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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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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1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368쪽 | 570g | 140*210*21mm
ISBN13 9791160947045
ISBN10 116094704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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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MD 한마디

김초엽 소설가와 김원영 변호사는 공통점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손상된 신체를 보완하는 기계(보청기와 휠체어)와 만났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경험과 사색을 통해 사이보그가 그려갈 미래를 논한다. 사이보그의 존재론과 윤리에 관한 두 사람의 통찰이 빛난다. - 손민규 사회정치 MD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추천의 글
들어가며 _ 김원영

1부 우리는 사이보그인가

1장 사이보그가 되다 _ 김초엽
다이아몬드 행성의 사이보그 남자 | 낯설고도 익숙한 장애인 사이보그 | 향상하는 대신 전환하는 기술

2장 우주에서 휠체어의 지위 _ 김원영
반려종 휠체어 | 거울 앞에 선 장애인 사이보그 | 의족과 휠체어는 몸의 일부일까 | 휠체어가 되어서

3장 장애와 기술, 약속과 현실 사이 _ 김초엽
장애를 극복하는 따뜻한 기술? | “우리는 장애를 종식시킬 겁니다” | 기술은 장애의 종말을 가져올까

4장 청테이프형 사이보그 _ 김원영
화성에서 살아남은 휴먼 | 인간을 넘어선 인간 | 호킹만큼 인간적이지 않다면 |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문제 삼는 존재 | 청테이프 같은 존재들


2부 돌봄과 수선의 상상력

5장 불화하는 사이보그 _ 김초엽
보이지 않는 장애 | 사이보그라는 낙인 | 사이보그는 로봇 외골격의 꿈을 꾸는가 | 사이보그 신체 유지하기 | 단일한 사이보그는 없다

6장 장애-사이보그 디자인 _ 김원영
뼈 공학의 한계 | 향유고래의 뼈와 안 보이는 보청기 | 패션과 디스크레션 | 테크놀로지, 장애, 페티시즘 | 불쾌함의 골짜기를 피해서 | 장애를 디자인하기

7장 세계를 재설계하는 사이보그 _ 김초엽
불구의 기술과학을 선언하다 | 지식 생산자로서의 장애인 | 보편적 설계, 장애 중심적 설계 | 빨대 퇴출은 비장애중심주의일까 | 유튜브와 해시태그, 장애권리운동의 새로운 물결 | 가상공간의 접근성 | 남아 있는 질문들

8장 슈퍼휴먼의 틈새들 _ 김원영
장애를 고치는 약 | 치료를 받아서 캡틴 아메리카 되기? | 매끄러움의 유혹 | 심리스한 디자인과 이음새 노동 | 매끄러운 세계에 균열을 내는 존재 | 덜컹거림을 감수하는 힘


3부 연립과 환대의 미래론

9장 장애의 미래를 상상하기 _ 김초엽
우리의 다른 인지 세계 | 당신의 우주선을 설계해보세요 | 화성의 인류학자들 | 사이보그 중립

10장 잇닿아 존재하는 사이보그 _ 김원영
두 발로 선다면 의존하지 않아도 될까 | 나를 돌보는 로봇, 내가 돌보는 로봇 | 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삶 | 연립의 존재론 - 함께 있음을 돕는 기술


대담 _ 김초엽, 김원영
파트너가 되다 | 생존 이상의 이야기 | 장애와 과학기술의 복잡한 관계를 바라보기 | 몸 혹은 존재를 드러낼 계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 장애 경험의 고유성 | 사이보그라는 상징에 관하여 | 인간과 기술문명의 불가분의 관계 | 우리의 삶이 교차한 순간

나오며 _ 김초엽
감사의 말
참고문헌

저자 소개 (2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나와 기술의 관계는 긴밀하고 복잡하고 계속해서 변화하며 확장한다
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한 보청기나 청력 치료제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과 그런 소통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내 삶을 실제로 개선했다. (…) 나는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강연과 대담에 참석할 때면 문자통역을 이용하고, 음성-문자 변환 프로그램을 통해 오디오 콘텐츠의 내용을 유추한다. 현실에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대화를 이메일과 카카오톡으로 이어간다. 나의 사회적 상호 작용은 IT 기술이 제공하는 문자적 소통에 크게 기댄다. 모든 온라인 텍스트를 내 삶에서 제거한다면 나는 사회와 단절될 것이다. 나와 기술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고, 그 상호 작용은 계속해서 변화하며 확장한다. (…) 기술은 해방일까, 혹은 억압일까. 사이보그는 현실일까, 아니면 비유일까. 장애인을 위한 ‘따뜻한 기술’은 정말로 장애인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할까. 기술의 발전 속에서 장애는 언젠가 사라지고 말 제거의 대상일까. 최후의 미래에도 여전히 누군가는 장애인으로 살아갈까. 장애인 사이보그의 삶은 현재에 관한 이야기이자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 p.35~39

첨단 기술로 무장한 사이보그가 되면 나의 ‘없음’은 정말로 없어질까?
중학교 1학년이던 1997년부터 나는 계속 그것을 타고, 밀고, 들어 올리고, 점프하고, 눕고, 90도를 돌았다. (…) 나는 휠체어가 되었다en-wheeled. 휠체어를 탄 ‘모자란(결여된)’ 인간에서 휠체어와 통합된 어떤 존재로 나를 희미하게 인식했을 때 나는 비로소 정체성 물음 앞에 본격적으로 서게 되었다. (…) 과학이 장애에 관한 정체성 물음을 ‘장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네가 인간이며, 조만간 그 장애는 극복될 것이므로 너는 더 ‘온전한’ 인간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이상, 장애 그 자체의 의미를 규정하지identify 않는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과학이 장애를 여전히 ‘없음의 상태(결여)’로만 바라본다면 휠체어는 기술적으로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여전히 보행 능력 ‘없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보조기기로만 간주될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더 발전된 휠체어를 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더 크게 결핍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른다.
--- p.57~61

농인이 왜 음성 언어로 말해야 하는가
2020년 3월 26일, KT는 ‘제 이름은 김소희입니다 - 마음을 담다’라는 제목의 광고를 공개했다. KT가 기가지니 AI 음성 합성 기술을 적용하여 농인인 김씨에게 ‘목소리’를 선물하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 정작 농인인 김씨나 나와 같은 청각장애인들은 기가지니가 만든 목소리를 명확하게 들을 수 없다. 그러니까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다. (…) 모든 농인이나 청각장애인이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고, 소리를 들은 사람들 역시 항상 소리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소리를 들었을 때의 감정이 기쁨이 아닌 공포나 스트레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감동 영상’을 보는 비장애인들은 보청기를 착용한 청각장애인들의 반응에서 일관되게 ‘소리를 되찾은 기쁨’을 읽어내려고 한다.
--- p.66~70

첨단 테크놀로지는 왜 장애인의 몸을 욕망하는가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구원하리라고 맹목적으로 믿을 때조차도 장애인을 모델로 등장시키면 이 믿음은 안전하고 합리적인 생각, 즉 테크놀로지를 도구로서 바라보는 ‘건전’하고 상식적인 태도가 된다. 장애인을 상업적으로, 성적으로, 종교적으로 소비하고 싶을 때도 그 장애인이 멋지고 비싼 휠체어, 환상적인 디자인의 의족, 윈터 솔저 같은 보철 팔을 착용한 모습이라면 이는 장애인을 쿨하고, 미래 지향적이고, 매력적으로 그리는 안전하고 ‘건전한’ 묘사로 인정받기 쉽다. (…) 우리는 과학기술을 도구 이상으로 흠모하는 모종의 문화적 태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테크노페티시즘). 한편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장애인의 몸에 대해 혐오든 숭배든 성적 대상화든, ‘능력(기능)’이 아니라 그 디자인에 관한 어떤 종류의 감정이나 충동을 지니고 있다. 테크놀로지와 장애인의 몸이 하나의 이미지에서 만날 때면, 어떤 ‘불쾌함의 골짜기uncanny valley’로 빠질 위험이 거의 없이 테크놀로지와 장애 자체를 페티시적으로 바라보는 일이 한층 수월해진다. 나는 이런 이유에서 제임스 길링햄의 홍보용 사진부터 에이미 멀린스, 오스카피스토리우스, 그리고 장애인의 이미지를 포함한 ‘4차 산업혁명’의 희망찬 기사들이 상업적으로 더 쉽게 성공한다고 추론한다.
--- p.170~172

