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Rainer Maria Rilke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다른 상품
|
1895년과 1896년에 차례로 집필한〈첫서리〉와〈몰락의 시간〉에서 릴케는 하층민들의 생활고와 살아 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질러야 하는 매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집필 다음해에 프라하 독일민중극장에서 초연된〈첫서리〉에서 기르딩의 집안은 부채와 부정으로 파탄의 위기를 맞고 있다. 기르딩의 딸 에파는 예전에 연인 바우어와 함께 애정의 도피를 시도했다가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도덕적 비난, 가족들의 냉대 그리고 죄책감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바 있다. 에파의 어머니는 가정의 난국을 타개하고자 딸을 채권자 메르첸에게 성적 노리개로 제공한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아버지 기르딩은 자살하고 뒤늦게 에파에 대한 사랑을 깨달은 바우어는 격분에 못 이겨 그녀를 교살한다.
단막극〈몰락의 시간〉은 더욱 비극적이다. 여주인공 헬레네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먹고 살 방도가 막막한 젊은 여인으로, 여동생 트루디와 불치병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리폴트의 집에 세들어 살고 있다. 집주인 리폴트는 오래 전부터 그녀를 탐해왔는데, 헬레네 가족은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고 어머니의 약값은 떨어진 지 오래다.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헬레네는 오랜 번민 끝에 결국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리폴트에게 몸을 바친다. 그 순간에 임종을 맞이하는 어머니는 트루디에게 자신이 예전에 리폴트와 외도를 한 적이 있고 헬레네가 바로 그 리폴트의 딸임을 밝힌다. 하지만 사건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파국으로 치닫고, 트루디가 울먹이며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으로 막은 내린다. 또한 1897년에서 1900년 사이에 씌어진 희곡들은 릴케가 관심을 보인 또다른 테마, 여성의 자기실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앞의 작품들에서 다루어졌던 생활고와 매춘의 문제는 이제 여성의 자의식의 문제로 심화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 부류에 속하는 작품들은 심리극에 가깝다. 〈저 높은 곳에서〉는 애정관계 때문에 집에서 쫓겨난 미혼모 안나의 의식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녀는 체면, 교양, 그리고 도덕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의 세속적 삶과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삶을 결정하며 자유롭게 더욱 멀리 보고 하늘과 더욱 가까이 살고자 한다. 안나는 결국 고루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난하지만 자신의 아이와 함께 자유로이 살기로 결심한다. 이러한 릴케의 사고는 미완성 희곡인〈단편〉에서 더욱 뚜렷하게 구현된다. 이 작품의 제나라는 인물은 그 당시 여성들에게 지워졌던 순종, 절제, 겸손 그리고 도덕 등의 굴레에서 벗어나 있는 인물로, 자기 자신이 남성들과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다는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남성들에 대해 어떤 적의감도 품고 있지 않은 현대적 여성상을 대변하고 있다. 안나와 제나로 대표되는 새로운 여성상, 즉 여성을 동료로 이해하는 릴케적 의미의 여성상은〈일상〉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릴케는 일생 동안 여러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는 그들이 예술에 대한 관심과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의 관심과 능력을 가꾸어주는 것을 본인의 자기 실현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했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릴케의 견해는 이처럼 함께하는 우정과 평행적인 성장의 개념으로 특징지워지며, 당시로서는 극히 현대적인 이러한 견해는 작품들에 잘 녹아들어가 있다. 한편 릴케는 가족이나 일상,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주제를 다룬 작품들도 발표했다. 결혼은 일상의 연장이며 그 자체로 허상일 뿐이라는 내용의〈일상〉이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지루한 일상의 한 단면을 끄집어낸〈엄마〉등이 그런 작품이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가족 간의 갈등이 이 두 작품에서는 어느 정도 봉합될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면〈배제된 현재〉는 그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는다. 형부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자살한 아글라의 죽음 이후 그녀의 언니인 소피와 남편 에른스트의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는다. 부부는 아글라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지만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고 결국 동반 자살한다. 그들의 자살은 과거의 강박관념으로부터의 탈출이자 동시에 마음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의 도피였으며, 자신들만의 현재를 갖고자 하는 최후의 선택이었다. 〈고아원 아이들〉과〈전야제〉에는 죽음의 문제가 본격적인 주제로 나타난다.〈고아원 아이들〉에서 작가는 수도원, 가을, 황혼, 텅 빈 가로수길, 그리고 소년소녀들을 대비시켜 인간의 본질이 산 자와 죽은자, 육체와 영혼 사이 어느 곳에 과연 존재하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삶과 죽음의 대비는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전야제〉에 더욱 극단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세 쌍의 젊은 남녀들은 어머니의 죽음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지만 이미 관객은 어두운 무대 한구석에 누군가의 시체가 있음을 감지하고 시종일관 긴장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도록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어느 순간 닥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앞서 출간된<릴케전집 1(기도시집 외)>,<릴케전집 7(단편소설)>,<릴케전집 12(말테의 수기)> 와 이 책<릴케전집 9>은 문학비평적인 시각에서 독문학자들이 성실하게 번역하고 비평한 책세상의 '릴케전집' 시리즈 중 일부이다. 총 13권으로 진행 중인 '릴케전집'은, 70여 년간 릴케전집을 펴온 독일 인젤Insel 출판사의 <릴케전집Rilke werke>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국내 릴케 전공자를 포함한 각 대학 독문학 교수들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하고 해설을 덧붙인 것으로, 이미 잘 알려진 <기도시집>,<형상시집>등 시작품뿐만 아니라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시작노트와 유고작품, 특히 독일 내에서도 아직 분석·비평작업이 진행 중인 희곡, 중·후반기의 예술론 등이 포함되어 있어 릴케의 작품세계 전반을 감상·비평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