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프게 이끌던 우울로부터
도망갈 궁리만 하던 그때,
뜻밖의 소풍이
잘 포장된 선물상자를
풀기 두려운 손길처럼
나를 부르고 있었다.
설렘과 망설임이
샴쌍둥이처럼
나를 흔들던
길지 않은 선택의 순간들이었다.
이국의 삶에 대한 막막함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년여의
긴 휴가와 긴 여행 사이,
무겁거나 가벼운 시간의 무덤
꿈꾸어 오던 달콤한 감옥
자바 섬 서부, 수도 자카르타에서
술탄이라는 이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풍,
선물,
설렘,
긴 여행,
가벼움,
달콤함,
나를 사육하던 우울과
내가 기르던 권태와
통증의 나날도 함께
가장 아끼던
자작나무 상자에 담았다.
거기,
바다의 본적이라 부르고 싶은
1만7천 개의 섬이 있다는,
검은 숲에서 천 년 잠에 든 물고기 화석이 있다는,
천 개의 문이 있는 장소에서
밤마다 귀신들의
축제가 벌어진다는,
바다에서 미술관을 만날 수 있다는,
매혹적으로 치장한 유혹이 부르는,
산골짜기 마을에서 몇백 년 동안
바다로의 항해를 꿈꾸며
이국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백 살도 넘은 늙은 목선들이
지금도
섬에서 섬으로 떠돈다는,
적도의 붉거나 분홍인 석양을 거의
매일 볼 수 있다는,
오래된 사원에서 여전히
신화의 뿌리를 키우고 있는
비밀의 섬을 만나게 되리라.
그 분명한 이유의 명분을
큰 가방에 구겨 넣고
먼 길을 날아서
그
곳
에
갔
다.
--- 프롤로그 중에서
스스로를 언어의 감옥에 유폐시키고
언어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충실한 시간들을 쌓았다.
때로는,
사육사가 되어 창밖의 세상을
소환하고 다시, 탈출시키며
하양 벽마다 푸른 물감을 칠했다.
현재와 미래가 과거와 공존하는 도시 자카르타.
도시는 거대한 밀림 속에 존재하는 듯
빌딩 불빛마저도 환상의 숲을 보여주었다.
낯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풍경이었으리라.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산문집
본업인 시인의 일탈은, 그래서
절박함을 핑계로 기꺼이 즐거웠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인니에서의 한 시절
계절 없는 시간들 속에서
이국인의 낯선 삶을 맘껏 누렸다.
깊은 골짜기 오두막 문패에 걸어 두고 간
아픈 나와… 슬픈 나를… 즐겨 찾던 식물원
아소카나무에 램프꽃송이로 달아 두고 왔다.
이제, 곧
작업실 ‘오후의 사과나무’에는 분홍 사과꽃 피어
나른한 생을 환하게 비춰 주리라.
어느 때, 불쑥
자카르타에서 즐겨갔던
미술관과 박물관 그리고 식물원과 카페를
찾아서 비행기를 타게 되리라.
그곳에서 만난 따뜻한 사람들과
슬픈 공주라는 이름의 식당, 발리룸에서 밥을 먹고
뒤뜰의 몽환적인 카페에서 우기의 빗소리와
재즈를 들으며 술잔에 스민 전설을 이야기하게 되리라.
내 안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생의 한가운데,
따스했던 날들의 자카르타여!
잠시,
안녕…
어느 날 ‘오후의 사과나무’에서 총총
--- 에필로그 중에서
슬픔이 펄럭이는 천개의 문을 찾아 떠나다
인니에 살게 되면서 가장 보고 싶었던 도시는 스마랑이다. 한글판 일간지에 짧게 소개된 ‘천 개의문’ 건물 사진을 본 후부터 스마랑을 향한 설렘과 간절함은 깊어갔다. 문이라는 단어가 주는 안과 밖의 막간. 열고 닫힘에 따라 변하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환경. 문이 주는 매력은 모양이나 색깔에 따라 그 느낌 또한 다르다. 천 개의 문은 슬픔의 문과 동의어로 다가왔다. 눈물에도 뿌리가 있다면, 라왕세우Lawang Sewu에는 여전히 눈물로 자라는 나무가 존재한다. --- p.15
비밀의 방, 308호 바다 여신의 처소가 있다
인니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인니인들은 현재 믿고 있는 종교가 있음에도 많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건 그들의 토속신앙이라는 것이다. 어떤 도시는 토속신앙을 나라에서 인정하기까지 했다.
