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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배심원·15 고한·17 마트료시카·20 위는 흩어지는 식사법을 갖고 있었다·22 장화홍련뎐·24 태엽 감는 아버지·26 봄날의 리포트·28 물의 식자공·30 하품하는 오븐·32 과꽃 등기소·34 열린 문 수집가·36 지지부진·38 2부 개털 깎는 남자·43 그늘 레이스·46 바람은 가르마를 잘 타지·48 친애하는 포옹·50 빨간 서재·52 터미널 온도·54 파본·56 빌려주는 뼈·58 등,·60 옮겨가는 기억·62 클라인 병(甁)·64 바람의 조문·66 옷을 타고 날다·67 나는 그날, 가장 좁은 장례를 보았습니다·70 검은 밤에 흰 눈이·72 3부 즐거운 전파·77 얕은 강·80 눈금·82 난파선·84 여기는 마녀 출몰 지역입니다·86 클립·88 뼈를 굴리는 나무들·90 돌의 말·93 몽유병·96 속수무책의 꼬리·98 커튼·100 스트로(straw)는 내 편·102 4부 타워크레인·105 별지·108 인형 양초 공장 아가씨·110 일어서는 골목·112 쌍둥이에 관한 420장의 진술서·114 환상벌레·116 예를 들어,·118 숨은 깃털들·120 꽃샘추위 목도리·122 하오 쪽으로·124 곳곳의 기상대·126 엉망진창을 보았다·128 텐트는 어디 있나요·129 부흥하는 회전문·130 해설 | 이성혁(문학평론가) “사물을 포옹하는 자의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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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나는 마흔에 기소되었다. 배심원들은 내 마흔에 대한 죄목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흔은 죄지은 나이 투덜거림으로 식탁을 차려야 하는 지독한 권태, 그래서 난 낯선 밤을 사랑하기로 했다 화려한 네온사인을 켜고 외출에 몇백 명의 애인을 숨겨두고 싶었던 나의 마흔은 낯익은 사람들이 싫어지는 나이, 판결을 운운하던 날 보라색 속옷을 사들였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다 손톱을 물어뜯고 마흔 개의 꼬리를 단 나는 꼬리가 길어지는 이유를 자꾸 병원에 물었다 온갖 연령대들로 구성되어 있는 배심원들 그들은 내가 지나쳐 온 연령이거나 지나친 연령, 사소한 너는 그때 치마를 입지 말았어야 했어 줄 나간 스타킹을 돌돌 말지 않았어야 했어 종교에 귀의할 시간을 놓쳐버린 거야 의견은 달랐다 나는 공책을 읽었고, 서른에 보내는 투정의 문장들이었다 두 겹 세 겹 매니큐어를 바르고 한밤중에 나가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리카락을 잘랐다 배심원, 그들은 각자 다른 입장이므로 판결하는 내용이 각각 달랐다 과거를 갖고 판결하자는 사람이 있었고, 현재를 갖고 판결하자는 사람이 있었다 그 어느 의견을 들어도 과반수가 안 되는, 내게는 지루한 재판이었다 --------------------------------------------------------------------------------------------------------------------- 친애하는 포옹 창가의 여인*은 복도식 신발을 신고 있다 우단 스커트는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다 날씨들은 나뭇가지들을 구불거리는 곳으로 데려간다 밖을 내다보고 있는 레이스는 부주의하고 맨살을 덮은 무릎의 레이스는 다리를 휘감거나 자주 흔들린다 유리 사이에 낀 십자가, 신앙은 늘 뾰족하다 높이 솟은 머리는 똬리를 튼 겨울잠 검은 숱이 한 방향으로 멈춰 있다 중세의 창문들은 여인의 허리쯤에나 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창문은 없다 한나절은 잘록한 허리처럼 길어지고 여인의 눈은 줄곧 거리 끝으로 헤엄쳐 갔다 가끔 찌를 듯 태양이 부서져 내렸다 양산을 잃어버린 순간의 햇빛, 신발은 납처럼 무겁다 목을 타고 올라온 숨이 입안에서 빙그르르 맛있다 마치 세워놓은 관 속의 여인이 십자가를 열고 밖을 내다보듯 서 있는 창가 침묵을 깨고 괘종이 울릴 때까지 창밖 마차는 떠나고 발소리는 계단을 올라온다 친애하는 옷걸이와 침대는 가지런하다 * 창가의 여인 : 카스파르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작품(1822). ------------------------------------------------------------------------------------------ 여기는 마녀 출몰 지역입니다 마녀의 모자를 따라가면 서서히 좁아지는 길 목이 좁아지는 병목을 만난다 병목엔 뾰족한 주문을 깨트려놓고 출몰한 화살표를 타고 날아가는 저녁의 집들이 기다리고 있다 길의 뒤쪽을 켜고 다니는 마녀들의 정체 구간 좁은 지점을 지나 넓어지는 구간에 비가 내린다 내리던 비가 확 트인 시야로 바뀌고 갑자기 좁아지는 주문이 주파수에서 흘러나온다 병 속엔 빗물이 차오르고 수신호들과 경적들이 범람한다 몇 개의 병목을 이렇게 지나다 보면 별들이 가득 갇혀 있는 병 속을 빠져나가고 있는 것 같다 지구의 뚜껑을 누군가는 열어놓고 마녀는 매캐한 연기를 뿜어댄다 홀수가 끼어들고 짝수가 욕설하고 당신은 몇 번째 숫자를 따라오는 거냐며 꽁무니를 빼는 붉은 숫자들 모자만 벗어두고 마녀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이 모자는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창문을 스르륵 올리는 길의 끝이 교차로를 따라 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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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포옹하는 자의 시”
