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2년 08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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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9408쪽 | 11790g | 128*187*80mm |
ISBN13 | 9788960532403 |
ISBN10 | 8960532401 |
발행일 | 2012년 08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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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9408쪽 | 11790g | 128*187*80mm |
ISBN13 | 9788960532403 |
ISBN10 | 8960532401 |
토지 1권을 처음 읽던 때가 기억난다. 식탁에 앉아 엄마와 얘기하며 읽던 나는 흥미롭게 읽다 이내 책을 덮었고 다 읽지 못한 채 책을 반납했다. 반납하며 왜 토지 1권에서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조금 했었다. 그런 내가 20권의 책을 완독했다는 것에 스스로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읽다만 책은 더이상 손이 가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토지는 다시 읽고 싶었고 그렇게 재대출한 것이 21년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다시 읽는 토지는 처음 읽을 때보다 더 재미있었고 강력한 흡인력에 집중해서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장을 읽고 있었다.
강렬한 서문으로부터 20권의 마지막 장까지, 한 권 한 권에 영겁의 시간이 들어있는 토지는 등장하는 약 700명의 생을 통해 삶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삶과 생활 방식을 담아냈다.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진주, 평사리 등 우리 항토와 천혜의 자연에 대한 묘사는 모든 것이 그 자리 그대로에 있었던 시절의 자연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토지는 이미 한국 문학에서 손 꼽히는 책이지만, 완독한 후 왜 20세기 한국의 대하소설 중 최고라 불리우는지 절감했다. 한국의 풍토와 아름다운 우리 언어의 향연으로 어우러진 토지는 한국인의 필독서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한 권 한 권 완독할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토지는 주요 인물을 포함해 약 700명의 인물이 나오는데,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 인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한 토지 속 인물은 마냥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입체적인 면을 모두 지니고있다. 도의적 이성에 있어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사리에 밝은 인물이 절망을 경험한 후 자신의 깊은 도덕적 신념에 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인간상을 깊이 이해하고 글을 적어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
인물들의 고뇌와 사유에서 나의 생을 돌아본다. 그들 개개의 삶이 모이고 모여 인간의 삶이 되고 우리 민족의 삶이 된다. 토지에서의 인간의 탐구는 그 어느 책보다 우리 민족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恨’은 19세기 많은 애환을 겪은 우리 민족 고유의 특성일 것이다. 그 ‘恨’을 통감하고 겪는 인물을 보며 나는 21세기에 사는 나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며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던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恨’이란 얼마나 사무치도록 깊은 것인가.
우리가 배우는 한국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마치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일처럼, 아주 먼 얘기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토지는 격동의 시대 당대를 살아가는 인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들의 사유와 대사를 통해 그 어느 매체보다 생생하게 유구한 역사를 서술한다. 책을 읽는 동안의 나는 마치 당대를 살아가는 인물1처럼, 이미 일어나게 될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희로애락을 겪으며 분노하고, 비탄에 빠진다. 이러한 몰입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에 20권 내내 감탄했다.
또한 토지에서는 사랑, 우정, 가족, 돈 등 인생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주요 가치에 대한 대목이 등장한다. 조준구와 김두수의 탐욕, 양현과 영광의 사랑, 남희와 석이네의 관계, 김강쇠와 송관수의 우정, 김환과의 의리 등
각각의 대목은 비극적이기도 희극적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삶임을 나는 안다. 그들의 삶에서 나의 모습을 투영하여 성찰해본다. 과연 나의 삶은 어떤 모습일지, 어떤 가치 아래에서 살아가는지.
월선과 용의 사랑에 대한 대목은 읽는 내내 애처로운 감정을 피어냈고 월선이 죽는 장면에서는 마치 섬광처럼 폭발하여 눈물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한없이 사랑을 할애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저자는 알고있었던 것 같다. 묵묵히 발산하는 사랑 또한 깊은 사랑임을.
양현과 영광의 사랑은 비극적이지만 그들의 만남은 어느 때보다 낭만적인 장면으로 느껴진다. 전시 상황에서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비극과 낭만, 그 모순은 우리 삶은 역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또한 토지가 좋은 점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주인공부터가 서희이기 때문에 불가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는 시대적 배경을 봤을 때 아주 대단한 작품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는 여성들의 이야기.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마냥 먼 얘기 같지 않다. 아직까지도 잔재해 있는 가부장적인 분위기는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숨을 막히게 하는가. 토지는 당대를 살아간 여성 작가로서 여성들의 목소리를 누구보다 잘 담아냈다. 추악한 욕망으로 점철된 남성에게 전리품으로 여겨지는 명희, 오직 결혼만이 순리였던 시대, 신념 앞에서 사랑을 포기해야만 했던 인실, 누구보다 현명하고 이성적인 서희..
그 시절 문학이 쉽게 범하는 미소지니적 표현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심지어 여성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부조리를 느끼지 못한 채 미소지니적 표현이 담긴 작품을 그려내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당시 우리 민족이 겪는 수난과 현실을 이토록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은 아마 많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몇 권에 걸쳐 경술국치부터 마지막 해방까지, 그 시대를 살아온 장본인으로서 박경리는 우리 민족이 감내해야했던 수모와 아픔을 그려냈다. 이들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 민족의 이야기이다. 파도가 치듯 강렬한 감정의 격동을 자아내는 토지는 아주 뛰어난 소설이며 한국문학이자 역사이다.