보편적 설계가 아닌 장애 중심적 설계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 결국 보편적인 이용자들에게도 널리 쓰인다면 물론 좋은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설계라는 개념의 함정도 지적된다. 햄라이는 보편적 설계를 넘어선 장애 중심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 보편적 설계가 ‘보편’의 범주를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정작 보편에서 장애인들의 요구가 탈중심화될 여지가 생긴다. 인류 역사의 보편은 언제나 매우 특정한 신체, 백인-남성-시스젠더cisgender-이성애자-비장애인-중산층으로 대표되는 중립적 템플릿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이 햄라이의 주장이다. 장애 중심적 디자인은 장애인의 몸이 환경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이러한 이해 없이 단지 모두를 위한 설계만을 원칙으로 두면,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끔 설치한 경사로가 유아차를 미는 사람과 캐리어를 끌고 가는 사람에게는 유용하지만, 정작 수동 휠체어 이용자에게는 너무 가파르고 좁게 설계되는 일이 생겨난다.
--- p.203~204

완벽한 테크놀로지를 갖춘다면 타인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괜찮을까?
우리가 잘 아는 편안한 공동체를 벗어나 바깥세상을 향할 때, 열려 있는 상호 작용의 장으로 나아갈 때, 그 위험과 불일치 속에서만이 가능한 우정, 환대, 사랑과 연대의 만남들이 있다. (…) 한 장애인거주시설에 당뇨병이 심각한 상황임에도 커피 믹스를 매일 열 잔 넘게 마시는 이용자가 있었다. (…) 어느 날 사회복지사가 다른 장소에서 만난 자폐성 장애인이 손으로 종이를 툭툭 끊어내는 행동을 반복하는 것을 보고는 커피 믹스를 매일 열 잔 이상 마시던 그 이용자를 떠올렸다. 혹시 그가 커피가 아니라 커피 믹스의 포장지 떼어내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실제로 그랬다!)? 현실의 돌봄 공동체는 우리가 상상한 미래의 돌봄 시스템에 비하면 비효율적이고 안정적이지도 않아 보이지만, 언제나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돌봄을 둘러싼 물음의 형식을 해체할 수도 있다. 발달장애인에게 심한 당뇨가 있으니 강제로라도 커피 믹스를 자제시켜야 하는가라는 돌봄 윤리의 문제는, 자기결정권과 건강 보호라는 가치 충돌에 관한 물음으로 보였다. 그러다 손으로 종이를 끊어내는 자폐성 장애인이라는 ‘타자’와 연결되자, 돌봄의 대상과 목적이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옮겨갔다.
--- p.299~304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인간의 몸은 과학기술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서로 다른 신체와 감각, 기술과 환경이 결합해
재설계한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


인간은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공동체의 생존과 유지, 향상에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자연히 과학기술은 더 나은 내일, 위험이나 질병에 덜 노출되고 불편이나 불가능을 최소화한 미래를 목표로 삼는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그리는 미래 역시 물리적 거리나 환경의 제약 없이, 네트워크에 깊숙이 연결된 인간이 자신에게 맞춤형으로 설계된 세상을 매끄럽게 누비는 모습이다. 이 낙관적인 그림 속에서 인간은 기술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데 아무런 제한이 없거나, 타고난 취약함을 각종 기계나 장비, 의약으로 대체?보완하여 신체적, 정신적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들로 묘사된다.
각기 보청기, 휠체어라는 테크놀로지와 밀접하게 결합하여 살아온 김초엽과 김원영은 세계적인 테크 기업의 엘리트나 기술 관료, 미래학자들이 제시하는 이와 같은 ‘기술 유토피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특히 그 최전선에 기계와 결합한 장애인의 신체를 놓고 ‘포스트휴먼’이니 ‘트랜스휴먼’이니 하는 손쉬운 비유를 끌어오는 논의들의 공허함을 지적한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성과가 질병을 치료하고 손상된 신체의 기능을 개선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삶에서 기계와 결합하는 일은 결코 매끄러운 경험이 아니며, 어떤 기술은 장애인의 접근 자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장애의 종식을 약속하는 말들은 장애를 가진 몸들이 지금, 여기의 환경과 조건에서 더 잘 살아갈 다양한 가능성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소리를 더 잘 듣게 하는 기술보다 수어나 문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로봇 외골격보다 휠체어가 더 적합할 수 있다. 장애인들의 몸은 설령 같은 유형의 장애라 해도 규격화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며, 사람마다 서로 다른 상황에 처한다. (…) 온정과 시혜로 뒤덮인 시선들은 장애인 사이보그의 현실에는 눈을 감고, 미래적인 이미지만을 기술낙관주의의 홍보 대사로 내세운다. 지금 이곳의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고통과 장벽을 해결하는 일을 ‘언젠가’ 기술이 발전할 미래로 자꾸만 유예한다. 경사로와 엘리베이터, 수어통역을 실현하는 데 최첨단의 놀라운 기술이 있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 87쪽

기계와의 긴밀한 상호 작용을 통해 자신에게 적합한 이동 방식과 소통 수단, 일상의 지혜를 익혀온 장애 당사자로서, 두 저자는 장애인의 신체와 감각이 기술과 결합하여 새롭게 구성한 정체성, 그 고유한 경험을 과감하게 과학기술과 미래 담론의 중심으로 가져온다. 이는 단지 기술낙관주의의 허구, 폐해를 지적하거나 그러한 논의에서 소외되는 이들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인간의 존재 조건이 점점 더 기술문명과 깊숙이 결합해가는 시대에 기계와의 연결과 불화,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구축된 환경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덜컹거림, 이음새, 단차를 견디고 통합해온 장애인의 경험이 우리가 다른 미래를 상상하고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아가 단지 손상을 보완하는 도구로서만이 아니라, 장애인의 신체 일부를 구성하여 장애인을 ‘결여된’ 존재가 아니라 ‘확장된’ 존재, 세계 및 타자와 ‘연결된’ 존재로 정의하는 계기로서 기술을 바라본다면, 모든 인간이 본연의 취약함과 의존성을 안고도 동등하고 온전하게 살아가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하나로 움직일 때, 중증 뇌병변장애인이 휠체어와 결합하고 다시 그 휠체어를 밀어주는 활동지원사와 접속할 때,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많은 어긋남, 불화, 이음새의 단차를 넘어 결합해본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미래에 ‘증강해야 할’ 역량이다. (…) 나는 장애나 질병 등 취약한 몸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야말로 일부 테크 엘리트들이 꿈꾸는 자동화되고 매끄러운 사회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단차를 용기 있게 드러내고, 어긋난 이음새는 기꺼이 견디는 역량을 지닌 존재로서 말이다. - 250~251쪽

따라서 이 책에서 ‘사이보그’는 기계와 결합한 유기체라는 사전적 정의를 훌쩍 넘어선다. 김초엽과 김원영은 인간과 과학, 기술, 자연, 환경 및 그 밖의 모든 물리적?문화적 구성 요소가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돌보며 함께 살아나가는 총체를 ‘사이보그’라는 상징으로 표현한다. 이 책은 그 최전선에 있는 ‘장애인 사이보그’의 구체적 현실을 살피며 위계 없는 세계, 정상 혹은 표준의 장벽 너머를 상상해보는 지적 여정이 될 것이다.

