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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느다란 명주실로 짜낸
헨리 제임스 산문선
온다프레스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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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추천사
엮은이의 말

1부 프랑스에서

지갑과 이름과 가문의 세계: 오노레 드 발자크
모리스가 용서했을 법한 수고로움: 프랑스 여행 스케치
장소의 초상: 샤르트르, 에트르타

2부 이탈리아에서

여행이란 연극을 보러 가는 일: 다시 찾은 이탈리아
삶이 알아서 그 안에 숨결을 불어넣어: 『한 여인의 초상』 뉴욕판 서문

3부 영국에서

소설이라는 예술
가장 고귀한 종류의 영감: 런던

4부 미국에서

세일럼의 물웅덩이에서 꽃이 피어나듯: 너새니얼 호손
너희를 세운 건 다시 허물기 위해서일 뿐: 다시 찾은 뉴욕

원문 정보

저자 소개 2

헨리 제임스

관심작가 알림신청
 

Henry James

리얼리즘 소설의 정점을 보여주었으며 모더니즘 소설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평가되는 헨리 제임스는 1843년, 당시 미국에서 유명한 변호사였던 헨리 제임스 1세의 아들로 뉴욕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혔고, 한 해 먼저 태어난 형은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이다. 어릴 때부터 여러 차례 부모를 따라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생활했고 제네바, 런던, 파리, 볼로냐, 본 등지에서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862년 하버드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뒤 문학에 뜻을 두고 단편소설과 평론을 쓰기 시작하여 신진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때
리얼리즘 소설의 정점을 보여주었으며 모더니즘 소설의 가장 중요한 선구자로 평가되는 헨리 제임스는 1843년, 당시 미국에서 유명한 변호사였던 헨리 제임스 1세의 아들로 뉴욕의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혔고, 한 해 먼저 태어난 형은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이다. 어릴 때부터 여러 차례 부모를 따라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생활했고 제네바, 런던, 파리, 볼로냐, 본 등지에서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1862년 하버드 대학교 법학부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뒤 문학에 뜻을 두고 단편소설과 평론을 쓰기 시작하여 신진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때 발표한 것이 최초의 단편 「실수의 비극」(1864)이다. 이후 문학에 전념하며 1966년에서 1869년까지, 1871년에서 1872년까지 『네이션』과 『애틀랜틱 먼슬리』에 기고자로 참여하였다.

1875년 고국을 떠나 파리로 갔고 거기서 이반 투르게네프,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 알퐁스 도데 등과 알게 된다. 특히 투르게네프에게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작중인물이라는 점을 배우는 등 유럽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베네치아와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최초의 소설 『파수꾼』(1871)을 내놓은 후, 『뉴욕 트리뷴』의 기고자로 활동하며 파리에 거주하다 1876년 영국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한다. 그리고 잇따라 『미국인』(1877), 『데이지 밀러』(1878), 『워싱턴 스퀘어』(1880), ‘영어로 쓴 가장 뛰어난 소설’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여인의 초상』(1881) 등을 발표하였다. 이들 중에서 『워싱턴 스퀘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국제문제를 다루었다.

이어서 한동안 사회소설에 손을 대어 『보스턴 사람들』(1886), 『카사마시마 공작부인』(1886) 등을 발표하였고, 극작에도 관심을 가져 「가이 돔빌」(1895) 등 몇 편의 희극을 썼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다시 소설로 돌아와 『나사의 회전』(1898), 『비둘기의 날개』(1902), 『특사들』(1903) 『황금 주발』(1904)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05년에는 2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뉴욕, 워싱턴, 시카고 등을 방문하고 『미국 기행』(1907)을 썼으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1912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고, 1916년에는 국왕 조지 5세가 수여하는 명예 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망하기 바로 전 해인 1915년 영국에 귀화하였다.

