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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 맛이다

인생, 이 맛이다

: 차가운 맥주로 인생을 뜨겁게 달군 맥주광의 인생 예찬

고나무 | 해냄 | 2010년 09월 06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0 리뷰 1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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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9월 06일
쪽수, 무게, 크기 234쪽 | 402g | 153*224*20mm
ISBN13 9788973372621
ISBN10 897337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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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자, 이제 브루마스터 고가 양조를 시작합니다! 여러 번 읽어 너덜너덜해진 양조공학 참고서를 펴들고 엎드려 스탠드를 켰다. 건너편 흰 벽에서 추억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일곱 살 때 살던 허름한 단독 주택이다. 나무 바닥을 들어 올리면 연탄 화덕이 나오는 좁은 부엌에서 어머니는 처음으로 식빵에 도전했다. 화덕 위 식빵 틀을 쳐다보며 어머니의 눈은 얼마나 반짝였을까. 하필 그때 일곱 살 아들에게 줄 빵을 만들던 어머니가 떠올랐던 건, 빵과 맥주 둘 다 효모를 사용한다(어머니는 효모 대신 베이킹파우더를 쓰셨지만)는 과학적 이유는 아닌 것 같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이 빵을 만들다가 맥주를 발견했다는 빵과 맥주의 역사적 친화성 때문도 아니었다. 내 손으로 먹을 거리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준다는 설렘이었던 것 같다. 책을 뒤적이다 스탠드 불빛을 받으며 곯아떨어지기까지 채 10분이 안 걸렸다. 빵 만들기 전날 어머니도 나와 같았을까? ---2장 「망원동 브루어리를 열다」 중에서

출근 전에는 얼음을 대야에 넣고 선풍기 타이머를 맞춰놓고 현관을 나섰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발효가 잘되고 있을까? 얼음이 금방 녹으면 어떡하지?’란 조바심에 회사를 지나치기 일쑤였다. 발효통은 우렁각시였다. 나를 위해 밥을 해주기는커녕 항아리에서 잠만 자면서 시원하게 해달라는 까다로운 우렁각시. 나흘째부터 자다가도 불쑥불쑥 발효통에 귀를 댔다. 임신한 아내 배에 귀를 기울이는 남편이 이런 심정일 것 같다. 양조 참고서에는 발효가 잘 진행되면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돼 있던데, 내 발효 통은 왜 이렇게 조용할까? 효모가 뜨거운 서울 날씨를 못 이기고 태업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 일주일이 지났다. 발효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한달음에 퇴근해 발효통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1차 발효가 제대로 됐는지 점검하는 운명의 날이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3장 「맥주가 익어가는 시간」 중에서

와인형 인간들이 쓰는 말 중에 ‘테루아(terroir)’란 것이 있다. 와인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 토양 등의 특색을 가리킨다. 똑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지역마다 테루아가 다르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와인의 개성이 다르다고 유럽 사람들은 생각한다. 머나먼 영국 서포크의 맥아, 망원동의 땅, 햇빛, 공기와 내가 구입한 충북 제천시 청전동의 생수가 망원 브루어리 인디아 페일 에일의 테루아를 만든다. 브루마스터 고의 맥주를 마시면서 다들 한 시간 넘게 자기가 마셔봤던 맥주와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에 대한 추억을 말하느라 바빴고, 동료들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목젖을 드러내며 웃을 때마다 치아가 형광등 불빛에 반짝였다. ---4장 「조촐하고도 시끌벅적한 맥주 시음회」 중에서

‘무엇에 빠졌다’는 걸 영어로 ‘비 인투(be into)’라고 표현한다. 말하자면 대학 시절의 나는 무언가에 ‘인투’해 본 적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모험은 아니었지만 맥주를 만들면서 재밌었다. 여행을 하거나 어학 공부로 미래에 투자하면서 한 달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맥주 양조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다. 처음으로 뭔가에 ‘인투’해 본 것 같다. 그렇게 만든 맥주를 친구와 취재원에게 나눠주면서 즐거웠다. 내가 가진 걸 모두 건 한판 도박은 아니었지만 하우스 맥주 양조장에서 2주 넘게 일하면서 짜릿했다. ‘홀릭’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자신의 취미 같기만 바랄 게다. 세상이 음악처럼 신나고 리듬감 있었으면. 농구처럼 세상 사람들의 팀워크가 좋았으면. 번개처럼 짜릿했으면. 세상 모든 일이 맥주 만드는 일처럼 적당히 예측 가능하고 적당히 변수가 있어서 설레면서도 사랑만 쏟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낮으면 좋을 텐데. 9월 30일 오후 3시, 메가씨씨 문을 닫고 나오면서 이제 어디로 갈까 잠시 생각했다. 직접 만든 술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람들이 내가 만든 술을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는 사람들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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