고치고 메꾸고 덧대고 수선하여
세계를 재설계하는 사이보그의 상상력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SF 소설가로 활동하는 여성인 김초엽은 그동안 자신을 구성하는 이런 요소들과 청각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연결 짓지 못했다. SF를 통해 다른 인지 및 감각 세계를 가진 존재들을 묘사하고 그들이 중심이 된 시공간을 창조하는 일은 자신의 장애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파트너인 김원영을 비롯해 다양한 유형의 장애를 가진 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불친절한 세계를 돌파해나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또 공고한 위계와 정상성 규범을 뒤흔들며 세계의 구조 변경을 요청하는 용기를 마주하면서 비로소 자기 안의 여러 정체성을 연결, 통합할 수 있게 되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은 그의 신체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과 분리될 수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김초엽은 자기 몸에 연결된 기계들을 재구성하거나 변형 혹은 수선하며 과학기술의 현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장애인들, 장애인의 필요와 접근성을 중심에 두고 도구와 환경을 설계하는 개발자들을 소개한다. 요리의 전 과정을 촉각이나 소리로 확인할 수 있도록 꾸며진 시각장애인을 위한 주방, 휠체어의 층간 이동을 위해 경사로를 중심에 두고 설계된 주택, 청각장애인을 위한 문자통역 서비스, 어떤 신체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도 참여할 수 있도록 섬세한 접근성 설정을 갖춘 온라인 게임, 장애인의 일상을 공유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유튜버들에 이르기까지, 장애인들은 더 이상 온정과 시혜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지식 생산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김초엽은 최근 장애학 연구에서 제안된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이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크립 테크노사이언스는 장애인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장애 경험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일상의 기술을 재구성하고, 세계를 개편하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장애인은 단순히 세계의 수용자이거나 세계에 의해 형성되는 이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계를 재창조하는 사람들이다. (…) 장애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위 환경은 물론이고 지역 사회와 공동체를 ‘땜질’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장애학자들은 여기에 ‘장애인 세계 만들기’라는 명칭을 붙였다. 장애인들이 자신의 장애에 적응하며 환경을 독창적으로 수선해온 작업들 (…) 이러한 일상의 지식들이 제대로 포착된다면 장애인뿐만 아니라 취약함과 의존성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 188~189쪽

이어서 김초엽은 최근의 SF 작품들에서 장애인 캐릭터를 표현하는 방식, 장애인을 둘러싼 세계를 설계하는 관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SF라는 장르가 각자의 주관적 세계가 불완전한 이해에도 불구하고 공존하는 미래, 타인의 삶을 애써 상상하며 도달할 수 있는 미지의 영역을 탐구하는 사고 실험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SF는 다른 존재들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아올리는 이야기이며, 과거와 미래, 우주와 심해에 인간을 데려갈 방법을 고안하거나 비인간 존재들이 거주 가능한 환경을 설계하는 등 ‘접근성을 탐색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초엽이 도달하고자 하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몸의 상태에 위계를 부여하는, 신체와 정신의 유능함만을 추구하는 능력차별주의가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며 ‘사이보그 중립’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사이보그는 언제나 멸시와 우월 사이에 있는 위태롭고 불안정한 존재다. 그렇다면 트랜스휴먼의 최전선에 서 있는 아이콘이 아닌, 마주치는 사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소외된 기계 인간도 아닌, 단지 인간이 가진 하나의 중립적 특성으로서 ‘사이보그성’을 상상할 수 있을까. (…) 설령 그것이 아주 어려운 상상이라고 해도 나는 모든 사람이 ‘유능한’ 세계보다 취약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제 자신으로 존재하는 미래가 더 해방적이라고 믿는다. (…) 다른 존재들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우주선을 다시 설계해보자. 그러한 설계에는 수많은 도면이 필요할 것이다. (…) 우리가 그 무수한 도면을 함께 살피고 계속해서 수정해나간다면,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 281~282쪽

매끄러운 세계에 등장한 느리고 어긋나고 미끄러지는 몸들
이들이 벌린 틈새에서 써나가는 확장과 연립의 존재론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김초엽과 달리, 남들보다 확연히 짧은 다리에 긴 팔, 걸을 수 없는 몸을 가진 김원영은 어려서부터 자기 몸의 형태와 구조에 관심이 많았다. 표준적인 몸에 비해 어딘가 부족한 ‘없음’의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던 그는 열다섯 살에 처음 만난 휠체어와 함께 거울 앞에 섰을 때 ‘인간+휠체어’의 결합된 모습으로 그곳에 ‘있는’ 자신을 새롭게 발견한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는 정체성 물음 앞에 선 것이다. 그는 이 질문을 장애를 제거하려는, 즉 나의 ‘없음’을 없애려는 과학기술의 시선 앞으로 가져간다. 휠체어가 내 결함을 보완하는 도구일 뿐이라면, 아무리 최첨단 휠체어가 개발된다 해도 나는 여전히 ‘결여된’ 인간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휠체어를 내 몸의 일부로 여긴다면, 휠체어에서 내려온 나는 또 어떤 존재일까? 김원영은 자신의 이 오랜 문제의식을 각기 다른 신체 조건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기계, 기술과 한 자리에서 만나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에서 해소한다.

(휠체어를 타고 청각장애가 있는) Y는 오토박스를 장착하기 위해 2020년 늦여름 경기도의 한 자동차 공업사를 방문했다. (…) 장애를 가진 B는 자동차 정비사로서 전문성을 쌓으면서, 아마 그의 주변에 여럿 있을 휠체어 이용자들에게 필요한 오토박스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J의 아버지 A는 (청각장애가 있는) 자신의 딸이 (…) 보청기와 디지털 디바이스를 통해 건축 전문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딸의 친구인 Y의 장애와 기술이 맺는 관계, Y의 직업적 성장에 관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나는 Y를 잘 알기에 Y가 마스크를 쓴 사람과 대화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Y와 같은 휠체어를 이용하므로 (A는 잘 알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용 차량의 특수성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 이렇게 Y와 나, J의 아버지 A, 정비사 B, J의 자동차, 오토박스라는 기계는 그 장소에서 만나 이런저런 방식으로 협력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Y에게 적절한 오토박스를 새로운 자동차에 설치했다. - 111~112쪽

테크놀로지와 결합한 장애인의 몸을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장애를 극복한 ‘휴머니즘적 영웅’을 상찬하거나 기계와 인간,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횡단하는 ‘하이브리드적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무 데나 놓여 있다가 사물들 사이를 수선하고 연결하는 청테이프처럼, 인간과 다른 인간, 과학과 기술, 문화와 환경의 긴밀한 네트워크 속에서 서로의 취약함을 채우며 연립하는 관계에 주목하기 위해서다. 김원영은 이렇게 눈에 띄지 않지만 깊숙이 연결되어 서로를 돌보는 존재들을 (김혜리 기자가 영화 〈마션〉에 관한 글에서 쓴 표현을 빌려) “청테이프처럼 영웅적”이라고 표현한다.
기계와 한 몸을 이룬 장애인의 신체를 새로운 정체성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그 몸을 패션화하는 것도 가능할까? 기계를 장착한 신체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우아한 곡선형의 탄소섬유 의족을 신은 채 매끈한 몸매를 드러낸 패럴림픽 육상 선수 에이미 멀린스처럼 휠체어와 함께 아름다울 방법을 찾아야 할지, 휠체어에서 내려온 ‘자연스러운’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야 할지 여전히 갈등하는 김원영은 의족이 없으면 ‘발가벗은 느낌’이 든다는 에이미 멀린스의 말을 인용하며 휠체어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한다. 장애인의 몸에 장착된 인공 보철은 단지 도구나 디자인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일종의 집과 같은 장소라고 말이다. 이처럼 김원영은 책 전반에 걸쳐 휠체어, 보청기, 흰 지팡이, 의족 등 인공 보철과 결합한 장애인을 설명할 새로운 존재론을 탐색해나간다. 그는 애플이나 테슬라 같은 첨단 테크 기업들이 더욱더 매끄러운 디자인,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설계를 추구하는 흐름 속에서 그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편을 호소하는 장애인의 역량에 주목한다. 다수가 편리하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나는 그것에 접근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장애인의 존재는 매끄러운 세계에 균열을 내고 이음새를 띄우며 다시 한 번 사유할 기회를 준다. 그 벌어진 틈새에서 우리는 다른 신체와 감각, 정신세계를 가진 타자와 연결되고, 서로의 취약한 부분을 돌보며 곁에 선다. 김원영은 바로 이 틈새에서 출현하는 미래의 기술을 기다린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자는 나를 돕는 활동지원사이고, 안내견이고, 휠체어이며, 보청기이고, 오토박스이고, 청테이프이고, 친구들이며, 관객이고, 독자들이다. (…) 종이를 뜯는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거울 속에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고 묻는 기묘한 형상의 10대 소년일 수도 있으며, 혜성처럼 나타나 이제껏 본 적 없는 우주 영웅을 그려내는 SF 소설가일 수도 있다. 어쩌면 동물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도무지 생각지 못했던 어떤 세계와 정체성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이 ‘타자’들은 확고하다고 믿었던 지식과 기술, 사상, 정치적 신념과 지혜의 매끄러운 질서에 오류로서 등장한다. 돌봄의 공동체는 그런 오류를 배제하고, 몰아세우고, 깔끔히 치료하고 쓸어버리는 대신 오류가 열어둔 이음새 사이에서 새로운 탐사를 시작한다. 타자를 돕고, 타자로서 돕고, 타자를 돕는 일을 도우며, 미래-타자의 출현에 열린 지식과 기술은 어떤 얼굴일까. - 305~307쪽