제임스의 성취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인도 아니고 유럽인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을 버텨 내면서 제임스는 “국제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다. 둘째, 리얼리즘의 대가이면서 모더니즘의 선구로서 제임스는 형식에 대한 고려가 별로 없었던 소설에 형식적 완결성을 부여했고, 소설 비평과 이론의 기반을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내면 갈등을 겪는 여성 인물을 전면에 배치했다. 다양한 여성 인물들을 그려 냈을 뿐 아니라, 남성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이들을 내면이 있는 개인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워싱턴 스퀘어』는 세 번째 성취의 사례이다.

쉼 없는 창작열로 23편의 장편, 112편의 단편과 중편, 각종 평론과 여행기, 250여 편의 서평과 수십여 편에 달하는 비평문 그리고 만 통 이상의 편지를 남긴 그는 19세기 문학 리얼리즘에 있어 주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자신의 소설을 직접 해설한 『소설의 기예』(사후 1934년 간행)는 소설 이론의 명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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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역정소영

관심작가 알림신청
 

鄭素永

영문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뒤 십여 년간 대학에서 강의했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루시』 『애니 존』 『가장 파란 눈』 『실크 스타킹 한 켤레』 『할머니, 개, 그리고 죽도록 쓰기』 『시골 소녀들』 『값비싼 독』 『아주 가느다란 명주실로 짜낸』 『웃음과 비탄의 거래』 『어떻게 지내요』 『대사들』 『유도라 웰티』 『진 리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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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3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316쪽 | 388g | 128*188*30mm
ISBN13
9791197912627

책 속으로

발자크의 인물됨을 알아보려면 그것을 거의 전적으로 작품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방금 말했지만, 사실 그의 작품에는 특이하도록 개인적인 면모가 드러나지 않는다. 정신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엄청나게 많지만 삶에 대해서 암시하는 바는 별로 없다. 그보다 덜 전기적인 작가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그것이 그의 천재성의 어마어마한 범위,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생생한 상상력을 증명하는 것은 분명하다. 아는 것만큼이나 스스로 창조한 것도 그에게 실제적이었고, 말하자면 그의 경험에는 상상의 경험이 수천 겹 덮여 있다. 실제 인물은 되찾을 수 없을 만큼 예술가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p.31~32

예술은 우리가 맘 편히 쉴 수 있는 삶의 한구석이다. 우리가 그곳을 찾는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재현적 충동이 생기리라는 사실뿐이다. 다른 차원의 충동들은 여러 조건이 달리고 방해받는다. 이웃의 충동과 일치하는 만큼만 지닐 수 있을 뿐이다. 이웃의 편의와 안녕, 이웃의 확신과 편견, 이웃의 법칙과 규칙에 일치하는 만큼만. 예술은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환히 빛나는 예술의 기준이 떠다니는 곳이라면 사과하거나 타협할 필요가 없다.
---p.138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된 싹을 확인해보려 지금 돌이켜 보니, 확실히 ‘플롯’이라는 장치나, 이야기꾼을 위해 자체의 논리에 따라 즉각 움직이기 시작해 행진이나 달리기나 잰걸음으로 걷기 시작하는 특정한 ‘상황’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오롯이 단 하나의 인물, 매력적인 특정한 젊은 여성이라는 인물과 면모에서 시작해서, 배경은 물론이고 ‘주제’의 통상적 요소들은 전부 나중에 덧붙여야 했다. 되풀이하자면, 내 상상 속에서 작품의 모티브를 변호하는 마음이 자라났던 전 과정에 이렇게 기억을 투사해보니 그것 역시 최고 상태의 젊은 여성만큼이나 흥미롭다. 잠재된 확장의 힘, 씨앗을 깨고 솟아나야 할 이 필요성, 마음속에서 굴려보던 구상이 가능한 한 크게 자라나겠다며 내보인 결심, 빛과 공기 속으로 쑥쑥 자라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겠다는 그 아름다운 결심, 그런 것들이야말로 이야기꾼의 예술이 지니는 매력이다.
---p.148~149