소용돌이치는 그들의 인생을 보며 나만 이런 것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기도한다. 그들의 번민은 시간을 거슬러 지금의 내가 겪는 번민과 유사하다. 토지는 우리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것이리라.
아름다운 우리 민족의 생, 우리의 아픈 역사, 희로애락의 삶, ‘恨’,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기원인 땅, 토지.
토지는 우리 민족 그 자체이다.
토지를 12권까지 읽었다. 정말 대하소설 맞다.
소설의 길이도 길이려니와 많은 사람들의 삶이 흘러가는 그 장대함이라고 할까? 자연스러움이라고 할까? 소설이라 뭔가 꾸밀법도 한데, 감정의 기복을 차단하며 그냥 그렇게 큰 강줄기 처럼 흘러가는 세월과 인생을 그린다.
무슨말인고 하니, 어떤 이야기에 빠져들어 막 흥분을 할라치면 그 이야기는 건너뛰고 다른 인물로 가서 가라앉히고, 그렇게 한참을 돌다가 다시 그이야기로 돌아가지만 아까 내가 흥분해서 보던 그때가 아니라 좀 지난 뒤 결과가 나온 뒤다. 드라마나 다른 소설을 보면 시시각각 땀을 쥐게하고 그에 빠져들게 만드는데, 이 소설은 그렇게 만들다가 너무 빠질것 같다 싶으면 바로 거기서 멈추어 버린다. 물방울 하나하나 아주 가까이 비추다가도 멀리 떨어져서 큰 강물을 바라보듯.
다 그런거 아니겠는가? 동물이나 인간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생명이 고통을 당하거나 죽어가는 것을 보면 그것에 몰입하게 되고 막 가슴아프고, 도와주고 싶고 그러다가도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이내 곧 잊고 일상의 감정으로 돌아간다. 가까이서 보면 하나하나 사연 없는 것이 없고, 치열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멀리서 보면 그냥 지구는 그대로 흘러가는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늘 가까이서 그 감정에 빠져 흥분한 상태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얘기하는 듯 작가는 이야기를 그렇게 전개한다.
사실 처음에는 그 사건 하나하나에 빠져들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실제 인생이 그렇듯 그 이야기 하나 하나가 큰 물줄기의 하나이며 너무나 금방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일깨운다.
세월은 빠르기만 하더라, 여느 소설과 달리 이 소설에서 내가 마음 졸이던 인생들은 이미 많이들 가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때 그때 그 사람에 그렇게 몰입했는데, 그 사람은 죽고 없다. 멀어지고 없다.
너무나 짧게 지나가버리는 우리 삶을 그대로 투영하는 듯 해 그것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아등바등 치열하게들 사는데 그렇게 금방 시간은 지나 아이가 청년이 되고, 그 청년은 또 금방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어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역사는 흘러왔고 우리는 흘러간다.
짧게는 몇백년 길게는 수천년을 이어온 우리네 생활양식, 풍습도 그렇게 금방 변하더라.
19세기 후반까지 반상의 엄격한 구분하에 완전한 조선에서 살고 자란 그들도, 20세기 초 몇년 지나지도 않았는데 상것과 양반의 경계가 사라져가고, 서양 의사가 등장하고, 성악가도 등장하고, 집도 바뀌고 커피도 마시더라.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미 1920년대 사람들이 그렇게 커피도 마시고 서양 문학도 읽고 한다는 것을. 사람은 그렇게들 빨리 적응하고 변해가더라. 우리 땅에 일본인들이 그렇게 많이 와서 장사도 하고 섞여살았다는 것도 그렇고, 또 지금은 그네들은 다 가버리고 없지않은가.
정말로 급격한 변화 격동.
우리의 20세기는 격동이라고 말하는게 딱 맞지 않을까? 20세기 내내 이루어진 격동의 흐름.
이 소설이 내가 여태껏 읽은 다른 소설들과 또 구별되는 것은, 권선징악 혹은 선/악에 대한 접근이 내가 여태껏 봐온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이 결론이 쉽게 나지 않는다. 나쁜사람이 당하고 착한사람이 잘살거나 혹은 그 반대로 치열한 공방 끝에 결론이 나는 것이 보통인데, 그렇지가 않다.
나쁜사람은 나쁜사람대로, 착한 사람은 또 그대로 살아간다. 응징이 확실하게 되지 않더라. 착하다고 잘살지도 않더라. 악하다고 말로가 다 나쁘지도 않더라. 이게 진짜 우리 모습 아닌가?
정의가 승리하나?
그건 대체 어디서 나온 말이더냐, 나쁜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기에 우리가 아직도 그렇게 나쁜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는게 아닐까? 그들이 나쁜놈으로 밝혀지고 나면 다 그자리에서 폭삭 망하거나 죽나? 그렇지 않더라.
