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전 대다수 야구 전문가는 OB의 전력을 중렷舅㎟퓽막?예상했다. 다른 팀이라면 코치를 할 나이의 윤동균, 김우열 등 베테랑에 무명의 젊은 선수들로만 팀이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OB는 1982년 3월 28일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MBC와 개막전에서 9-2로 승리를 거두며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다. 마운드에서는 에이스 박철순이 2실점 완투했고, 타선에서는 신경식, 양세종의 백투백 홈런을 포함한 홈런 3개를 비롯 장단 11안타를 터뜨리며 MBC 마운드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5월 12일, 1위에 오른 뒤 단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고 쾌속 질주한 끝에 29승 11패로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전기리그 18승 1패를 비롯해 이해 22연승을 기록한 에이스 박철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미국 마이너리그에서의 경험과 강력한 속구와 다양한 변화구 구사는 상대 타자를 농락하기 충분했다. 또한, 투타에서 신구 조화가 이루어지면서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끈기와 뚝심이 발휘되었다. 이것은 후기리그 우승팀 삼성과 벌인 한국시리즈에서도 잘 나타났다. 에이스 박철순이 허리 부상으로 정상적인 등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맞이한 1차전에서 무명의 잠수함 투수 강철원이 9이닝 3실점 하는 호투를 펼쳤고, 선우대영도 6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삼성의 삼두마차 권영호-황규봉-이선희를 상대로 숨 막히는 연장 15회 무승부를 펼친 것. 전력 열세 속에 뜻밖의 무승부를 기록한 OB 선수단은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졌고, 이는 2차전 패배 후 3차전부터 4연승을 거두며 프로야구 원년 챔피언이라는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밑거름이 되었다. OB가 전문가들의 예상을 비웃으며 원년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창단 멤버로 우승에 일조한 김광수 고양 원더스 수석코치는 “두산그룹의 모토처럼 인화(人和) 단결한 결과”라고 밝혔다. ---p.14~15
이는 해태 특유의 끈끈하고 강인한 팀 분위기로 이어졌다. 유승안 감독은 “해태 선수들은 초반에 밀리더라도 ‘우리가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면 빙그레에 있을 때 보면 초반에 앞서도 선수들이 먼저 불안해했고, 나중에 가면 그게 현실로 나타났다. 그 차이가 한국시리즈에서 두 팀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차이였다고 본다.” 빙그레 에이스 한희민을 상대한 1988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해태가 1회초 먼저 4점을 내주고도 끝내 6-5로 역전승한데는 이런 분위기 차이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하나. 다소 역설적이지만 해태가 ‘짠돌이 구단’이었던 것도 한국시리즈에서 선수들이 힘을 발휘한 원동력이었다. 김성한 전 KIA 감독의 말처럼 “연봉에 대한 개념이 ‘처음부터 안 주겠다’는 생각으로 버티는 곳”이던 해태에서 그나마 선수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한국시리즈 우승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 김응룡 감독은 최근 한 인터뷰에서 “연봉이 워낙 짜다 보니 선수들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통해 보너스를 받으려는 열망이 컸다”고 회고했다. 유승안 감독은 “같은 보너스 천만 원이라도 해태에서 주는 천만 원과 빙그레가 주는 천만 원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며 이렇게 말했다.
“좀 과장하면 해태 선수들은 그 천만 원을 1억쯤으로 보는 반면에, 삼성이나 빙그레 선수들은 백만 원 쯤으로 봤다고 보면 된다. 해태 선수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보너스를 반드시 받아내겠다’는 생각으로 필사적이었던 반면에, 다른 팀에선 ‘받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여겼다고나 할까.”
이 때문일까. 한국시리즈에서 천하무적이던 해태는 의외로 준플레이오프나 플레이오프 같은 ‘작은’ 무대에서는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1990년, 1992년 플레이오프에서는 각각 삼성과 롯데에 패하면서 탈락했고, 1994년에도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2연패로 패퇴했다.---p.101~102
한국야구의 전설 최동원의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84년부터다. 이해 27승 13패 6세이브를 올렸으며 후기리그에서는 18승 6패 5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이 거둔 29승 가운데 23승을 책임지는 대활약을 펼쳤다. 한국 프로야구사 최대 오점인 「져주기 경기」로 성사된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최동원은 5경기에 등판하는 투혼을 발휘했으며, 4승 1패를 올려 롯데를 첫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최동원과 롯데는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나온 ‘공포의 1할 타자’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역대 최고의 명승부를 연출했다.
1985년에도 변함없는 위용을 뽐내며 20승을 거둔 최동원은 1986년에도 OB와 시즌 최종전에서 3-1로 앞서 3년 연속 20승이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9회말 김형석에게 동점 2점 홈런므 허용한 데 이어 신경식의 3루타와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줘 19승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7년까지 5년 연속 200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철완을 자랑했다.
최동원과 해태 선동열과의 맞대결은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전설 간의 맞대결이다. 1986년 4월 19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첫 번째 맞대결에서는 0-1로 최동원이 패했지만 그해 8월 19일에 펼쳐진 두 번째 대결에서 2-0 완봉승을 거두며 멋지게 설욕했다. 그리고 1987년 5월 16일에는 두 투수 모두 연장 15회까지 던지며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신구(新舊) 에이스의 맞대결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사이좋게 1승 1무 1패를 나눠 가졌다.---p.195~196
1997년 11월 21일 오후 10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은 “일단 유동성 조절 자금 200억 달러 이상을 국제통화기금(IMF)에 요청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경제가 IMF 구제 금용 체제에 편입했고, 모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던 한국 프로야구도 심한 몸살을 앓았다. 1998년 국민소득이 8년 전 수준(1인당 6천5백 달러)으로 떨어지며 야구장을 찾는 관중도 격감했다. 전년도보다 130만여 명이 감소한 292만9,572명에 그쳤다.
프로야구에 불어닥친 IMF 한파는 동등하지 않았다. 재벌 구단인 삼성, 현대, LG 등은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로 전력 상승을 꾀했지만 모기업의 재정 상태가 빈약한 쌍방울, 해태 등은 벌거숭이로 시베리아 벌판에 내몰렸다. 특히 쌍방울의 상황은 심각했다. 1997년 11월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가 열렸지만 12만 달러가 아쉬워서 포기했으며, 오히려 ‘안방마님’ 박경완을 9억 원에 현대로 현금 트레이드하기까지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듬해인 1998년 7월 31일에는 소방수 조규제를 6억 원에 역시 현대로 현금 트레이드했다. 시즌이 끝난 후인 12월 25일에는 김기태와 김현욱을 삼성으로 넘기며 20억 원을 받았다. 구단이 심각한 재정난에 휩싸이자 선수를 팔아 연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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