전반적으로는 상상력에게 한없이 말을 거는 장소가 상상력이 원하는 특정한 것을 그 순간에 주지 않는 건 어찌된 일일까? 아름다운 그곳에서 거듭 그런 의구심이 떠올랐던 기억이 난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곳은 상상력이 간청하면 내어주기야 하겠지만 그저 너무 많이 내어준다. 다시 말해 당장의 특정한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이상으로 많이 내어준다는 것이다.
---p.149

한마디로 소설의 집에는 창문이 하나만이 아니라 수백만 개다. 차라리 셀 수 없이 많은 창문을 낼 수 있다고도 하겠다. 거대한 건물 전면의 창문은 모두 각자 상상력의 필요에 따라, 각자 의지의 힘으로 생겨난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생길 것이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인간 삶의 장면 위로 다 함께 자리를 잡은 구멍들이라,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동질성을 기대할 법도 하다. 기껏해야 창문이긴 하다. 드나들 수 없는 벽에 서로 연관도 없이 높이 자리 잡은 구멍일 뿐이라, 경첩 달린 문처럼 그것을 열고 삶으로 곧장 들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각 창문마다 두 눈을 지닌, 최소한 쌍안경을 가진 인물이 서 있고, 눈이나 쌍안경이 관찰을 위한 독특한 도구가 되어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독특한 인상을 확실히 보장한다는 점이 이 창문들의 특성이다.
---p.156

인간세상은 어마어마하게 넓고 현실의 형태는 무수하다.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어떤 소설의 꽃에서는 현실의 향기가 나고 다른 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것뿐이다. 꽃다발을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주는 것은 그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경험으로 써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로 훌륭하지만 요령부득이다. 소설가로 성공하려는 사람이 그런 단언을 마주하면 우롱당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어떤 종류의 경험을 말하는 것이며, 그 경험은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에서 끝나는가? 경험이란 결코 한정되지 않고 결코 완결될 수도 없다. 그것은 광대무변한 감수성이고, 의식의 방에 걸린 아주 가느다란 명주실로 짠 거대한 거미줄로, 부유하는 입자를 빠짐없이 잡아낸다.

---p.190~191

출판사 리뷰

‘인간의 내면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인생의 진실 쪽으로 부서지듯 나오는’

책 속의 산문 중 발자크와 호손을 다루는 전기 성격의 비평문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지의 여행기들은 각각 19세기 말 유럽 문화의 단면을 날카롭게 보여준다.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미국과 유럽을 자유롭게 다니면서 익힌 ‘세계시민’으로서의 감각이 여실히 밴, 유려하고 아름다운 글들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작가의 본격 문학비평 두 편을 보게 되는데(「소설이라는 예술」과 「삶이 알아서 그 안에 숨결을 불어넣어: 『한 여인의 초상』 뉴욕판 서문」), 이 두 편의 글들은 왜 헨리 제임스가 ‘작가의 작가’로 불리는지를 선명히 드러내준다.

평론가 신형철은 이 책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왜 어떤 소설만이 예술이며 다른 것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권위적인 일이라고 믿는 동시대인들이 적지 않다.”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 헨리 제임스는 이처럼 다소 무리해 보이는 주제, 즉 소설 중에 예술인 것과 아닌 것을 가르고자 ‘소설의 예술성’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말은 자본주의가 급격히 융성해진 시기였고 그에 발맞춰 출판을 비롯한 예술 분야 또한 활황기에 접어들었다. 이 같은 전환기에 예술의 본연을 다시금 짚었다는 점에서, 특히 소설이라는 장르의 역할과 가능성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제임스는 근현대 문학의 주요 이정표를 세운 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제임스를 ‘19세기 사실주의의 대가’이자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초석을 놓은 작가’라고 쓸 때 우리는 이 같은 호칭들이 조금은 혼란스러운 명명 아닐까 고개를 갸우뚱한다. 흔히들 사실주의와 모더니즘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조라고 보기 때문인데, 이는 제임스가 살았던 당대의 문예사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19세기 중반 사실주의 사조가 등장하면서 ‘소설은 삶의 재현’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제임스가 사실주의의 대표 주자로 꼽힌 것도 이때다). 다만 제임스가 이해하는 ‘재현’은 ‘현실에 얼마나 가까운가’를 강조하는 19세기의 경향과는 다른 면모가 있었다. “제임스는 ‘현실성’보다는 ‘현실의 분위기’라는 표현을 쓰고, ‘환영’(illusion) 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적절한 번역어를 찾기 힘든 ‘환영’이라는 단어는 한마디로 현실로 착각할 만한 것을 뜻하는데, 거울을 들이댄 듯 현실과 똑 닮아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 존재하는 듯한 생동감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제임스에게는 실제로 있을 법한 일인가 아닌가라는 통상적인 기준이 중요하지 않고, 사실성의 기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로맨스와 사실적인 소설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이다.”(13~14면)

