 위기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다룬 맥락과 유사하다. 엄청난 속도의 기술 발전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당장 눈앞의 현실을 가린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교화 대상으로 여기는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자면 학창 시절에 공모했던 '전국 학생 설계 경진대회'가 있다. 대한기계학회가 주최하고, 여타 정부기관과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꽤 큰 행사였다. 대주제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따뜻한 기술의 개발'로,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사회 여러 계층에게 과학기술의 힘이 미치도록 기획되었다. 그맘때쯤 공대로 입시의 방향을 정했기때문에 단순히 외부 활동 스펙이 필요해 참여했던 대회였다. 운좋게 입상까지 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광역시권 출생/명문 학군/전문직종 자제인 나와 친구가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단순히 미디어와 고정 관념이 그리는 이미지들을 캐치하고 '따뜻한' 기술이란 이름 아래 설계한 ○○ ○○○의 도면은 스케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고, 설계 취지와 내용도 부실했다. 기억에 본인이나 주변인의 장애 때문에 현실에서 부딪힌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설계를 한 팀은 전무했다(이점은 특히 대학부보다 고등부에 특출나게 드러났다). 대체 누구를 위한 대회였을까?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는 걸,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 무능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또 있다. 나의 조부모님은 얼마 전에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그곳에는 조명과 난방을 포함한 모든 기본 설비들을 하나의 터치패드로 중앙 제어할 수 있다. 스위치가 없고 매끄러운 공간은 '심리스seamless'하고 유연한 현대적 공간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나이가 들어 시력이 감퇴했거나 새로운 걸 배우고 익히는데 서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절대 아니다. 어머니가 집들이 선물로 드린 가습기는 전원 버튼이 감춰져 있고, 리모컨이나 LED로만 상태를 조작하고 확인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선 호수와 비밀번호를 차례로 가볍게 입력해야 한다. 가장 편안하다고 느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의 진입마저 어떤 난관이나 관문처럼 느껴지니 지레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할머니는 이사 후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계시는데, 혼자서 나갔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는 과정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물론 고택에서는 벨을 누르면 수화기를 들어 문 열림 버튼을 눌러야 했고, 방을 데우기 위해선 장작불을 피워야하는 불편함이 존재했지만, 사용자의 의식적 개입 단계에서 발생하는 이 이음새는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경험이다.
그러니 10여 년 전에 그 손녀가 공모하고 설계했던 ○○ ○○○는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에도 하나도 필요치 않다.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2주기인 지금, 장애인의 이동권은 여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나아진 게 정말 하나도 없다. 궁극적으로 비장애인 전문가와 장애인 사용자라는 구분이 희미해지기 위해선 관계를 장애/비장애의 구분에 묶지 않아야 한단 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리처드 사이토윅이 <공감각>이라는 책에서 쓰고, 이 책의 9장에서 인용한 아래 문장으로 독후감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우리는 움벨트 안에서 나오려고 투쟁해야 한다. 움벨트는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데미안을 각색한 문장과 함께.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정한다. 이 좁은 자기 참조적 현실이 우리의 움벨트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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