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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내려앉은 봄
함초롬 MD (유아/가정살림/건강취미)
할머니에겐 몇 평 남짓의 작은 아파트, 그리고 그 아파트 베란다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네모난 바깥 풍경이 세상의 전부다. 할머니 세상에서 진짜로 '살아' 움직이는 건 당신뿐이지만, 할머니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하다.
이른 아침, 몸을 녹일 따끈한 차 한 잔을 끓여주는 전기 포트는 진선이. 엉겨 붙은 빨랫감을 뽀송하게 해주는 세탁기는 민철이. 내 마음도 이랬으면 좋겠다 싶게 윤기나는 바닥을 만들어주는 걸레는 민식이. 쪼그라든 귤도 소중하게 품고 있는 냉장고는 영순이. 적적함을 잠시나마 달래주는 텔레비전은 민주. 나이가 들어도 그리운 엄마의 집밥을 비슷하게나마 따라 하는 밥솥은 봉선 여사. 도통 울릴 생각을 하지 않는 휴대전화는 무뚝뚝한 계석 씨. 할머니는 가전제품마다 사람 이름을 붙여 매일 말을 건다. 그리고 매일 되뇐다. ’지금이 딱 좋다’고. 그러나 모로 누운 할머니의 등에는 쓸쓸함이 가득 묻어있고, 할머니가 이름 붙인 가전제품 중 어느 누구도 할머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할머니의 이름은 할머니가 쓰러진 뒤에야 '누군가'-아마도 요양 보호사일 것이다-에 의해 처음으로 불린다. 고애순 씨. 고애순 씨. 오랜만에 소리 내 이름 불린 할머니에게, 아니 고애순 씨에게 변화가 찾아온다. 굳게 닫힌 현관문이 열리고, 바깥의 빛과 냄새가 할머니 세상 속으로 들어와 서서히 스며든다. 밖으로 나온 고애순 씨는 세탁기 민철이 말고 아파트 경비 경철 씨에게, 밥솥 봉선 여사 말고 옆집 지숙 씨에게, 냉장고 영순이 말고 아래층 시훈 총각에게 말을 건넨다. 그리고 전기 포트 진선이가 끓여준 차를 나눈다. 더는 애순 씨 혼자 마시지 않는다. 경철 씨, 지숙 씨, 시훈 총각과 나눠 마신다. 차 한 잔 덕에 따스한 마음과 다정한 마음이 서로에게 번지고, 고애순 씨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매일 되뇌던 거짓말은 진짜가 되어 '살아' 움직인다. "아이고, 딱 좋네. 지금이 딱 좋아." 할머니의 세상이 고애순 씨 세상으로 확장되었다. 이제 할머니의 등에는 쓸쓸함 따위가 묻을 자리가 없다. 고애순 할머니의 등에 봄이 내려앉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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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마음’을 떨치고 일어난 이에게 열릴 새로운 ‘봄’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스르르 열리는 순간, 햇살이 눈 부시게 할머니의 온몸을 파고 들고, 햇볕 냄새가 코를 감쌉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 빼곡히 들어선 자동차들, 곳곳을 푸릇하게 물들인 나뭇잎, 그사이에서 부서지고 흔들리며 각양각색으로 빛나는 태양의 조명이 할머니의 마음을 따스하게 물들입니다. “아이고, 딱 좋네. 여기가 딱 좋아. 지금이 딱 좋네.” 벤치에 기댄 채 조용히 내놓은 할머니의 고백은 고민, 자책, 불평, 번뇌 들로 또 다른 자물쇠를 채우고 있던 우리의 ‘지금’을 소환합니다. “세상에! 하늘 파랑이 이랬나….” 고애순 할머니에게 다정하게 다가온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우리가 용기 있게 한 발 내딛는 순간 마주하게 될 세상은 어떤 얼굴일까요? 진중한 시선과 따스한 울림으로 독자 곁에 다가서는 하수정 작가의 내밀한 고백과 응원 하수정 작가는 결승선 없는 마라톤 경기에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레일의 범위를 확장하면서도 자신만의 호흡법을 잃지 않고 달리는 선수를 연상케 하는 작가입니다. 『울음소리』로 학대받는 아이의 아픔에 숨죽여 같이 울었고, 『파도는 나에게』로 일상의 무게에 지친 이들에게 바다의 너른 품을 보여 주었으며, 『마음 수영』에서는 세상의 모든 딸들을 향한 맑고 푸른 격려를 수영장 물빛에 담아 냈지요. 『지금이 딱 좋아』를 통해 작가는 ‘노인의 현실’을 조명하기보다는 ‘늙은 마음’이 무거운 몸과 무기력한 상황을 떨쳐 내고 극복하는 이야기를 싶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늙은 마음’이 비단 노인들만의 전유물일까요? 스스로 정해 놓은 틀 안에서 어기적어기적 하루를 사는 느릿한 움직임이, 주름 한가득 표정 없는 얼굴이, ‘뭐 하러….’를 되뇌며 하지 않을 이유를 만드는 습관이 우리 안의 ‘늙은 마음’을 채우고 있진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지금이 딱 좋아』에서는 생생한 할머니의 독백에서 가전제품들의 활약으로 이어지는 서사의 흐름을 단순한 선과 여린 색감으로 표현해 내면서도, 꽁꽁 싸매 보이지 않던 우리 안의 ‘늙은 마음’을 단호하게 파헤치고 종국에는 새로운 시작을 살포시 응원하는 작가의 내밀하고 딴딴한 힘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