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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노트

악어 노트

구묘진 저 / 방철환 | 움직씨 | 2019년 05월 2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0 리뷰 20건 | 판매지수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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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5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364쪽 | 358g | 122*188*30mm
ISBN13 9791195762477
ISBN10 119576247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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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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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 20일, 교무처 행정실 창구에서 대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장이 너무 커서 두 손으로 집어 들고 교정을 나서다 두 번이나 떨어뜨렸다. 한 번은 길가의 진흙탕에 처박아서 옷자락으로 닦았고, 또 한 번은 바람에 날려가 좀 미안한 마음으로 멋쩍게 쫓아갔다. 졸업장의 네 귀퉁이가 모두 접혔다. 꾹 참아도 웃음이 나와 남몰래 웃었다.
“너 말이야. 오는 길에 재밌을 만한 장난감 좀 갖고 올래?”
악어가 말했다.
“물론. 내가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속옷이면 족하겠지.”
다자이 오사무가 말했다.
“나는 네게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화구 상자를 선물하려고. 괜찮겠니?”
미시마 유키오가 말했다.
“나는 내 와세다 대학 졸업장을 백 장 복사해서 네 화장실에 붙여 놨어.”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연주하자.
--- p.16

만약 베스트셀러도 못되고, 진지하지도 못할 바에는 놀라게 할 수밖에. 한 글자에 5각(角, 20원). 이건 졸업장과 글쓰기에 관한 일이다.
--- p.16

예전에 나는 모든 남자들이 살아가면서 마음속 깊이 저마다 여성에 대한 ‘원형 原型’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 원형을 닮은 여성일 것이라고. 그런데 나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나의 내면 깊이에 자리한 원형도 여성에 관한 것이었다. 내게 원형이란 마치 차갑게 얼어붙은 높은 산의 정상에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피어오르는 가장 아름다운 환상 같은 것이다. 그 고고한 환상은 차츰 나의 현실로 스며들었으며 또한 특별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인 내 인생 최고의 아름다운 원형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사 년 동안 믿어 왔다. 오직 이것만을 믿으며 가장 용감하고 가장 성실했던 대학 시절의 삶을 전부 써 버렸다.
--- p.18

음경 대 질, 가슴 털 대 유방, 수염 대 긴 머리. 음경과 가슴 털과 수염은 양으로 규정짓고, 질과 유방과 긴 머리는 음으로 규정지어 양이 음으로 들어가 자물쇠를 열면 빙고! 아이가 나오는 것이다. 무조건 빙고 소리가 들려야만 바둑판을 완성할 수 있으며, 이외에는 양이든 음이든 다 무성으로 간주해‘아웃사이더’라는 찬 바다로 던져 버린다. 더 넓게는 ‘주변인’ 취급을 한다. 사람이 받는 가장 큰 고통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잘못된 대우에서 오는 것이다.
--- p.74

중국시보中國時報에 이런 기사가 게재되었다. ‘타이완은 앞으로 악어 보호 조치를 채택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악어는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대체 악어가 무엇이냐고 편지로 문의했다. 그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악어를 본 적이 없었다.
--- p.78

누가 알겠나? 사람들은 악어를 못 알아본다. 중학생과 고등학생은 악어 뉴스의 충실한 관중이다. 그들은 학원에서 돌아와 마침 저녁을 먹으면서 한편으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만 방송 뉴스 보도臺視新聞世界報導’를 본다. 가장 냉담한 연령층인 대학생들은 악어와 관계가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신문이나 뉴스 상의 관련 보도들과 거리를 두는 자세로 바뀌었다. 한 여론 조사 기관에서 악어가 이 그룹에 가장 많이 혼재해 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 p.87

어느 날 악어는 꿈을 꿨다.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어울려 놀러 가는 꿈이었다. 어쩌면 남몰래 어떤 결혼정보회사에 자신의 개인 신상 카드를 보낸 뒤, 그 회사에서 주선하는 짝짓기 활동에 참여한 것일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가 가입한 해안구조협회의 행사로서 구조된 사람들이 구조원들과의 만남을 요청함에 따른 사회 활동인지도 몰랐다.
악어는 전날 저녁 초콜릿, 새우깡, 꿀 조림, 사탕, 콜라, 트럼프 카드, 보드게임, MP3, 사진기, 그의 빨간색 수영복, 커다란 봉지의 뻥튀기까지 완벽하게 준비했다. 다음 날 악어는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정류장에서 한 무리의 남녀와 합류했다. 악어는 그들이 등을 돌려 희희낙락하며 깊숙이 감추어 뒀던 입을 내밀고 깔깔대는 소리(혹은 호호, 혹은 후후, 혹은 하하, 도대체 정확히 들리지 않는 웃음소리)를 들었으며 악어가 이렇게 인간 곁에 가까이 있어 본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 p.101

