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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안의 슬픔이 너무 많이 사냥당했다
안민
여우난골 202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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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인의 말·5

1부 무의식 프리즘

기억 내부를 활강하는 새들·13
파절되는 건반·33
자화상·36
페르소나·38
눈동자에 새장이 맺히고부터·40
바람의 書·42
거울 안에서·44

2부 추억이 많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방아쇠수지증·47
액자·50
상자적 孤寂· 52
저녁과 밤 사이의 Seesaw·54
분홍 스웨터·56
우연·58
MUM·61
y에게·62
북회귀선 아래서·66
신곡·68
백장미·70
설국·72
Noncontact·74
휘어진 단편· 76
Smorendo·77
회화적 슬픔·78

3부 만질 수 없는 얼굴의 수집

못·83
기우제·86
9+1·88
말없이 말을 걸어오는·92
우물·94
표류·96
불면·98
편도 여행·100
나는 사진입니다·102
슬픈 직립·104
태엽 인형·106
비의 悲歌·108

4부 기면을 앓는 사유

제4구간·113
크로노스·114
미래의 일기를 미리 적어 놓던·115
겨울꽃·116
의문의 문·118
광에 관한 리포트·120
사막의 구성·122
성장기·124
죄와 손·127
존재들·130
음악·132
복제·134
운동장·136
고해·138
설계자를 위한 랩소디·140
그림자가 낳은 독백·142

해설 | 박대현(문학평론가)
무의식의 설계 도면·145

저자 소개 1

안병호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18년 제18회 부산 작가상을 수상했으며 2018년, 202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작가로 선정되었다. 시집으로는 『게헨나』, 『아난타』가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愚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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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9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68쪽 | 22g | 124*198*20mm
ISBN13
9791192651149

책 속으로

그리하여 나는 나 대신 그대를 팔아 여기까지 왔고 그대는 유리 절벽 위에 놓여 있다 지나온 경계마다 은빛 눈이 내려 슬픔은 메우지 못했다 이제 벽 너머에선 어떤 음률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왜 허공에 발을 헛디디고 있었을까 햇살조차 깨어진 부도(浮屠)처럼 날카롭다

그대의 동공 속에 불안한 속도를 견뎌낸 경계인이 보인다 그 동공의 무늬는 미로다

여기까지 오면서 나는 그대에게 비겁하거나 용감했고 말이 많거나 적었고 무거우면서도 중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희망을 떠올리며 절망에서 허우적거렸다 얕게 분노하고 깊게 뒷걸음질 쳤다 얼굴을 외면한 어느 철학자처럼 이 모든 것은 계산된 연극이었던가 몸 위로 젖은 나뭇잎 겹겹이 쌓인다

그대에게 늦은 안녕을 고한다 미안하다 나의 철창이여 허물어지는 육신을 지탱한 중심이여 이제부터 나를 외면하라 그러면 본 적 없는 표정이 그대에게 스며들 것이다 잘 있거라 어찌하지 못할 눈동자여 해빙점을 분실한 심장이여

이름도 없이 절벽으로 밀린 그대는
허구로 뭉쳐진 몸을 견뎌낸 비겁한 나의 나였다
---「자화상 - 마음에게」중에서

나는 질주한다,
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원래 숨을 헐떡인다. 느리게 걷지 않는 것은 보이는 전부가 다 저장되어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아서다. 나는 무엇도 낳지 않았고

수억 년 전에서 왔다. 아버지가 나이고 내가 아들이다.

연인이었고 음악이었고 애증이었다. 유령이었고 고독한 손결이었고 결국엔 성난 눈이었다.

잎사귀가 죄다 추락한 나무, 쓰러진 채 깜박이는 가로등, 펄럭이다 흐느끼는 간판, 브레이커가 고장 난 사랑, 피의 혁명, 그 무엇도 나와는 무관하다. 나는 누구의 울음도 원하지 않았다. 단지 깨어져 버릴 관능을 동경했을 뿐

그대는 내가 해석되지 않고 나도 내가 해석되지 않고
단지 멈추지 않고 주행토록 왜곡되었을 뿐,
그 무엇과도 공범은 아니다.
물론 역주행은 있었겠지. 허공을 향해서도

수천 개의 뼈가 덜거덕거린다. 스산한 신음을 뿌리며

고백건대 어둠과 침묵의 덩어리인 내가 스스로 울음을 흘린 적은 없다. 진흙이 목구멍까지 밀치며 들어오곤 했다. 나무와 강물과 바다와 바위와 모래가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들이쳐

나인 듯 울었다.

