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쁘지 않다고, 어차피 이곳엔 진짜가 없으니, 왜냐하면 지금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주 긴 꿈을 꾸고 있으므로. 꿈 바깥에 두고 온, 차창에 얼비치는 도시 같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깨어난다 해도 그곳 역시 꿈일 거라고, 그러니까 꿈 바깥의 꿈일 뿐이라고 믿으면서. 다만 행복한 얼굴을 보고 싶다는 마음만은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생각을 이어간다. 그래서, 오직 그 얼굴을 지키기 위해서, 행복은 가짜가 아니라고 느끼는 그들의 그 한순간을 위해서, 가까스로, 자꾸만 꺼지려 하는 심장을 바닥에서부터 부풀리며, 하나는 또 한 번……
하나의 숨을 쉰다.
--- 「하나의 숨」 중에서
내 영화가 선택되지 못하고 혹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외면받게 될 날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제로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상대의 자리와 관중석마저 텅 빈 링에서 헐거운 글러브를 끼고 혼자 서 있는 후보 선수처럼……
--- 「흩어지는 구름」 중에서
그 염원의 안쪽에 펼쳐진 개개인의 고통을 절대적으로 동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전체와 영원의 시선으로 본다면 한 사람의 염원이란 퀼트의 한 조각처럼 평균적인 일부이자 보편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절에서 나올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 「환한 나무 꼭대기」 중에서
다른가. 저들과 내가 다르다면 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가. 강렬한 확신을 양손에 쥔 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위에 가담한 선배 기자들을 볼 때면 그런 식의 의문이 시작됐고, 그 다른 무언가를 의식하고 열거하고 분석하다 보면 도덕적 열등감이 뒤따르곤 했다. 때로는 열정과 신념이 휘발되는 공허가 엄습했는데, 그럴 때면 연진은 자신의 전 생애가 부식해가고 있다고 느끼기도 했다. 내장과 피와 뼈가 더럽혀지는 것 같았고 누군가의 농담을 듣고 무심결에 흘러나온 단순한 웃음은 곧바로 스스로를 향한 조소로 변성됐다.
--- 「경계선 사이로」 중에서
분명 목격했고 경험했지만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눈 속에 파묻히는 이야기라면 그녀의 것이기도 하니까. 그녀에 관해 7년의 세월이 내게 가르쳐준 건 그뿐인 듯싶었다. 잠시 뒤 내가 다시 숫자와 눈금이 있는 세계로 귀속된다면 상상으로 빚어진 눈은 녹을 것이고, 나는 모퉁이를 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저토록 무심히 쌓인 눈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 움직이기 전까지는 이곳에 서서 그녀를 좀더 지켜보고 싶었다.
--- 「눈 속의 사람」 중에서
효진은 쓰레기봉투를 꺼내 와 냄비와 밥그릇과 접시를 몽땅 그 안에 털어 넣었다. 무슨 자격으로, 감히, 이제 와서, 요구해, 불쌍한 척, 연민을, 강요, 하고, 어떻게, 너, 까지, 그, 럴, 수, 가, 있, 어, 어! 신경질적으로 설거지를 하면서는 그렇게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했고, 바로 그 순간 세제가 묻은 머그 컵 하나가 손에서 미끄러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깨진 사기 조각을 줍는 동안 오른손 검지에는 금세 핏물이 맺혔다.
--- 「높고 느린 용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