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북부의 황무지를 일컫는 ‘무어(moor)’라는 단어에는 누구든 시인이 되게 만드는, 시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다. 무어랜드의 거센 바람에 맞서며 보라빛 헤더(Heather) 꽃밭을 걷는 동안,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함께 말 달리던 환영과 자주 만나곤 하였다. --- p.9, 「프롤로그」 중에서
바지 주머니에서 조약돌 하나를 만지작거리다 탁자에 올려놓았다. 세인트비스 해변을 떠날 때 몇 개 주웠다며 팀스 씨가 방금 전 헤어질 때 선물로 쥐어준 것이다. 볼펜을 꺼내어 매끄러운 조약돌에 ‘TIMS’라고 썼다. 소중한 보물처럼 흰 종이에 싸서 배낭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은 첫날 세인트비스 해안에서 조약돌 하나를 주워 간직해둔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로빈후즈베이 앞바다에 멀리 던진다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묵직하게 가슴에 남는다.
“미스터 리, 이 조약돌이 당신을 저 멀리 로빈후즈베이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줄 겁니다.”
--- p.49, 「Day 1 에너데일 브리지」 중에서
어제까지와는 지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안에서는 매일 산을 하나씩 넘었고, 매일 호숫가를 지났다. 주변은 늘 산과 호수였다.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던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져서 이젠 사방 곳곳이 평평한 초원이다.
본디 바람이 거센 날이 아니었다. 제멋대로 설쳐대는 바람 물결을 막아설 것은 지평선 안에 무엇도 있지 않았다. 초원을 뒤덮은 잡초와 야생화들은 이깟 바람 따위 면역이 되었다는 눈치다. 대지에 바싹 붙어 아주 낮은 자세로 저들끼리 똘똘 뭉쳐 있다. 나무들은 어쩐 일인지 한 그루 두 그루씩 서로서로 먼 거리를 두고 외롭게 서 있다. 흔들리지 않으며 꼿꼿함을 유지하려 나름대로 애쓰는 모습들이다.
--- pp.111~112, 「Day 5 오턴」 중에서
멀리 앞서가던 부부가 마주오던 사람을 세워서 뭔가를 열심히 물어보고 있다. 지도를 사이에 두고 양 다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걸로 보아, 뭔가 착오가 있는 모양이다. 좀 이상하다고 느끼며 긴가민가 따라왔는데 역시나 길을 잘못 든 모양이다. 중간부터 어쩐지 미심쩍었지만 나로선 부부를 따라가는 게 최선이었다. 이 드넓은 광야에서 나 혼자 떨어져선 안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나 확인하는지 부부는 배낭을 내려놓고 지도 위에서 연신 머리를 맞대고 있다.
“미스터 리, 우리가 길을 잘못 들었다. 어느 방향인지 혹시 감이 안 잡히나?”
가까이 다가간 나에게 남편이 물어오지만 그들을 졸졸 따라오기만 했던 내가 알 턱이 없다. 도움이 될 만한 대답을 못 해주는 게 민망해졌다. --- pp.124~125, 「Day 6 커비스티븐」 중에서
조금 전까지도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비를 쏟아붓기 시작한다. 신성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는 꾸지람인지, 나인 스탠다즈를 떠나자마자부터였다. 산 정상이란 곳의 날씨는 늘 이런 식이다. 천방지축 변덕꾸러기인 것이다. 그보다는, 이곳이 영국임을 생각한다면 이런 비는 너무나 당연하고 영국스러운 현상이다. 영국인의 삶과 늘 함께해온 비를 나는 좀 더 반길 줄도 알고 익숙해지기도 해야겠다. 걷기 시작한 지 오늘로서 7일째, 첫날 오후 빼고는 이후 5일 연속, 걷는 도중에 비를 만난 적이 없다. 영국의 날씨는 그동안 나에게 너무나 관대했던 것이다. --- p.145, 「Day 7 켈드」 중에서
하루 30킬로미터 이상씩을 일주일 정도 걷다보면 몸에 슬슬 이상 신호가 오면서, 그동안 굳세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산 좋고 물 좋은 우리나라 금수강산이 있는데 멀리까지 돈 들이고 와서 이 무슨 고생인지, 아직도 3주일을 더 걸어야 하는데 과연 끝까지 갈 수나 있을지, 별의별 생각으로 자신감이 바닥에 이르는 시간에 이른다. 애초에 가졌던 고상한 목표, 낭만적인 상상들은 고된 현실 속에서 뭉게구름 되어 날아가 버리고, 나약해지는 몸과 마음만 남아간다. 그냥 돌아갈까, 말까, 오락가락의 심정으로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겨갈 때쯤, 길 왼편에 누군가 써놓은 큼지막한 낙서 한 줄에 눈길이 꽂힌다. 산토도밍고에서 그라뇽을 지나 벨로라도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서다.
‘그대 왜 걷는가?’ --- pp.169~170, 「Day 9 리치먼드」 중에서
아이리시 해를 바라보며 세인트비스를 떠난 지 15일째, 그동안 300킬로미터를 걸어왔고 로빈후즈베이까지 6킬로미터를 남겨두고 있다. 나도 모르게 걸음이 점점 더 느려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어서 빨리 북해 바다에 닿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까 리틀벡 숲을 걸으면서부터 왠지 아쉬워지기 시작했다.
오후 3시 반, 마지막 마을 하이호스커(High Hawsker)의 삼거리 펍에 눌러앉았다. 이 길이 곧 끝나는데,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이 길 위에서 가급적이면 시간을 좀 더 끌고 싶어졌다. 허기는 졌는데 점심이 당기지는 않는다. 좀 전에 아이들하고 나눠먹은 알사탕의 단맛 때문이리라. 생맥주 한 잔을 비우고 두 잔째를 시키면서 비프스테이크도 함께 주문했다.
‘천천히 먹어야지, 천천히.’
빨리 가서 북해 바다 절벽 위에 서는 것보다는, 이 길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는 게 지금은 더 중요해졌다.
「Day 15 호스커」 중에서
--- p.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