국경과 국경을 지나면서 혹은 해변과 산정을 지나면서
몸 안의 슬픔이 너무 많이 사냥당했다.
---「바람의 書 - 사람들이 나를 느끼지 않고 이해하려 하므로 그들이 두렵다」중에서

너와 내가 오르내렸고 균형이 흔들리고 있었다 네 스물셋보다 나의 스물일곱이 가벼웠는가보다 그것은 마음의 중량, 저녁은 깊게 익어 갔고 덜 익은 감정만 네게로 기울고 있었다 멀미로 울렁이던 얼굴, 내 하체의 질량이 가난하다는 게 조금은 슬펐다 까닭에 함께 포개지진 못하여 가지런하고 정숙한 네 다리 건너편에서 흔들리기만 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조금씩 나를 흘리던 지대 나는 너의 중심에서 멀어져 더욱더 가벼워졌고 시차를 앓았기에 어둠 스며들면 어느 별에라도 닿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추억이 많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하지만 아직도 견디지 못할 만큼 심장은 불규칙적이다 추락은 어떤 예고도 없기에 캄캄한 허공의 체류는 막막하다 저편엔 너 대신 술에 취한 또 다른 네가 있고 스물셋의 너는 여전히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새의 동공 같은 빛깔로 밤은 짙어가는 데 불안이 어른거려 나는 점점 더 가벼워진다 그때 네가 나를 가늠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내가 나를 버리고 있었다 넌 몸이 어렸고 나는 영혼이 종잇장처럼 얇았다

옆에서 지구본이 둥근 윤회를 한다 무릎을 꿇고 싶을 만큼 고독한 밤, 나는 푸른 지대를 한참 지나 한없이 기울어져 가고 지금은 나를 대신하여 시소가 삐걱대며 울고 있다

---「저녁과 밤 사이의 Seesaw」중에서

출판사 리뷰

유기체의 시간과 출구 없는 유랑

안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몸 안의 슬픔이 너무 많이 사육당했다』가 시인수첩 시인선 75번째로 출간되었다. 안민 시인은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여 부산에서 성장하였다. 2010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뼈의 기원’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신춘 당선 이전인 2004년 근로자문학제에서 시 부문의 금상을 받은 것을 계기로 시작 공부에 매진한 결과이기도 하다. 등단작인 ‘뼈의 기원’은 진정성과 설득력을 겸비하고 있으며, 시적 화자가 들려주는 진지한 발화는 시종 중량감을 가지고 시적 구성을 탄탄히 떠받치는 힘을 발산한다는 평을 받았다. 첫 시집 『게헨나』에서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상상력의 파고를 보면 황홀함”이 느껴지고, “언어의 숲을 뚫고 나가는 저돌적인 돌파력과 정반대의 사건들이 충돌하며, 낯선 장소들과 사물들이 포개지는 독특한 시적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호평을 받았다. 두 번째 시집 『아난타』에서는 “낭만주의적 신체와 불화의 윤리학”을 다루고 있으며, “분절된 신체의 이미지들이 시적 자아의 온전한 몸을 대신해 세계와 만나서 불화를 겪고 한계를 노출함으로써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찬사를 받았다.