제임스의 이 같은 생각은 소설이 현실 그 자체의 재현이 아니라 그 현실을 소재로 삼는 소설가의 의식의 산물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결국 핵심적인 것은 작가 자신의 인식과 상상력이다. 여기서 우리는 제임스가 “객관적 현실의 반영에서 주관적 인상으로 소설의 강조점이 옮겨 가는 전반적 변화의 시작점”(14면)에 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삶이 알아서 그 안에 숨결을 불어넣어」는 그의 대표작 『한 여인의 초상』의 뉴욕판 서문으로, 제임스는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젊은 여성을 택한 것이 당대 사회에 적지 않은 충격을 주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작가 스스로 근대 이후 여성의 역할이 커진 것을 날카롭게 포착해내긴 했지만 책으로 써낼 때의 압박감은 만만치 않았다.

“어떤 논리적 심화 과정을 통해서 이 보잘것없는 ‘인성’, 총명하지만 주제넘은 젊은 여성의 그저 가냘픈 그림자에게 ‘주제’로서의 고상한 속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을 손상할 어떤 얄팍함을 피해야 그 주제가 최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 총명하든 총명하지 않든, 수백만의 주제넘은 젊은 여성들이 매일매일 각자의 운명에 맞서는데, 그 최대치에서 무엇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들의 운명에 열려 있기에 우리가 그것을 두고 소동을 벌여야 한단 말인가?”(159~60면)

그때 제임스에게 떠오른 것은 다름 아니라 ‘의식으로서의 소설’로, 당시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은 다음과 같았다. “젊은 여성의 의식을 핵심 주제로 삼는다면, 내가 원하는 만큼 흥미롭고 멋진 어려움이 생기겠지. 중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이어야 해.”(164면) 갈수록 현실을 포착해내기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제임스가 택한 것은 ‘보는 행위’였다. 제임스는 「소설이라는 예술」에서 소설과 미술이 가까운 관계라고 강조하는데, 이는 소설이 미술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한 장르이고 또한 이미지와 장면으로 구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이미지와 장면이 소설가의 머릿속에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의식으로서의 소설’은 새롭게 그 의의를 획득한다. 어떤 문학이 예술이며 아닌가를 논할 때에 헨리 제임스의 「소설이라는 예술」이 주요한 기준점으로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형철 평론가가 잘 짚어준 것처럼 “제임스에 따르면 소설에선 (플롯이 아니라) 인물이 먼저이고, (도덕이 아니라) 진실이 중요하다. 인간의 내면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인생의 진실 쪽으로 부서지듯 나오는 소설”, 그것이 곧 예술이다.

흑백으로 가를 수 없는,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삶을 대면하는 법

이 책에서 제임스의 발길을 따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을 걷다 보면 그가 유럽 곳곳을 관찰하면서 ‘미국의 기준’을 언급하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른 한편, 그는 미국 태생이고 한동안 미국에서 지내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삶 동안 유럽에 거주하면서 미국 사회를 냉철하게 평가했다. 한마디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신세계 미국과 구세계 유럽의 교류와 충돌’이었다.

