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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0. 전혀 아름다운 레몽 크노 - 11 더 멀리 근접하기 - 12 오후 - 14 드로잉 - 16 산개(散開) - 18 언어와의 작별 - 20 소여풍경 - 22 말. 벌. 바셀린 - 23 4인칭 - 24 4인칭 1 - 26 그렇습니다 - 28 빗소리 - 30 비 소리 - 31 전깃줄 - 32 자음 혹은 장애 - 33 비인칭 창 - 34 비인칭 창 1 - 36 가자미 - 37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 38 처럼 - 40 객(客) - 41 섬 - 42 첫눈 - 44 새가 날아오를? 때 - 45 소형 공구함 - 46 토리노의 말 - 48 토리노의 말 1 - 50 1. 더 쪽으로 수평선 기하(幾何) I - 53 수평선 기하(幾何) V - 54 수평선 기하(幾何) Ⅵ - 55 수평선 기하(幾何) Ⅸ - 56 수평선 나무 - 58 木工 演習 - 59 1963 - 60 더 쪽으로 - 62 곡률의 부호 - 64 강우량 - 66 난간 - 67 철물점 - 68 신체적 밤 - 70 프라이드치킨 - 71 입 - 74 호명 - 75 선고 - 76 도약 - 78 플랑크의 별 - 80 깨알 같은 모래알 - 81 최후의 발걸음 - 82 나무의 왕래 - 83 미역 - 84 이식 - 85 침묵의 에스키스 - 86 눈 뒤의 수평선 - 88 소나기 景 - 89 더 쪽의 눈들 - 90 두통 - 91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일은 고양이에게 길을 묻는 방식이다 - 92 해설 임지훈 ( )를 가리키는 방법 - 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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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몸에 문어체로 이루어진 수
족관을 증식하는 뼈 없는 동사로 슬쩍 미끄러지는 달, 에 걸려 넘어졌다 를 깊숙이 눌러쓰고 문어가 달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둥근 휴식과도 같은 죽음이 물 아래서부터 에워싼 무수한 중얼거림으로 이루어진 흡반들로 시작된 수족관 안에 아무것도 아닌 말을 말아 올린 종말이 들러붙어 침묵의 두께로 밀봉되는 순간 문어의 그림자가 비치는 달의 일부는 스스로 부재하는 물속에서 둥글게 구분되지 않는 생각의 공전으로 누구의 바탕인지 모를 달을 굴리는 모호한 곡면, 에 배드민턴을 쳤다 와, 날아다닌다 ---「레몽 크노」중에서 오후만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하루에 한 번씩 오후가 온다 때로는 서너 번씩 올 때도 있다 동그란 오후 오후는 한 번도 오전에 나가 본 적 없고 어둡기 전에 자리를 떴다 그런 오후가 며칠째 소식이 없다 오전에 물으니 오후에 다시 말하자고 한다 오후를 보고도 오후를 지나치는 사람 오후에 걸터앉아 오후를 기다리는 사람 아침에 오후를 데려간 사람이 밤에 허겁지겁 빈 오후를 꺼낸다 같은 모자를 빌려 쓴 다른 오후들 사람들은 한 개의 모자만 보고 있다 사람들은 한 개의 오후만 생각한다 ---「오후」중에서 바케트를 물고 베케트를 읽는다 밀가루와 말 사이에 숭숭 뚫린 입들 웅얼거린다 이스트, 아무도 다물지 않고 누군가가 부풀어 오른다 ―잘못 말하기 ―잘못 없이 아주 잘못 말하기 거머쥔 빵이 아니라 빵의 표시처럼 여기 없고 오직 남은 이곳, 아닐 수도 있다 이곳이 아닐 수도 드러냄으로써 드러나지 않는 지점까지 종잡을 수 없는 말들 침묵이 다 사라질 때까지 결코 침묵할 수 없는 말, 어떤 말도 아무것도 아닌 말보다 허약하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제목.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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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이루어질 수 없기에 끝나지 않고 끝나지 않기에 끝낼 수 없는 것들의 파편을 어루만지는 일, 기어이 목숨이라고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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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오후는 오전과 대비되는 시간이 아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대체하는 기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권주열은 어떤 대상에 붙은 이름을 지우고 낯선 이름을 붙인다. 말과 말 사이의 틈을 찾아내고 그 틈에서 땜질한 흔적이 있는, 공기처럼 가벼운 4인칭의 언어를 발견한다. 빵에 뚫린 작은 구멍들은 이름이 없다. 그것은 그냥 작은 틈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작은 구멍에 시인은 “숭숭 뚫린 입들”이라는 낯선 이름을 붙인다(「이름 붙일 수 없는 자」). 권주열은 이번 시집에서 말에 나 있는 틈을 탐구한다. 그 작고 기묘한 틈을 파헤치고 들어간다.
말의 틈, 그 비어 있는 자리를 응시하는 시인의 유쾌한 명상은 소리에 대한 탐구로 확장된다. 비는 소리가 없지만, 소리 나는 쪽으로 내리고 있다는 생각. 소리는 비와 전혀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리가 비를 만나는 게 빗소리라는 생각. 이런 생각들은 비와 소리의 관계를 보여 주는 낯선 시적 상상이다. 비는 소리가 없다는 시인의 생각은 놀랍다. 빗방울이 어떤 사물과 접촉할 때 발생하는 게 빗소리가 아닌가. 하나의 세계가 다른 세계와 만날 때, 그 계면에서 발생하는 어떤 불꽃 같은 것, 그것이 소리다. 이러한 인식은 장자(莊子)의 소리에 관한 인식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만, 권주열의 시적 상상력은 장자의 상상력과 다른 결을 보여 준다. 통념을 뛰어넘는 이런 상상을 통해 시인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인식에 일대 전환을 일으키려 한다. 이런 시도는 시집의 백미인 「곡률의 부호」에서 극을 이룬다. 외출했다가 한나절 지나 돌아왔을 때 아직 마당을 다 지나지 못한 달팽이를 보면서 시인은 “내가 환갑이 지나고 칠순은 넘어야” 달팽이가 “동네 한 바퀴를 다 돌” 것이라 생각한다. 동네 한 바퀴를 다 돈 달팽이는 다시 만난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아까까지도 멀쩡하던 양반이 왜 이리 퍼석 늙어 버렸”냐고 생각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같은 공간에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걸 찾아낸 시인의 뛰어난 감각은. - 김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