김원영 × 김초엽, 파트너가 되다

김원영과 김초엽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장애권리운동의 자장 안에서 성장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자신의 장애를 ‘결여’가 아닌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신체의 손상을 장애로 만드는 사회의 구조에 저항하는 관점을 키워왔다. 이런 관점에서는 장애를 치료, 교정, 제거하려는 과학기술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마련이지만, 이들은 또한 과학기술의 성과로 생명을 유지하고 신체의 기능을 개선해온 당사자로서 과학기술을 배제하기보다는 그 방향에 개입하기를 선택했다. 두 사람은 비슷한 방향을 향하지만, 각자의 성별 정체성과 장애 유형, 지적인 배경과 삶의 경로에서 비롯한 서로 다른 주제를 펼쳐 나간다.
지체장애인이자 법률가, 연극배우이며 재활학교와 장애권리운동 공동체를 경험한 김원영은 몸의 형태와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밀고 나아가 그 몸이 인공 보철과 만났을 때의 상태를 무어라 규정할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울 수 있는지, 표준 혹은 정상적인 신체들로 채워진 공간에 이런 존재들이 등장했을 때 어떤 예상 밖의 만남이 일어나는지를 서술한다. 반면 감각장애인이자 SF 소설가, 과학 전공자이자 여성인 김초엽은 다양한 신체와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과학기술과 창작의 영역 중심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도구와 환경과 세계를 창조해나가는 모습에 더 관심을 둔다. 이 책의 뒤에 실린 대담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두 사람의 대화가 펼쳐진다. 평소에는 보청기를 잘 착용하지 않는 김초엽은 휠체어를 신체의 일부로 느끼며 그 미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김원영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장애인 당사자들의 공동체에 오랜 시간 속해 있던 김원영은 그런 경험 없이도 장애학의 관점을 체화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김초엽의 시각을 놀라워한다. 이들의 경험과 시각이 교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풍요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 또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는 큰 즐거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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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과 김원영은 각자의 몸을 둘러싼 테크놀로지와 세계를 관찰하면서 과연 누가, 어떤 방식으로 사이보그가 되는지 묻는다. 이들은 ‘장애인을 위한 따뜻한 테크놀로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테크놀로지와 사회가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하는지 상상하고 제안한다. 그 재설계는 깜짝 놀랄 만한 테크놀로지가 나올 50년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장애인의 삶을 중심에 두고 시작되어야 한다는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소수자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그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질문한다. 자신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사회가 보는 시선으로 자기 밖에서 자기를 바라본다. 이 이중 삼중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괴물’ 그리고 ‘사이보그’이다. 그러나 ‘괴물들’은 또한 안다. 그 ‘괴물 됨’의 경험이 우리를 가장 인간답게 사유하고 질문하게 함을. 『사이보그가 되다』를 읽으며 상상한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일어나고, 걷고, 듣고, 보고, 말하고, 춤추는 장관을.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상태에 따라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는 영토를. ‘결여’가 아니라 ‘압도적인 고유성’을 가진 이 아름다운 ‘괴물들’의 시끌벅적한 축제를!
- 김보라 (영화감독)

회원리뷰 (56건) 리뷰 총점9.7

혜택 및 유의사항?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국 우리를 위한 일이기에, [사이보그가 되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로얄 팽* | 2023.02.06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2022년을 마무리하며 독독녀 연말 독서모임으로 공동 책을 정했다. 둘이서, 셋이서는 이전에도 같은 책을 정해서 독서모임을 진행해본 적이 있지만 멤버 전원이 모두 같은 책 한 권을 정한 것은 처음이라 매우 기대됐다.ㅎㅎ 그리고 눈오는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1박 2일 여행까지 ! 폭설주의보가 내린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아늑한 한옥에서 하루종일 책을 붙잡고 있던 우리의 독서;
리뷰제목

2022년을 마무리하며 독독녀 연말 독서모임으로 공동 책을 정했다. 둘이서, 셋이서는 이전에도 같은 책을 정해서 독서모임을 진행해본 적이 있지만 멤버 전원이 모두 같은 책 한 권을 정한 것은 처음이라 매우 기대됐다.ㅎㅎ 그리고 눈오는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1박 2일 여행까지 ! 폭설주의보가 내린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아늑한 한옥에서 하루종일 책을 붙잡고 있던 우리의 독서모임을 기억하며..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의존,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p.40

겨울서점 추천으로 알게되어 내가 제안한 책이었다. 김겨울 작가님은 이 책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했다. 타노스가 핑거스냅으로 인구 절반을 없앤다면, 휠체어를 탄 사람은 휠체어도 함께 사라져야 할까? 안경은? 이어폰은? 그렇다면 스마트폰은? 생각해보면 '기계'나 '기술'과 우리를 구분짓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할만큼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웠다.

 

신입생 때부터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해주신 친절한 교직원 분들이 계셨지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몰라 요청도 하지 못했다.

p.33

질의응답 시간이 두려운 이유다. 질문만 들어도 이해도, 관심도, 해박함, 센스 등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아는 게 있어야 질문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다. 해당 매체에서 이미 언급한 말을 또 묻는다면 말을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걸 들켜버리고 말테니까.. 아무튼, 요청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그 도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기 힘드니 어려운 상태일 것이므로.. 도와줄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떻게 도와야할지 모르는 사람도 똑같긴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애인 대상으로 설립된 기관에서는 얼마든지 적당한 도움을 먼저 제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잘듣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그 기술은 먼 미래가 아니라 현실과 가까운 곳에 줄곧 있었는데, 오랫동안 나에게 선택지로서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중략)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p.35

기술에 가장 의존하는 인간이 과연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보다 장애인이 현대 기술에 바라는 것은 많지 않을 수 있다. 장애를 아예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을 하는 데에 당장 어려운 점을 도와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일 수 있다는 거다. 

평생을 어떤 음역대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기가 갑자기 보청기나 인공이식으로 듣게 되었을 때에 무조건 행복감을 느낄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김초엽 작가님도 보청기를 늘 착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잘 들리는' 것이 늘 필요하지는 않을 뿐더러, 불편하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바로 그 기술로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이보그라는 정체성

과거에는 종교나 국가가 인간의 정체성 물음에 일정한 답을 내려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 성별, 신체 조건을 그 사회의 정치적, 신학적 권위가 부여한 내용대로 규정하고 살았다.

우리의 시대는 소위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이며 개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답하기 위해 각자 투쟁한다.

p.57

우리 시대에는 '순수하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나'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중략)

외부와 분리된 독립된 '정신'을 가진 '나'라는 주체는 애초에도 환상이었을지 모르지만 점점 더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p.102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수도없이 닥치고 말았던 모순과 정확히 일치해서 놀랐다. 작가가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본인의 정체성을 인식할 때에 불가피하게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태어나자마자 본 것은 앙앙 울고있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나를 바라본 부모님이나, 의료진이나, 분만실 천장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보는 그 공간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서 내 크기를 가늠한다. 하물며 표정이나 말로 감정을 읽는 것도 보고 배우지 않나. 언어조차도 우리가 대충 싸잡아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지 명확하게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드는 감정을 문자로 꺼내어놓는 과정 자체가 생략과 일반화다.. 점점 일이 커지므로 여기서 마무리해야지...