착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다 행복하던가? 그렇지 않다는 것, 힘들게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세월이 그렇게 빠른 듯 한데, 어떻게 보면 그렇게 빨리 가부가 결정나지 않더라. 그렇게 빨리 빨리 운동경기 승부 나듯 승패가 결정되지 않더라. 그것이 또 인생이더라.
이렇든 저렇든 다 큰 세월의 물줄기 속에 서로 부딪히고 부대끼며 흘러간다.
소설을 읽으며 느낀 단어들에 대해 또 얘기해보자.
우리 어릴적 비디오를 볼때마다 앞에 나왔던 공익광고속 멘트.
조선시대에는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를 무서워 하였다. 뭐 이런식이었던,
그런데 난 호환이 뭔지 사실 잘 몰랐다. 마마는 천연두라는 전염병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호환은 몰랐다.
그런데 호환이란 말이 책에 자주 등장하기에 찾아봤다. 보니, 호랑이로 부터 입는 모든 화를 호환이라고 하더라. 호환이 정말 무서웠을 것이다. 정말로 산에 호랑이가 있는 시대에 살았다고 하면 ㅠ.ㅠ
휴 지금이야 인간 외에 살수 있는 것이 이 땅에 없다보니 인간만 무서워 하면 되는데, 호랑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호환을 입은 사람이 많다보니 그 말도 그렇게 생긴것 아니었을까?
요즘 시대 인간에게 해가되면 무엇이든 나쁜 것이 된다. 단어로 뭐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해가되는 곤충은 해충, 멧돼지 이런것들도 농작물 먹는다고 해가된다 하고, 새도 해조라고 하나? 과일 파먹는다고? 한마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지구다. 인간 외의 것은 모두 해가된다. 그들은 그냥 삶을 영위하는 것일 뿐임에도.
만약 호랑이가 지금까지 우리 산에 있었다면 다 쏴죽였겠지? 이건 뭐 인간이 이룬것을 망치고 좀 뺏어 먹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먹어버리는 괴물이니. 우리시대의 가장 해로운 동물 1위가 될뻔한 호랑이가, 이제는 이 인간 세상에 더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인간이 만든 감옥속에서 유배된 채 왕으로 치켜세워지며 멋진 동물이라는 말만 듣는 사실이 아이러니 하다.
그리고 또 많이 나오는 말. '이애' 이다. 우리 삶속에 줄임말이 많은데, 우리가 '얘, 너어디 갔다왔니?' 이런식으로 사람을 부를 때 쓰는 호칭 얘가 이애에서 줄여진 듯 하다.
요즘은 싸움터의 장수 '무사'만 남아 많이 쓰이는데, 무사와 대변되는 '문사'라는 말도 많이 쓴듯 하고, 하긴 조선시대 양반도 문반과 무반 둘이 합쳐 양반아니겠는가?
'일용'이라는 단어도 나온다. '일용'이라는 말은 어릴적 다닌 교회 때문에 잘 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교회에서 믿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기도하면서 하는 말이다.
'일용'을 찾아보니 하루 쓰거나 먹고 생활하는 것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창조주에게 하루 먹고 살 양식을 주었다고 감사하는 것인데, 옛날엔 정말 하루 먹을 음식이 없어 죽는 사람도 많고 어렵게 그야말로 어렵게 생명을 잇는것이 목적인 삶을 그네들이 살았다는 것이 참 마음아프고, 고작 일용할 양식을 주었다고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에게 감사하는 것이 짜증난다.
물론 마음에서 우러나서 그런 선한 마음을 가지고 그런 작은 음식하나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그 자신에게 좋은 것이지만, 그걸 기도문으로 까지 만들어서 외우게 하는 그 종교의 뻔뻔함에 거북스럽다.
인간도 자식을 낳으면 잘먹이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어려워서 잘먹이고 잘입히지 못한것을 죄스럽게 살아가는 부모가 그렇게 많은데, 정말 신이 있어 인간을 만들었다면 그리고 그 신이 절대적이고 자비로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하루먹을 음식을 감사해할 정도로 어려운 삶을 안겨야 했을까? 그리고 그 음식 주었다고 감사를 듣기가 낯뜨겁지 않았을까? 그렇게 감사하도록 그 신이 시켰다면 정말 메마른, 감정없는 인정머리 없는 신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 종교를 만들어내고 지금까지 퍼뜨리고 세뇌시키는 그 인간이 악한 것이고.
결국 악한것은 인간이지. 속이는 것도 인간이고 속는것도 인간이다. 그래서, 그 둘을 같은 인간이라 치부하고 다 똑같다고 하고 넘어가야 할까?
그래서 그렇게 그런 베린 인간이니 막살아도 될까?
주저리 주저리 말이 길어졌네.
토지 - 박경리♡
나는 어릴 적부터 토지 책을 읽어보고 싶었던 책~
드디어 토지 책을 소장하게 되었다.
휴식을 취할때마다 토지랑 함께 하고 싶은 내 마음^^
박경리 책은 넘 재미있는 것 같다.
토지의 매력은 인물이 많다는 것, 살 때부터 인물사전이랑 같이 읽으면서 독서를 하니까
나름 읽는 속도도 빨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