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은 그저 어떤 현상을 보여줄 뿐 그것의 원인과 원리를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려 하지 않으며, 때로는 증언하되, 가끔은 증언조차 거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종종 심리학을 앞질러 가기도 하고, 심리학이 미처 다가가지 못했던 영역에 먼저 불을 밝히기도 합니다. (…) 죽음을 탐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서로 경쟁자이기보다는 협력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들어가는 글」중에서
(…) 슈나이드먼이 보기에, 자살은 견딜 수 없는 마음속 고통의 결과였으며, 모든 자살자들은 자신의 핵심적인 가치가 좌절됨으로 인해 심하게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서 ‘그거야 당연한 소리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자살하게 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말처럼 느껴지니까요. 그러나 자살을 이렇게 설명하는 데서 오는 유익이 분명히 있습니다. 자살을 고통의 결과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자살은 나약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라고, 죄악이라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할 수 있게 되니까요.
---「심리통, 그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에 대하여」중에서
(…) 철학자 장 아메리는 『자유죽음』에서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살학의 진단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적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고자 하는 한 인간의 의지 앞에서, 자살 이론의 힘은 더없이 미약해 보이기도 합니다.
다만,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이너의 저서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의 뒤표지에는 책을 읽은 사람들의 간략한 후기가 적혀 있는데, 그중에서 자살로 가족을 잃은 칼라 파인이라는 작가는 “이 책을 읽으며 놀라운 이해와 치유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단지 자살에 대한 개인의 이론을 정리한 대중서일 뿐인데 그 책을 읽고 치유를 경험했다니요. (…) 자살은 다른 종류의 죽음과는 달리 사망자가 그 죽음을 의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했을 경우 그 주변인들은 망자가 도대체 왜 자살을 선택했는지, 혹시 자신이 그 죽음에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지, 그 죽음을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을지 고민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고민에 시달리던 사람이 자살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고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하나의 방법을 얻는 일이 될 것입니다.
---「어느 익살꾼의 죽음」중에서
(…) 책 속에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그것이 죽음 충동이든, 다른 어떤 광기나 고통이든 간에)을 풀어놓은 뒤,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어 삶의 다음 장으로 옮겨간 작가들이 괴테 말고도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스트리아의 작가 에리히 프리트가 말했듯 많은 경우 문학은 “삶을 혐오하여 쓴 것도 사실은 삶을 위해 쓴 것”이며, “죽음을 찬양하여 쓴 것도 사실은 죽음을 이기기 위하여 쓴 것” 같습니다. 그 자신 역시 베르테르 못지않게 자살에 가까이 갔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소설을 썼으며, 그 소설을 씀으로써 위기를 넘기고 오래도록 살아갔다는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위안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베르테르 효과와 전염되는 자살」중에서
뛰어난 작가이자 심리학자이며 우울증 환자인 앤드류 솔로몬은 저서인 『한낮의 우울』을 이런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기제이다.” 그리고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이따금 우리를 저버리기도 하는데, 그럴 때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고요. 또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는 우리가 더 쉽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보호 기능을 되살려주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라고요. 좀 낭만적인 표현입니다만,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에스터가 우울에 빠졌던 근본적인 원인도 결국 사랑이었던 것 같습니다. 에스터는 여러 가지 사건들로 인해 자신과 타인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우울로 빠져들었으니까요.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우울」중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마치 양극성 장애는 완치가 불가능한, 견딜 수 없이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양극성 장애는 재발 위험성이 매우 높고, 재발할 때마다 증상이 더 심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발병하면 지속적으로 치료와 관리를 받아야 하는 질병에 속합니다. 그러니 결국 ‘완치 없는’ 질병이라는 말이 맞지요. 다만, 말장난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저는 ‘완치가 없다’는 표현보다는 ‘평생 관리가 필요하다’는 표현을 더 선호합니다. 완치가 없다는 말 속에 느껴지는 비관적인 느낌이 꺼림칙하기도 하거니와, 관리가 필요하다는 말이 더 실제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당뇨병이나 고지혈증, 심장 질환이 있는 환자가 평소 식습관이나 생활 습관을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것처럼 정신장애에 취약한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삶을 선택하기와 내려놓기, 그 갈림길에서」중에서
이런 효과 외에도, 자해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굳이 ‘기능’이라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겉보기에 좋을 것 하나 없어 보이고 심지어는 해가 되는 것 같은 행동이라 할지라도 이면을 살펴보면 그 행동을 발생·유지시키는 이유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개인과 행동, 환경과의 역동적인 관계를 잘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절대 나아지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중에서
알코올중독자 당사자의 공동체인 A.A.의 미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치버나 홈즈와 같이 자의식 강하고, 자신은 남과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 있음을, 그들과 많이 닮아 있음을 알려준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줄 수 있는, 타인과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요. 어쩌면 어떤 치유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겁니다.
---「중독과 자살, 그 복잡한 관계를 말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