 

우리는 실제로 더 발전된 휠체어를 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더 크게 결핍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른다.

p.61

그러니까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다.

p.67

'일반인' 눈으로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아무리 휠체어를 본인 몸과 자연스럽게 익힌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다리만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건 철저히 우리 입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유튜브에서 눈물참기 영상으로 유명해서 기억이 날듯한 영상이라 가슴이 시큰했다.(매우 찔렸다. 작가가 지적하는 바로 그 생각을 나도 똑같이 하며 울었다.) 시각장애인에게 눈을 선물하고, 청각장애인에게 목소리를 선물하며 장애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 ... '쇼'다.

 

미국에서는 '오티즘 스피크스' 같은 기관들이 많은 돈을 모금하지만 이 돈은 자폐인과 그 가족의 일상을 지원하는 대신, 자폐의 원인과 위험 인자들을 밝히는 연구로만 흘러 들어간다.

p.82

독모를 하면서 새롭게 주목하게 된 포인트였다.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을 모델로 써서 모금한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모금한 돈이 쓰이는지 알고 있을까? 정말로 장애인을 위한 일일까?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이 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사실을 알고서도 똑같이 모금을 할까? 션언니 말대로 지금껏 단체에 기부한 기부금이 사실은 정말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쓰인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장애 등급과 같은 명시적인 '증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이중고에 처하는 셈이다.

p.123

장애는 그 자체로 개인의 다른 특성을 모두 지우는 부정적 정체성으로 여겨진다. '무능함'과 쉽게 연결되므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비장애인들은 경험하지 않는 부당한 사회적 평가를 얻거나 일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필요한 도움을 얻는 것)과 낙인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많은 경우 장애를 숨기고 비장애인으로 패싱되는 것을 선택한다.

p.125

나의 무지로 지나친,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을 줄 기회조차 눈치채지 못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나는 자원봉사를 할만큼 공동체적인 선을 가진 사람이 아니지만 이건 내 삶을 비집고 자원봉사할 장소를 알아보고, 신청하고, 그 장소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라 대중교통에서 임산부석을 당연히 비워두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행동하는 것으로 도울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말이다.

 

공간, 건축물, 그리고 사회적 가정은 한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 방식이 된다.

p.132

공감한다. 위에서 환경과 분리된 나의 정체성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문제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최적화된 집에서는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다가, 집만큼 최적화된 설계가 갖춰지지 못한 사회로 나오는 순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적일지라도 장애인을 포함한 모두가 자기 정체성을 '정상인', '장애인'이 아닌 본인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필요할까 싶다.

 

 

디자인

나의 변형된 몸을 가급적 위장해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디스크레션)과 숨겨왔던 나의 '비정상성(비표준)'을 나만의 개성으로 과감히 드러내고 싶은 마음(패션)이 긴장 속에서 공존했기에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p.160

시상식에 초대받은 저자가 무대에 오른다면 휠체어를 타고 오를지, 몸과 매끄럽게 밀착된 의족 위로 매끈하고 그럴듯한 정장을 빼입을지 고민하는 대목이었다. 장애인을 대표하는 작가로써 정상성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렇다고 무대에 기어 올라가는 것이 그 시상식을 보는 사람들에게 모두 좋은 시선으로 보일지 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여름휴가 하나만 생각해보아도 사진빨 잘 받는 옷, 이번 기회에 다 써가는 화장품도 위시리스트에 넣어놓은 번듯한 걸로 장만하고 싶은 마음인데 시상식은 오죽했을까 싶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의족도 기계와 몸의 접합부위가 편리한 것이 우선인지, 혹은 그 이음새가 빈틈없어서 미학적으로 매끈하거나 심지어는 나무 의족에 패턴을 그려넣기까지.. 그들만의 의족 패션쇼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과연 새로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페티시즘은 어떤 사물이나 특정 신체 부위를 종교적으로 또는 미적(예술적)으로, 혹은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집착하는 태도를 말한다. 페티시적 욕망의 공통점은 사물이나 신체를 둘러싼 현실의 복잡한 맥락이나 사회적 관계, 당초 목적 등을 소거하고 그 자체를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  무엇으로서 이상화하고 열망한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의 특징으로 종종 거론되는 테크노페티시즘은 테크놀로지가 문제 해결의 도구이자 수단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상징적, 성적, 미학적 대상으로 고양되는 경향이다.

p.166

테크노페티시즘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실 이제껏 페티시는 무조건 성적인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지체장애인이라면 휠체어나 의족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를 선망하기도 하고, 신체 일부가 절단된 절단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성적으로 욕망하는 경향(디보티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보철과 신체 사이 '이음새'가 주는 불편함과, '티 나지 않게' 걷기 위해 익숙해져야 하는 노력 등이 모두 무시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장애인 몸에 대한 편견, 동정의 시선이 아닌 새로운 인식이 맞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도구로 남지 않게 되면 어떤 '불쾌함'을 느낀다. 

테크놀로지는 도구 이상일 때 우리를 더욱 매료시키지만, 도구가 아니게 되는 순간 기묘한 공포로 다가온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수많은 SF 소설의 원형인 이유다.

p. 169

프랑켄슈타인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병에 걸려서 한 두마디로 끝낼 수 없지만 첨언을 해보자면, ..

기술이나 도구에 주체성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테크놀로지가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섰을 때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예측할 수 없음에 있지 않을까 한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이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 이름을 내내 달고 다니지만 사람으로 인식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그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본능대로 흘러다니며 사회화한다. 나름의 사회화를 거친 괴물이지만 인간의 시선으로는 인간일 수 없고, 인간이어서도 안되는 존재.. 하지만 뇌와 몸체 그 어느 것 하나 사람이 아닌 것이 없다. 아닐 이유가 없다. 인간적인 슬픔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과연 괴물을 사람이 아닌 생명체로만 보는 사람들이 잔인할까, 제대로 된 사회화를 거치지 못한 채로 힘만 세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감성을 가진 괴물이 잔인한 걸까. (물론 살육은 죄가 분명하지만 말이다.) 

사이보그가 단지 먼 미래의 히어로가 아니라, 우리 옆에 ( 아니 잘 보이지도 않는 ) 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반대로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장애인을 인식하는 시선이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소설 속 괴물에게 더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성역할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시 유행했던 영화 '조커'의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 조커의 일생은 눈물흘리며 공감하는 이 사회가 얼마나 기괴한지 지적하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서인거지, 상황을 알고보면 모두가 이해될 거다.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이다.

p.203

기능적으로 강한 인간이 되기보다 취약한 신체에 자긍심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강한 상태'란 도대체 무엇일까.

p. 232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좇다보면 오히려 처음부터 누굴 위한 것이었는지 목적성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인 우리는 보행에 문제가 없고, 모든 방면에서 건강한 신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없는 매우 특정한 신체일 수 있기 떄문이다.

'보편성'과 '강한 상태'는 주관적이면서 사회적인 단어라 그 의미가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어의 정의부터 의문을 가지고 보는 것은 기존의 상태, 즉 '보편성'을 재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장애는 단지 신체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의 문제이기도 했다. 테크놀로지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 그 자체가 심미적(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디자인'처럼 다뤄진다. '심리스'가 디자인에서 유래한 말이었음을 기억하자.

p. 238

그러나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사회 조직을 이음새 없이 직조하는 '심리스-스타일'의 밑바탕에는 그 '매끄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덜컹거림'을 수선하고 버티는 손길이 촘촘히 닿아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학자 하대청은 이 손길을 '돌봄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p. 241

심리스한 세계에서 요구되는 능력은 이음새를 없애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시대의 '강한 인간'이란 반대의 능력, 즉 완전히 매끄러운 세계에 예측하지 못한 구멍을 만드는(이음새를 띄우는) 역량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p. 245

집에 환자가 생기면 가족들은 자연스레 보호자가 된다. 당연하게도 수발을 들고, 일거수일투족을 본인의 생활루틴처럼 보살펴야 한다. 그들이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 어쨌거나 그들 스스로건, 주변의 보살핌이건 '덜컹거리는' '이음새'를 메우기 위한 노동이 필요하다.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생활을 위해서.

