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과 관련되는 서양의 격언 중에 “그 사람이 먹는 음식을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음식에는 그 음식을 즐겨 먹는 사람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음식이 인문학적 고찰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생각을 서울의 음식에 적용하면, 서울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살피면 서울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p.15
냉면, 중화요리와 함께 설렁탕도 배달음식 중에 하나로 1920~30년대 근대잡지에 자주 등장한다. 모락모락 김을 내는 배달부의 설렁탕은 종로통에 사는 양반들 집으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설렁탕을 받아들고 허연 국물을 휘휘 저어 한 방울 남김없이 해치우는 그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어찌 배달뿐이었겠는가. 초롱을 든 상노를 앞세워 설렁탕집으로 들어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알아 주지도 않는 양반 체면이 뭐 대수인고 하며 혼자서 설렁탕집을 찾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서민들의 설렁탕이 위로 퍼져 나간다. ---p.30
농촌 인구의 서울 유입은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다. 농촌 경제 구조의 변화에 따라 땅을 얻지 못한 소작농이 많아졌고,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이주한 것이라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조선의 농촌 사정이 일제강점기 때보다 나았다고 볼 근거가 별로 없으므로 일제 때 서울로의 이주가 조선에서보다 여러 면에서 더 쉬워졌기 때문에 늘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초기의 이주민들은 돈암동, 신당동, 아현동 등지에 진을 쳤다. 한국전쟁 이후 서울 유입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는데, 전쟁으로 파괴된 한반도에서 그래도 일자리와 먹을거리가 서울에 많을 것이라 여기고 모여든 것이었다. 청계천변을 비롯한 서울 곳곳에 판자촌이 세워졌다. 1960년대에 들어 정부는 도심의 판자촌 주민들을 서울 변두리로 밀어내었다. 이 철거민을 위한 서울 변두리 중 하나가 관악산 북쪽 사면인 신림동, 봉천동, 난곡동 일대였다. 달동네라는 이름도 이즈음에 생겼다.---pp.85~86
혜화칼국수도, 국시집도, 술 한잔에 곁들일 수 있는 안주를 내고 있다. 두 곳 모두 경상도의 상징적인 음식인 문어숙회를 낸다. 대표안주는 좀 다르다. 국시집에 생선전이 있다면 혜화칼국수는 ‘바싹불고기’다. 양념한 불고기를 석쇠에 물기 없이 고실고실하게 구워 참깨를 뿌려 내는데, 불맛이 들어 향미가 좋고 고소하다. 좀 달달하긴 하나 소주, 막걸리, 맥주, 동동주와 두루 잘 어우러진다. 주당들은 술 한잔으로 몸을 풀어 준 후 칼국수를 먹는다. 따끈하고 부드러운 칼국수로 속을 달래는 것이다. 술과 안주로 배가 불러도 칼국수 국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먹는 것이 공들여 육수를 낸 수고에 대한 보답이다. 그릇을 들고 국물을 쭉 들이켠다. 시원하다! ---p.101
1974년 9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경향신문》에 연재된 신상웅의 소설 〈배회〉에는 돼지갈빗집이 자주 등장한다. 다음은 을지로6가 계림극장 맞은편에 있던 돼지갈빗집을 묘사한 장면이다. “이쪽의 주문도 없이 찢은 날파와 마늘과 고추장과 김치 등속을 이글거리는 숯불과 함께 날라 오고 이내 널따란 갈비가 치직거리며 타기 시작했다.” 단편적인 묘사지만 이곳에서 돼지갈비와 함께 차려 나온 찬으로는 찢은 날파와 마늘, 고추장, 김치뿐이며 상추는 빠져 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상추에 싸 먹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식습관일지도 모른다. ---p.125
1970년대 들어서는 돼지고기 수출을 위한 대규모 양돈단지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돼지고기는 수출되었지만 다리과 머리, 내장, 피 등 그 부속물은 이 땅에 남았다. 이 부산물은 재래시장에 공급되었고, 이를 재료로 한 족발과 순대, 머릿고기 등이 한국 서민의 음식으로 제공되었다. 삼겹살이 한국인의 주요 음식이 된 까닭도 이와 비슷하다. 1980년대 들어 돼지고기가 등심과 안심 등 부분육으로 수출되면서 삼겹살이 남아돌게 되고, 그게 시장에 풀리면서 한국인의 ‘삼겹살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세계인이 돼지고기 중에 등심과 안심을 고급 부위로 여기는 데 비해 한국인만 기름 많은 삼겹살 부위에 집착하게 된 까닭은, 슬프게도 이 고급 부위를 먹어 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211
197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낸 어떤 이는 청진동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통금이 있으니까 밤새도록 춤추고, 통금이 해제되는 4시에 나가는 거죠. 그때 무교동, 명동의 고고장, 호텔 나이트클럽은 통금 끝날 때까지 영업했거든요. 나오면 배도 고프고 그러니깐 청진동에서 해장국에 해장술로 소주도 한잔 하고 가는 거예요. 젊은 날의 추억이죠!” 지금이야 24시간 영업이니 해서 새벽까지 문을 여는 식당이 많지만 당시에는 꼭두새벽에 속을 풀 수 있는 식당이 흔치 않았다. 그 시절에 청진동 해장국 골목은 통금이 끝나면서 새벽을 맞는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드는 서울의 오아시스였다. ---pp.218~219
뼈다귀도 그렇고, 감자도 그렇고, 감자탕은 태생에서부터 하층민의 음식이었다. 쇠뼈의 설렁탕도 못 먹고, 쌀밥도 못 먹던 사람들의 음식이었다. 그러니, 감자탕은 어느 특정의 지역에서 유래한 음식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하층민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이 음식이 있었을 것이다. 이 감자탕을 서울음식에 넣자 생각한 것은 그 하층민이 가장 큰 집단으로 모였던 곳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농촌을 떠나 서울로 와 노동을 팔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돼지등뼈와 감자는 안주 겸 끼니가 되어 주었을 것이다. ---pp.262~263
1948년 《경향신문》에 실린 독자투고의 짧은 글이 퍽 인상적이다. 서울 시민이 투고한 것인데,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냉면에 대한 서울 시민의 자부심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평양냉면. 냉면옥에는 흔히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평양냉면이 아무리 맛있은들 삼팔선을 넘어 운반해 왔단 말인가요. 서울서 만드는 냉면을 평양냉면이라는 새빨간 거짓말.” 한국전쟁 이후 서울에 남은 북녘 실향민들에게 서울에 포진한 평양냉면이 위안의 음식이 될 수는 있지만, 서울에도 오랜 전통이 있음에도 스스로 서울냉면이라 주장하는 냉면 전문점이 단 하나 한일관뿐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일이다. 서울은, 서울에 사는 모든 이에게 타향인 것은 아닌지. ---pp.289~290
서울에서 삭힌 홍어가 인기를 얻으면서 홍어음식 역시 서울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변해 가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 특히 삭힌 홍어회를 즐겨 먹는 전라남도 아랫녁 사람들은, 좀 과장해서 입천장이 ‘홀라당 까질’ 정도로 푹 삭힌 홍어를 즐기지만, 그렇게 하면 맛이 너무 강해 서울의 타지 손님들이 먹기 힘들어한다. 그러다 보니 전라도 출신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던 예전에 비해 지금은 먹기에 부담이 적은 덜 삭힌 홍어를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말은 서울에서 홍어회를 먹는 손님층이 다양해졌고, 그에 따라 맛의 보편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푹 삭힌 거”라고 주문하지 않는 한 적당히 타협한 서울의 홍어 맛을 보게 된다.
---pp.339~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