악어가 어려서부터 클 때까지 몰래 사랑했던 대상을 모두 합해 본다면 대충 한 트럭쯤 될까, 그렇게 많은 사람을 좋아했다. 그러니까 악어는 행운의 돼지가 모는 트럭의 기사 같은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동창생에서부터 구취가 심했던 만화방 주인, 완구점 여인, 저녁이면 땀에 전 셔츠를 입고 쓰레기를 수거하는 ‘에효’ 젊은이까지 있었고, 치과 의사만도 셋이나 됐다.
--- p.152

악어는 실직하고 밖에서 이리저리 배회하던 중에 정류장의 공중전화 옆에서 ‘증정’이라고 인쇄된 한 무더기의 악어 노트를 발견했다. 발행처는 ‘기독교의 빛’. 악어는 너무나 무서웠다. 어떻게 이렇게 기독교마저 그를 경계할까? 그는 내심 기뻐하면서 빨간색 볼펜을 꺼내 들었다. 앞부분 여섯 항목을 모두 굵게 밑줄을 긋고, 마지막 항 앞에는 크게 표식을 그려 빨간 선으로 가장자리까지 연결한 뒤 글을 남겼다. ‘백 퍼센트 정확함. ― 기독교도 가끔은 잘못을 해도 되는군요.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 p.168

‘악어 열풍’은 금세기에 가장 밀도 높은 관심사이자 특집 시간이 가장 긴 뉴스로서 사람들이 품은 뉴스에 대한 갈망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처럼 하늘과 땅 사이 꼼꼼한 그물망 같은 감시(악어 상표의 총판은 한 마리당 백만 원의 현상금을 악어 잡는 사람에게 걸었음) 때문에 악어는 어쩔 수 없이 일을 접고, 잠시 집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저축해 놓은 돈으로 살아갔다. 자기가 아무 이유 없이 전국 최고로 환영받는 인물로 뛰어오른 것을 생각하면, 전 국민이 계속 악어 찾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잠시 숨어 있는 불편을 참는 것도 영광이라고 느꼈다. 오죽하면 대통령조차 취임식 연설 중 마지막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 ‘국민 여러분께서 미래에는 악어를 좋아하듯 저를 좋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 p.203

소집령 : 여러 곳에 있는 친애하는 악어 여러분 주목해 주십시오. 다음 집회 시간은 12월 24일 밤 12시. 장소는 악어 주점 100호실, 가명 성탄 무도회가 열립니다. - 악어 클럽 올림
악어는 그 소집령을 보고 난 후, 너무 흥분해서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 외에 다른 악어들이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하물며 이미 클럽까지 조성되어 있다니! 그렇다면 그는 갈 곳이 있고, 누군가와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것일까? 악어는 감격해서 커다란 눈물방울을 흘리면서 두꺼운 솜이불의 네 모서리를 빨았다.
--- p.205

나는 유럽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수령이 나중에 나에게로 와서 의지할 수 있도록 기다리겠다고. 그때 수령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여러 피부색의 아이들을 데려와도 된다. 예전에 그가 여러 피부색 아이를 하나씩 낳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수령은 미소를 지으면서 잠들었다. 꼭 빨간 사과처럼 보인다. 이따금 선잠을 깨면, 내 손을 끌어 잡고, 어린아이처럼 떠나지 않는다고 약속해 달라며 중얼거렸다.
--- p.258

법률학자들이 설명하길, 우리나라의 오천 년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고 사회 제도를 굳건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마땅히 사전에 근로 기준법, 재산법, 혼인법 등을 수정해야 한다고 했다. 악어 족의 직업 범위를 특정 관광업과 서비스업으로 제한해 복무하도록 하고, 대신 비교적 무거운 세금을 공제해 줌으로써 아무런 제약 없이 악어의 사회적 자원이 점차 세력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악어는 인간과 결혼할 수 없으며, 악어끼리도 서로 결혼하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 p.299

나는 몽생의 주머니에서 백 위안을 훔쳐 학교 후문으로 달렸다. 후문은 잠겨 있었다. 나는 요란스럽게 벽돌 담장을 기어올랐고, 깨진 유리 조각을 박아 놓은 담장 꼭대기를 넘어가면서 손바닥을 베었다. 내가 담장 위로 올랐을 때, 마침 보름달이 떴다. 트뤼포가 만든 영화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소년이 감옥을 탈출한 뒤 바다로 갔을 때, 얼굴에 특별히 떠오른 표정이 있다.
---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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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미래적인 소설”
- 뉴욕 타임즈
“글쓰기는 죽음을 배우는 것,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가장 높은 곳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욕망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욕망이 아니다. 이는 자살과는 다르다. 구묘진 작가의 학교 친구가 그의 자살을 알려 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무척 인상 깊게 기억한다. 이 또한 그의 미학임을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죽음을 선택한 것 또한 창작이다. 구묘진은 죽음 속의 삶, 죽음 후의 삶을 창작해 냈다.”
- 엘렌 식수 (프랑스 포스트 페미니즘 철학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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