속옷 디자인에서나 들어본 심리스가 기능성이 아니라 디자인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은 인상적이다. 편리함보다 '심미성'인 것이다.

 

카지노 사업장은 1980년부터 2008년까지 네 배 이상  관광객 수가 늘었고 수익률도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여기에는 새로운 디자인의 힘이 있었다. 쉴에 의하면 그 디자인은 게임과 게임 사이, 심지어 '잭팟'이 터진 게임과 그다음 게임 사이에 존재하는 이음새조차 철저히 없애는 것이었다.

p.246

매끄럽게 설계된 세계 어딘가에 적용하지 못한 장애인이 출현하는 것은 지루하고 의미 없는 유튜브 영상 한가운데 배터리가 5퍼센트 남았음을 알리는 사인처럼 이음새를 만든다.

p. 249

유튜브 자동재생, 릴스가 자동으로 반복재생/다음 영상 재생되는 것과도 동일한 것 같다. 틈을 주지 않는 것은 힘이 될 수 있구나. 그만둬야 하는 강력한 동기가 생기지 않는 한 더이상 흥미를 끌지 않을 때까지 멍하니 핸드폰만 붙잡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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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를 위한 일이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로얄 팽* | 2023.02.04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2022년을 마무리하며 독독녀 연말 독서모임으로 공동 책을 정했다. 둘이서, 셋이서는 이전에도 같은 책을 정해서 독서모임을 진행해본 적이 있지만 멤버 전원이 모두 같은 책 한 권을 정한 것은 처음이라 매우 기대됐다.ㅎㅎ 그리고 눈오는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1박 2일 여행까지 ! 폭설주의보가 내린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아늑한 한옥에서 하루종일 책을 붙잡고 있던 우리의 독서;
리뷰제목

2022년을 마무리하며 독독녀 연말 독서모임으로 공동 책을 정했다. 둘이서, 셋이서는 이전에도 같은 책을 정해서 독서모임을 진행해본 적이 있지만 멤버 전원이 모두 같은 책 한 권을 정한 것은 처음이라 매우 기대됐다.ㅎㅎ 그리고 눈오는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1박 2일 여행까지 ! 폭설주의보가 내린 추운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아늑한 한옥에서 하루종일 책을 붙잡고 있던 우리의 독서모임을 기억하며..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의존,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p.40

겨울서점 추천으로 알게되어 내가 제안한 책이었다. 김겨울 작가님은 이 책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했다. 타노스가 핑거스냅으로 인구 절반을 없앤다면, 휠체어를 탄 사람은 휠체어도 함께 사라져야 할까? 안경은? 이어폰은? 그렇다면 스마트폰은? 생각해보면 '기계'나 '기술'과 우리를 구분짓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할만큼 밀접하게 닿아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웠다.

 

신입생 때부터 나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해주신 친절한 교직원 분들이 계셨지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몰라 요청도 하지 못했다.

p.33

질의응답 시간이 두려운 이유다. 질문만 들어도 이해도, 관심도, 해박함, 센스 등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아는 게 있어야 질문을 만들 수 있다는 거다. 해당 매체에서 이미 언급한 말을 또 묻는다면 말을 열심히 듣지 않았다는 걸 들켜버리고 말테니까.. 아무튼, 요청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그 도움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기 힘드니 어려운 상태일 것이므로.. 도와줄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떻게 도와야할지 모르는 사람도 똑같긴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장애인 대상으로 설립된 기관에서는 얼마든지 적당한 도움을 먼저 제공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더 잘듣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그 기술은 먼 미래가 아니라 현실과 가까운 곳에 줄곧 있었는데, 오랫동안 나에게 선택지로서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중략)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p.35

기술에 가장 의존하는 인간이 과연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보다 장애인이 현대 기술에 바라는 것은 많지 않을 수 있다. 장애를 아예 없애거나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일을 하는 데에 당장 어려운 점을 도와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일 수 있다는 거다. 

평생을 어떤 음역대의 소리를 듣지 못한 아기가 갑자기 보청기나 인공이식으로 듣게 되었을 때에 무조건 행복감을 느낄 거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실제로 김초엽 작가님도 보청기를 늘 착용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잘 들리는' 것이 늘 필요하지는 않을 뿐더러, 불편하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기술이라면 그들이 원하는 바로 그 기술로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이보그라는 정체성

과거에는 종교나 국가가 인간의 정체성 물음에 일정한 답을 내려주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 성별, 신체 조건을 그 사회의 정치적, 신학적 권위가 부여한 내용대로 규정하고 살았다.

우리의 시대는 소위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시대이며 개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묻고 답하기 위해 각자 투쟁한다.

p.57

우리 시대에는 '순수하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나'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중략)

외부와 분리된 독립된 '정신'을 가진 '나'라는 주체는 애초에도 환상이었을지 모르지만 점점 더 의문의 대상이 되고 있다.

p.102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한 사회초년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수도없이 닥치고 말았던 모순과 정확히 일치해서 놀랐다. 작가가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본인의 정체성을 인식할 때에 불가피하게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태어나자마자 본 것은 앙앙 울고있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나를 바라본 부모님이나, 의료진이나, 분만실 천장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보는 그 공간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는지 보면서 내 크기를 가늠한다. 하물며 표정이나 말로 감정을 읽는 것도 보고 배우지 않나. 언어조차도 우리가 대충 싸잡아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지 명확하게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드는 감정을 문자로 꺼내어놓는 과정 자체가 생략과 일반화다.. 점점 일이 커지므로 여기서 마무리해야지...

 

우리는 실제로 더 발전된 휠체어를 타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스로를 더 크게 결핍된 존재로 생각할지 모른다.

p.61

그러니까 기가지니가 김씨에게 선물한 '목소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청인들이 청각장애인에게서 듣고 싶어 하는 목소리다.

p.67

'일반인' 눈으로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아무리 휠체어를 본인 몸과 자연스럽게 익힌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다리만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건 철저히 우리 입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특히 유튜브에서 눈물참기 영상으로 유명해서 기억이 날듯한 영상이라 가슴이 시큰했다.(매우 찔렸다. 작가가 지적하는 바로 그 생각을 나도 똑같이 하며 울었다.) 시각장애인에게 눈을 선물하고, 청각장애인에게 목소리를 선물하며 장애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가족들은 그 모습을 보고 눈물짓는 ... '쇼'다.

 

미국에서는 '오티즘 스피크스' 같은 기관들이 많은 돈을 모금하지만 이 돈은 자폐인과 그 가족의 일상을 지원하는 대신, 자폐의 원인과 위험 인자들을 밝히는 연구로만 흘러 들어간다.

p.82

독모를 하면서 새롭게 주목하게 된 포인트였다. 장애인을 위해, 장애인을 모델로 써서 모금한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모금한 돈이 쓰이는지 알고 있을까? 정말로 장애인을 위한 일일까?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이 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사실을 알고서도 똑같이 모금을 할까? 션언니 말대로 지금껏 단체에 기부한 기부금이 사실은 정말 우리가 의도한 방향으로 쓰인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장애 등급과 같은 명시적인 '증명'을 받지 못하는 경우는 이중고에 처하는 셈이다.

p.123

장애는 그 자체로 개인의 다른 특성을 모두 지우는 부정적 정체성으로 여겨진다. '무능함'과 쉽게 연결되므로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비장애인들은 경험하지 않는 부당한 사회적 평가를 얻거나 일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필요한 도움을 얻는 것)과 낙인을 비교할 수밖에 없고, 많은 경우 장애를 숨기고 비장애인으로 패싱되는 것을 선택한다.

p.125

나의 무지로 지나친,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도움을 줄 기회조차 눈치채지 못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 나는 자원봉사를 할만큼 공동체적인 선을 가진 사람이 아니지만 이건 내 삶을 비집고 자원봉사할 장소를 알아보고, 신청하고, 그 장소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라 대중교통에서 임산부석을 당연히 비워두는 것과 같은 의미다. 일상 속에서 조금씩 행동하는 것으로 도울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텐데 말이다.