근대 사회의 변화에 무척 민감했던 제임스도 미국의 극적인 변화 앞에서는 상당한 충격을 느낀다. 뉴욕에 마침 새로 지어진 수많은 고층빌딩을 보며 그 전과 확연히 달라진 미학적 면모를 깨닫고, 기존의 삶 영역과는 달리 만들어진 미국의 공간들이 본래 유럽인들이 구축해놓은 ‘사적인 삶’이라는 전통을 송두리째 뒤흔든다고 보았다. 이와 동시에 미국인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면서는 ‘꼭두각시 인형’ 같다고 비평하는데, 이는 근대의 주체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부품으로 전락했음에도 자기 스스로를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 보는 모순을 꼬집는 말이기도 하다.

제임스는 평생 전업작가로 살면서,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 속으로 함께 걸어 들어와 각 인물이 특정한 장면에서 중요한 면모를 읽어내고 깨닫는 과정을 함께 경험하기를, 더 나아가 각 인물 앞에 놓인 여러 상황까지 읽어내기를 소망했다. 이처럼 소설을 통해 사고를 훈련하다 보면 독자 스스로 자신의 실제 삶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제임스에게 소설의 몫이란 바로 이 같은 인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엮고 옮긴 정소영 번역가도 제임스와 같은 희망을 품는다. “제임스에게 도덕의식은 선악이나 옳고 그름의 잣대가 아니라 ‘흔들려 깨워진 지성’이었던 것이다. 소설에서 위로나 공감을 구하려는 독자에게 제임스 소설이 제공할 것은 많지 않겠지만, 흑백으로 가를 수 없는, 거미줄처럼 얽힌 복잡한 삶을 대면하는 법을 알고 싶은 독자라면 제임스에게서 읽어낼 것들이 여전히 많으리라 믿고 싶다.”(15면)

추천평

엘리엇은 자신의 비평이 시 창작 과정의 부산물이어서 그 한계가 분명하다며 이를 ‘작업실 비평(workshop criticism)’이라 부른 적이 있지만, 소설 쪽에서 긍정적 의미의 작업실 비평을 떠올려 보면 제임스의 「소설이라는 예술」이나 「『한 여인의 초상』 뉴욕판 서문」만큼 영향력 있는 글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너무 늦은 번역이지만(덕분에 적임자를 만나 원문의 섬세함이 보존됐다), 이제라도 나와서 반갑다. 소설도 예술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이토록 정교한 수고가 당시에만 필요했다면 다행이겠으나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왜 어떤 소설만이 예술이며 다른 것은 아닌지를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권위적인 일이라고 믿는 동시대인들이 적지 않다. 제임스에 따르면 소설에선 (플롯이 아니라) 인물이 먼저이고, (도덕이 아니라) 진실이 중요하다. 인간의 내면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 인생의 진실 쪽으로 부서지듯 나오는 소설. 나는 이 기준을, 인류가 지켜야 할 불씨처럼, 백 수십 년 전의 제임스에게서 건네받는다. - 신형철 (평론가)
헨리 제임스 같은 작가는 전형적인 골칫거리다. 안 읽고 넘어가기엔 고전이고 읽기엔 시간과 노력이 든다. 백 년 전에 죽은 상류층 백인 남성 소설가의 작품을 고전이라는 이유만으로 다시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산문을 읽는 것이다. 그런데 산문을 읽기 시작하면 깨닫게 된다. 소설이 그 어떤 예술보다 진지한 예술이라는 사실을. 최소한 헨리 제임스는 그렇게 믿었다. 삶의 총체성을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장르가 소설이라 믿었고 자신의 믿음을 전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소설 앞에서 진지해야 한다. 소설 앞에서 진지하다는 것은 곧 삶을 진지하게 대한다는 의미이므로, 간혹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이 진지함이 실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삶에서 중심을 잡을 유일한 방법이므로. 그렇게 헨리 제임스의 산문을 읽는 것은 우리가 삶을 대하는 가장 진지한 방법 중 하나가 된다. - 정지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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