안은숙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 ㈜여우난골의 2021년 시인수첩 시인선 52번으로 안은숙 시인의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가 출간됐다. 안은숙 시인은 2015년『실천문학』신인상에「장화홍련뎐」外 4편의 시로 등단하였고, 2017년『경남신문』신춘문예「반쪽 지구본」수필이 당선되었다. 2017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 문학 분야 작가로 선정되었으며, 2021년 제1회 〈시산맥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시인은 사물들에 새로운 상상력을 부여하는 발상으로 철학적인 사유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시집의 주제는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무기력한 소시민의 결핍을 다루고 있으며, 불안한 내면세계와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 끝의 그들을 대변(代辯)하는 시적 언술 방식을 택하고 있다. 억눌린 자아와 척박한 삶의 단면들을 덤덤히 바라보며 반추하는 절제된 감정으로, 운명을 초극하는 자세로 존재들과 마주한다. 또한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낱낱의 사물들을 포옹하고, 익숙한 것의 단편적인 세계를 넘어 그 너머로의 확장된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깊이 있는 시인만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 ‘사물의 시인’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시인들이 있다. 이 시인들은 세상의 사물들을 집요하게 투시하여 시적 이미지를 그 사물로부터 길어 올리고, 그럼으로써 사물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바를 시화(詩化)하는 시인들이다. 세상은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때 ‘사물의 시인’은 세상의 모든 물체에 주목하여 시화하고자 하는 시인이라고 하겠다. 안은숙 시인의 첫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는 안 시인 역시 ‘사물의 시인’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인의 말에 의해 이 시집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생명은 새로이 활성화되고, 하여 그 사물들은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된다. 이런 면에서 안 시인의 사물을 대하는 자세는 마치 애니미즘 주술사의 계보를 잇는 듯하다. 그녀에게 그녀 주위에 있는 사물들은 그녀와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며, 그 사물들의 영혼은 마치 주술과 같은 그녀의 시에 의해 가시화된다. 시인은 자신과 관계 맺어온 사물들의 영혼을 발견하고 시화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재인식하고 새로이 살아나갈 수 있다. 그래서 시집의 서두에 실린 「배심원」에서의 화자가 “낯익은 사람들이 싫어지는 나이”인 마흔이 되어 ‘지독한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보라색 속옷을 사들”이고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는 것은 단순한 기분 전환의 의미만을 가지지는 않는다. 사물과의 새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는 그 행위는, 세상의 편견이 마흔 여성에게 가하는 여러 판결들을 거부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삶은 사물들과 권태롭게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낯선 관계를 맺을 때 이루어진다. 사물을 도구나 객체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게 인지할 때, 즉 시적으로 인지할 때 그 사물은 점차 자신의 영혼을 드러내고 말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물의 영혼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사물이 전달하는 말을 들을 수 있거나 글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안은숙 시인은 사물에 대한 깊은 관찰과 접촉을 통해 그 사물의 말을 듣고 사물이 표현하고 있는 이미지를 읽는다. 시인이 긴밀한 관계를 맺은 그 사물의 이미지는 시인의 숨겨진 기억과 욕망 등을 비추어준다. 안은숙 시인이 세계의 사물들을 응시하고 이 사물들과 접촉하여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시작(詩作) 행위는 사물과의 포옹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골조가 필요한” 그 포옹은 “서로 빌려주는 뼈가” 되는 행동인 것이다. 불안한 그녀는 자신이 “기대어 일어”설 수 있도록 지지해줄 “다른 뼈를 상상”한다. 그 상상의 뼈는 세계의 사물들과의 포옹을 통해 빌려올 수 있다. 그 포옹은 ‘나’ 역시 포옹의 대상인 “뼈 없는 것들이 뼈 없이 일어서려 할 때” 부축해주는 ‘친절한 도구’가 되는 일이다. 세상의 사물들에 시인이 상상의 뼈를 빌려줌으로써 그 사물들은 “뼈 없이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시의 후반부에 따르면 ‘상상의 뼈’를 “서로 빌려주는” 이 포옹은 “완벽한 뼈가 되려 하는 일”이다. 포옹은 뼈를 빌려주는 일 완벽한 뼈가 되려 하는 일 죽어있는 나무를 타고 오르는 저 넝쿨들, 세상의 줄기들은 다 뼈가 된다 나의 뼈도 너의 뼈도, 상상의 뼈 하나로 일어서려 한다 - 「빌려주는 뼈」 후반부 뼈를 빌려주는 시인의 포옹으로 “죽어있는 나무를 타고 오르는 저 넝쿨들”도 뼈가 될 수 있다. 하여, 그 죽은 나무는 ‘넝쿨-뼈’를 의지하면서 새로이 일어서게 될 것이다. 시인의 포옹은 세상의 줄기들을 다 뼈로 변환시킬 수 있다. 물론 그 포옹을 통해 사물들 역시 시인에게 ‘상상의 뼈’를 빌려주면서 시인을 다시 일어서게 도와줄 것이다. 이렇게 시인인 ‘나’와 세상의 사물인 ‘너’의 포옹은 ‘상상의 뼈’인 시를 통해 “둘이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며, 그리하여 ‘나’와 ‘너’는 “상상의 뼈 하나로 일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은숙 시인에게는 ‘나’와 세상의 사물들을 관계 맺어주고 지탱해주면서 ‘나’와 그 사물들이 서로에게 뼈를 빌려줄 수 있게 해주는 이 ‘상상의 뼈’야말로 바로 시의 힘이며, 이 시의 힘을 표출하는 것이 그녀가 시를 쓰는 이유일 것이다. (이성혁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 시인의 말 시가 되기 위해 나에게 호명되어 온 낱말들에게 나는 아직 안녕하다는 안부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