 

공간, 건축물, 그리고 사회적 가정은 한 사람의 삶을 제한하는 방식이 된다.

p.132

공감한다. 위에서 환경과 분리된 나의 정체성은 사실상 존재할 수 없는 문제라고 언급했던 것처럼,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최적화된 집에서는 본인이 장애인이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다가, 집만큼 최적화된 설계가 갖춰지지 못한 사회로 나오는 순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적일지라도 장애인을 포함한 모두가 자기 정체성을 '정상인', '장애인'이 아닌 본인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필요할까 싶다.

 

디자인

나의 변형된 몸을 가급적 위장해서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디스크레션)과 숨겨왔던 나의 '비정상성(비표준)'을 나만의 개성으로 과감히 드러내고 싶은 마음(패션)이 긴장 속에서 공존했기에 생겨난 것일지 모른다.

p.160

시상식에 초대받은 저자가 무대에 오른다면 휠체어를 타고 오를지, 몸과 매끄럽게 밀착된 의족 위로 매끈하고 그럴듯한 정장을 빼입을지 고민하는 대목이었다. 장애인을 대표하는 작가로써 정상성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렇다고 무대에 기어 올라가는 것이 그 시상식을 보는 사람들에게 모두 좋은 시선으로 보일지 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여름휴가 하나만 생각해보아도 사진빨 잘 받는 옷, 이번 기회에 다 써가는 화장품도 위시리스트에 넣어놓은 번듯한 걸로 장만하고 싶은 마음인데 시상식은 오죽했을까 싶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의족도 기계와 몸의 접합부위가 편리한 것이 우선인지, 혹은 그 이음새가 빈틈없어서 미학적으로 매끈하거나 심지어는 나무 의족에 패턴을 그려넣기까지.. 그들만의 의족 패션쇼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과연 새로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페티시즘은 어떤 사물이나 특정 신체 부위를 종교적으로 또는 미적(예술적)으로, 혹은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집착하는 태도를 말한다. 페티시적 욕망의 공통점은 사물이나 신체를 둘러싼 현실의 복잡한 맥락이나 사회적 관계, 당초 목적 등을 소거하고 그 자체를 내재적인 가치를 지닌  무엇으로서 이상화하고 열망한다는 것이다.

현대 문명의 특징으로 종종 거론되는 테크노페티시즘은 테크놀로지가 문제 해결의 도구이자 수단이기를 멈추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상징적, 성적, 미학적 대상으로 고양되는 경향이다.

p.166

테크노페티시즘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실 이제껏 페티시는 무조건 성적인 의미인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지체장애인이라면 휠체어나 의족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 그 자체를 선망하기도 하고, 신체 일부가 절단된 절단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성적으로 욕망하는 경향(디보티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보철과 신체 사이 '이음새'가 주는 불편함과, '티 나지 않게' 걷기 위해 익숙해져야 하는 노력 등이 모두 무시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 장애인 몸에 대한 편견, 동정의 시선이 아닌 새로운 인식이 맞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도구로 남지 않게 되면 어떤 '불쾌함'을 느낀다. 

테크놀로지는 도구 이상일 때 우리를 더욱 매료시키지만, 도구가 아니게 되는 순간 기묘한 공포로 다가온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수많은 SF 소설의 원형인 이유다.

p. 169

프랑켄슈타인이라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병에 걸려서 한 두마디로 끝낼 수 없지만 첨언을 해보자면, ..

기술이나 도구에 주체성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테크놀로지가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섰을 때 불쾌함을 느끼는 이유는 예측할 수 없음에 있지 않을까 한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이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 이름을 내내 달고 다니지만 사람으로 인식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고, 그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본능대로 흘러다니며 사회화한다. 나름의 사회화를 거친 괴물이지만 인간의 시선으로는 인간일 수 없고, 인간이어서도 안되는 존재.. 하지만 뇌와 몸체 그 어느 것 하나 사람이 아닌 것이 없다. 아닐 이유가 없다. 인간적인 슬픔과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 느끼는 것이다. 과연 괴물을 사람이 아닌 생명체로만 보는 사람들이 잔인할까, 제대로 된 사회화를 거치지 못한 채로 힘만 세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감성을 가진 괴물이 잔인한 걸까. (물론 살육은 죄가 분명하지만 말이다.) 

사이보그가 단지 먼 미래의 히어로가 아니라, 우리 옆에 ( 아니 잘 보이지도 않는 ) 장애인들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반대로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장애인을 인식하는 시선이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본다. 어쩌면 소설 속 괴물에게 더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성역할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당시 유행했던 영화 '조커'의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 조커의 일생은 눈물흘리며 공감하는 이 사회가 얼마나 기괴한지 지적하는 글을 읽은 적 있다.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 없어서인거지, 상황을 알고보면 모두가 이해될 거다.

 

중립을 의심하자는 것, 가치 '중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장애를 중심에 놓는 가치 '명시적' 디자인을 하자는 것이다.

p.203

기능적으로 강한 인간이 되기보다 취약한 신체에 자긍심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강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강한 상태'란 도대체 무엇일까.

p. 232

장애인을 위해 개발된 기술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위한 것이었지만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를 좇다보면 오히려 처음부터 누굴 위한 것이었는지 목적성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장애인인 우리는 보행에 문제가 없고, 모든 방면에서 건강한 신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애인들에게는 그것이 그들에게는 없는 매우 특정한 신체일 수 있기 떄문이다.

'보편성'과 '강한 상태'는 주관적이면서 사회적인 단어라 그 의미가 모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단어의 정의부터 의문을 가지고 보는 것은 기존의 상태, 즉 '보편성'을 재고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장애는 단지 신체 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디자인의 문제이기도 했다. 테크놀로지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넘어 그 자체가 심미적(예술적) 가치를 지니는 '디자인'처럼 다뤄진다. '심리스'가 디자인에서 유래한 말이었음을 기억하자.

p. 238

그러나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사회 조직을 이음새 없이 직조하는 '심리스-스타일'의 밑바탕에는 그 '매끄러움'을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덜컹거림'을 수선하고 버티는 손길이 촘촘히 닿아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학자 하대청은 이 손길을 '돌봄 노동'이라고 표현한다.

p. 241

집에 환자가 생기면 가족들은 자연스레 보호자가 된다. 당연하게도 수발을 들고, 일거수일투족을 본인의 생활루틴처럼 보살펴야 한다. 그들이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가 아니면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겠지만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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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움벨트를 깨트려야 한다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능* | 2023.01.21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 ○으로 대체된 키워드들은 개인 정보로 검열되었습니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크게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장애학과 기술 사이의 유기성을 다룬다. 그럼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당사자성’이다.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규정짓고 활동하는 공동 저자 김초엽과 김원영은 책 앞날개에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와 '휠체어를 탄다.' 를 소개 글 가장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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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로 대체된 키워드들은 개인 정보로 검열되었습니다.

 

<사이보그가 되다>는 크게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장애학과 기술 사이의 유기성을 다룬다. 그럼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당사자성’이다.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규정짓고 활동하는 공동 저자 김초엽과 김원영은 책 앞날개에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와 '휠체어를 탄다.' 를 소개 글 가장 마지막에 써넣으며 본인의 입지를 밝히고, 장을 번갈아 가며 관련 담론을 펼친다.

그렇다면 동양인/여성/시스젠더/○○섹슈얼/비장애인 신체/중산층인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비록 로즈마리 갈런드-톰슨이 '정상인'이라 부르는 규범으로부터는 조금 어긋나있을진 몰라도 나는 내가 속한 이 땅에선 아주 보통의 인간이라고 불릴 것이다. 비록 소수자성을 향한 타자의 혐오를 느껴본 적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난데없는 PTSD로 정신과 치료도 받고 있지만 그래도 남들과 별다를 게 없는 존재라고 확신한다. 또한 어떤 순간적 '힘듦'으로 불평할 시간이 있다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행하려 노력한다.