인니 바다의 어느 곳이든 바다의 여신으로 불리는 초록공주의 존재가 있다고 한다. 1만7천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바다의 나라답게, 바다 여신의 이야기는 이 나라 해변 어느 곳에나 있다. 이곳 해변이 초록공주의 전설이 가장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시작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 p.39
종교보다 깊은 토속 신앙의 힘
모국을 버리고 죽음을 무릅쓴 긴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이 또라자. 그들은 바다로부터 아주 먼 곳인 산속으로 타고 온 배를 끌고 왔다. 떠나온 모국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염원이었으리라. 배를 보면서 향수를 달래고 배의 제작법을 잊지 않으려고 똥꼬난Tongkonan이라 불리는 배 모양 지붕을 얹어 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똥고난은 대나무로 만들었다. 지금은 지붕만 양철을 얹는다. 천 년이 넘은 똥꼬난도 형체는 그대로 남아 지붕에는 풀들이 무성하지만, 현재도 사용이 가능하다. --- p.83
따르라뜨리의 생애
누구나 죽음을 떠올리면 철학자가 된다. 삶의 경계 저 너머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상. 그렇게
위안하면서 운명이란 이름으로 맞이하는 일. 인니의 술라웨시 섬 따나 또라자에서 만나는 죽음은 조금 다르다. 또라자에는 죽음이 자유롭게 지천으로 널려 있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없는 곳. 의식 속에 깊게 자리한 죽음에 관한 생각을 밀쳐내 새로운 의미로 죽음의 형식을 보게 된다. --- p.97
층층 지붕마다 흐르는 여신의 노래를 듣다
발리Bali는 세계적인 휴양지로 알려진 이름이다. 그러나 발리가 인도네시아 안에 있는 섬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발리는 자바섬과 롬복섬 사이에 있다. 발리의 수도는 덴파사르Denpasar이다. 넓이는 5,808.8Km이다. 언어는 발리어와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한다. 발리족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힌두교 사원은 푸라Pura이고, 모스크가 많은 인니의 다른 지역과 달리 발리 섬에는 푸라가 많다. 발리 최대의 축제는 내피데이Nyepi day라 불리는 침묵의 날이다. 이날은 불을 켜거
나, 음악을 듣거나 티브이도 볼 수 없다. 차와 비행기의 운행도 금지된다. 발리섬 전체가 침묵하는 날이다.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적용된다. 나도 꼭 한 번은 네피데이에 발리섬을 찾고 싶다. 이외에도 독특한 장례식 문화가 있다. 신체를 화장하는 것으로 응아벤Ngaben이라고 한다. 발리섬은 바다와 산을 모두 즐길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섬으로 매력적인 곳이다. --- p.131
마침내, 드디어, 기어이, 떠나다
인니 지도를 펼쳐 놓으면 길쭉한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살고 있는 자바 섬의 3배가 넘는 수마트라 섬.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 섬 대부분이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다. 천 년 전부터 검은 후추의 원산지로 주목받았다. 인니에서 두 번째 인구가 많은 곳. 오래전 서구열강들의 교통 요충지 역할을 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또바 호수가 있으며, 인니 커피의 최대 생산지다. 섬 북단 아체에서 남단 람풍 연결고속도로가 2025년을 완공 목표로 진행 중이다. 장기적으로 아시아 하이웨이 네트워크와도 연결된다니, 기대가 크다.
--- p.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