찬찬히 짚어보면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작가, 그리고 나 사이에는 앞서 말한 '정상인' 템플릿에서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차이만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더 큰 공통분모를 공유한다. 그런데도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처음 알았다. 활자로 썼을 땐 사소할지 모를 이 정체성의 간극이 근본적인 대역을 태초부터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느끼는 소수자성은 두 다리로 걷지 못하거나 남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을 때 발생하는 종류가 아니다. 그보다는 더 보편적인 차이에서 오는 자기 증명의 연속이다. "여자라고 임금을 적게 받아서는 안 된다.", "단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혐오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성소수자도 동반자 법 아래에서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비수도권 자들에 대한 처우가 수도권과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등. 이런 단순한 입장들은 어떻게 보면 '장애인도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차원보다는 훨씬 쉽고 편할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보조를 요청하지 않아도 어쨌거나 '남들'만큼의 제 기능은 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의 외침이다.

그러니 전복될 가치관조차 없어 얼떨떨했다는 감상이 더 적합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읽는 내내 고개를 수도 없이 끄덕였으나, 이입한 횟수는 그와 비례하지 않았다. 감히 공감해도 되는지조차 어렴풋했다.

분명 성 소수성을 주제로 꺼낼 때도 비슷할 테다. 퀴어퍼레이드가 열릴 때마다 에이즈와 예수님을 들먹이며 나타나는 반동성애 연대협회는 죽지 않는 바퀴벌레처럼 지리멸렬하고도 지긋지긋하게 주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영화 <보이 이레이즈드>의 주인공 자레드는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지만, 그가 주체적으로 결론 내린 본인의 정체성은 교회 사회 안에서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져 전환 치료를 받게 된다. 제목 그대로 주변인들로부터 본연의 존재가 지워지는 경험은 불쾌하고 비자주적이다. 그런데 장애는? 우리는 장애에 대해 생애 얼마 동안 생각하고 걱정하고 분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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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각 대한민국 서울은 전쟁통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지난 2021년 12월부터 출근길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시위를 지속하고 있으나,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장연과의 면담을 거부하고 권리 확보 선전을 불법행위로 간주하는 등 '시민 불편과 불안을 초래하는 시위를 계속한다면 더 이상 관용은 없다'고 발표했다한국일보, “못 만날 이유 없다”던 오세훈, 전장연과 단독 면담 불발” 2023.01.19. 혹자는 이를 두고 대중교통 이용이 어려운 시민은 어엿한 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단 입장만 굳혔을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처음 시위가 벌어졌을 때, 평소 버스나 자전거로 통근하던 나는 회사 동료들의 불평으로 아침을 맞았다. 시위 때문에 지하철이 지연돼서 지각했다느니, 왜 하필 출근 시간대에 시위하냐느니 따위의 이야기였다. 이어지는 얘기들은 듣지 않아도 됐다. 귀결되는 논점은 단 하나. "괜한 불똥에 멀쩡한 본인들이 피해를 보았단 것".

사실 트랜스 휴머니즘이라거나, 크립 테크노 사이언스라거나, STS 같은 학문은 이 책에 소개된 것을 넘어 더 깊이 알아볼 시도를 하거나 연구로 이어지는 단계로 나아가기엔 아주 의아하다. 내가 이전에 썼던 <다른 방식으로 보기> 독후감에서 예술의 존재 가치에 관해 의심한 적 있듯, 그것들을 알지 않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까, 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연이은 투쟁과 끊이지 않는 논란에 기사 전문 대신 헤드라인만 읽고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던 중, 문득 한창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던 시절, 영어권 국가 혹은 '선진국'이라 불리는 그곳에선 휠체어를 탄 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당연하게 볼 수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저상버스가 아닌 차량이 오리라곤 기대조차 하지 않는 타지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김원영 작가는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와 같은 의문을 던진다. 흔히 '장애인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가 베푼 온정의 수혜자로 위치'하기 때문에, 시민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 권리인 이동권은 투쟁해야만 겨우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곧잘 감동 받곤 하는 마케팅에서도 이런 시선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인간적인 신기술'의 뛰어난 업적으로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낸 농인, 가족의 목소리를 듣게 된 청각장애인, 로봇 다리를 장착하고 다시 뛸 수 있게 된 지체장애인의 모습을 조명하고 비장애인은 눈물을 훔치는 광경은 앞서 언급한 성소수성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애'를 교정이 필요한 존재로 규정짓는다. 곧 도래할 최신 과학 기술이 모든 걸 해결해줄거란 믿음은 기후 위기를 중점적으로 다룬 책 <2050 거주불능 지구>에서 다룬 맥락과 유사하다. 엄청난 속도의 기술 발전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 당장 눈앞의 현실을 가린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교화 대상으로 여기는 시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인적인 경험을 공유하자면 학창 시절에 공모했던 '전국 학생 설계 경진대회'가 있다. 대한기계학회가 주최하고, 여타 정부기관과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받은 꽤 큰 행사였다. 대주제는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따뜻한 기술의 개발'로,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통해 사회 여러 계층에게 과학기술의 힘이 미치도록 기획되었다. 그맘때쯤 공대로 입시의 방향을 정했기때문에 단순히 외부 활동 스펙이 필요해 참여했던 대회였다. 운좋게 입상까지 했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광역시권 출생/명문 학군/전문직종 자제인 나와 친구가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단순히 미디어와 고정 관념이 그리는 이미지들을 캐치하고 '따뜻한' 기술이란 이름 아래 설계한 ○○ ○○○의 도면은 스케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었고, 설계 취지와 내용도 부실했다. 기억에 본인이나 주변인의 장애 때문에 현실에서 부딪힌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설계를 한 팀은 전무했다(이점은 특히 대학부보다 고등부에 특출나게 드러났다). 대체 누구를 위한 대회였을까?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는 걸,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

적절한 환경이 주어지지 않아 무능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또 있다. 나의 조부모님은 얼마 전에 신축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그곳에는 조명과 난방을 포함한 모든 기본 설비들을 하나의 터치패드로 중앙 제어할 수 있다. 스위치가 없고 매끄러운 공간은 '심리스seamless'하고 유연한 현대적 공간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나이가 들어 시력이 감퇴했거나 새로운 걸 배우고 익히는데 서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은 절대 아니다. 어머니가 집들이 선물로 드린 가습기는 전원 버튼이 감춰져 있고, 리모컨이나 LED로만 상태를 조작하고 확인할 수 있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선 호수와 비밀번호를 차례로 가볍게 입력해야 한다. 가장 편안하다고 느껴야 할 '집'이라는 공간의 진입마저 어떤 난관이나 관문처럼 느껴지니 지레 불편할 수밖에 없다. 특히 할머니는 이사 후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계시는데, 혼자서 나갔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는 과정이 너무 두렵기 때문이다. 물론 고택에서는 벨을 누르면 수화기를 들어 문 열림 버튼을 눌러야 했고, 방을 데우기 위해선 장작불을 피워야하는 불편함이 존재했지만, 사용자의 의식적 개입 단계에서 발생하는 이 이음새는 누군가에겐 꼭 필요한 경험이다.

그러니 10여 년 전에 그 손녀가 공모하고 설계했던 ○○ ○○○는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에도 하나도 필요치 않다.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22주기인 지금, 장애인의 이동권은 여전히 보장되지 않았다. 나아진 게 정말 하나도 없다. 궁극적으로 비장애인 전문가와 장애인 사용자라는 구분이 희미해지기 위해선 관계를 장애/비장애의 구분에 묶지 않아야 한단 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리처드 사이토윅이 <공감각>이라는 책에서 쓰고, 이 책의 9장에서 인용한 아래 문장으로 독후감을 마무리 지을까 한다. "우리는 움벨트 안에서 나오려고 투쟁해야 한다. 움벨트는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라는 데미안을 각색한 문장과 함께.

"우리는 순진하게도 우리가 아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가정한다. 이 좁은 자기 참조적 현실이 우리의 움벨트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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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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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플래티넘 둥***룽 | 2023.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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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던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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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내**호 | 202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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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라는 인식론적 사고와 장애인이 마주하는 현실 모두 생각하게 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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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마니아 : 골드 테*****드 | 2022.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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