안민 시인은 세 번째 시집의 주된 흐름은 “내면의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관한 서사”라고 말한다. “좀체 모습을 드러내기를 거부하고 잠행하는 내 안의 나를 발견하고 가면이 아닌 진실의 자아와 대화하려 하”였다고 그는 강조했다. 더불어 “인간의 몸과 영혼의 불완정성에 대해서 다루고 싶었”다고. 그는 또한 2023 『시인수첩』 가을 호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발화한다. “시 안의 박제된 나는 여전히 위태롭고 불안스레 흔들리는 그림자이지만 눈동자는 형형해야 한다고 늘 다짐한다. 시의 내부는 나의 신전이며, 내 유전자의 시원이”라고. “나란 유기체는 완전히 소멸할 때까지 출구 없는 시의 문장 속을 유랑”할 것이라고. 그러한 까닭에 이 시집은 그의 말대로 불안한 서사의 유랑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집의 문장을 흐르고 있는 바다와 안개와 몽롱한 서사들은 『게헨나』의 황홀함과 『아난타』의 불화의 이미지들을 아우르면서, 새로운 유랑을 떠나는 공포와 불화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살바도르 달리는 “기억의 지속”을 언급하며, 작품에서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는 시간 속 죽음에 대한 강박증과 불안을 연상하는데, 그는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을 경유하면서 베르그송의 “기억의 시간론”을 향유한다. 그의 시가 매혹적인 것은 불안과 고통과 위태로운 아우라의 기억 속에서 시를 살아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시 안에서 점유한 잠행의 편린들을 이 시집은 미려하고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시집에 관하여 나눈 안민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내용이다

잠재의식(subconsciousness) 속 분리된 자아와의 만남

인간은 고독과 불안의 파장에 갇혀 방황하다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닌가, 하는 思惟를 자주 하곤 했다. 고독과 불안의 기저는 알 수 없는 유전자 풀(fool)에서 시작하여 결국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일 것이다. 하여 잠재의식(subconsciousness) 속, 분리된 자아와 황막한 오지를 발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기억 내부를 활강하는 새들’과 ‘페르소나’

에서 표현했듯 이 시집에는 무의식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분절된 추억의 메타포로 고통이 고통을 껴안는 모습을 의도했다. 만질 수 없는 얼굴, 가면을 통해서는 날것 그대로의 자아를 묘사하여 생의 허무를 드러내려 했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극과 극은 통한다. 어쩌면 슬픔과 치유는 일란성 쌍둥이일 수도 있다. 까닭에 인간이 지닌 한계와 고통을 이해하고, 불안과 우울을 정화하기를 기대한다. 작품이 중의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많을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을 통해 시문학 예술의 다의적인 측면을 느끼고 공감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저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무의식의 설계 도면
-사냥당한 슬픔의 연원에 대하여


안민 시인은 이 시집에서 무의식을 탐색한다. 시집의 제1부 제목이 ‘무의식 프리즘’이다. 무의식은 인간의 의식에 근원적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의식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근본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천착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의 단서는 그의 자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독을 하찮게 여긴 죄로/ 전생에서 지금까지 어둠에 감금되어 있다/ 바람은 스산하고 내 고통엔 유통기한이 없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은 필시 심리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에 유통기한이 없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심리적 실재 속에서 그것의 내력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전생”에까지 그 연원이 미친다. “전생에서 슬픔이 흘러내리는 것일지도 모를 일”(「북회귀선」)에서뿐만 아니라, 전생에 대한 진술은 그의 시 속에서 자주 반복된다. 「기억 내부를 활강하는 새들」을 비롯한 여러 시에서 ‘전생’에 대한 사유는 자주 드러난다. 무의식의 연원에 대한 천착은 시인의 현생과 전생까지의 모든 삶을 아우르는 방대한 영혼의 작업이다…. 중략

시인은 자신의 시를 두고 ‘진언(眞言)의 독백’이라 선언하고 있으며, “그 속의 음률은/ 사멸치 않고 유계까지 퍼져갈 것”이라고 말한다. 진언, 혹은 주술이라는 어휘는 시인이 그 자신의 무의식적 기억에 ‘신들려’ 있음을 말해준다. 시인은 무의식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기억에 압도당한 상태다. 이 진언의 독백, 다시 말해 이 시를 통해 말해지는 기억의 ‘음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유계(幽界)까지 지속되리라 진술한다. 하여, 시인의 주체 혹은 자아는 ‘영혼’의 역사로 비약한다. 영혼의 역사 깊숙이 은폐된 ‘기억의 내부’에는 그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기억의 질곡이 존재하며, 그 질곡 속에 욕망의 대상인 ‘i’가 존재한다. 이 질곡의 기억에는 ‘자살한 이모’, ‘i’의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유계의 어머니 목소리”가 존재한다. 이 시에서 ‘나’와 그들은 “치밀하게 엉켜있”어 “방향을 잃을 때가 많”다. 즉,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사랑의 욕망과 결핍, 그리고 원죄 의식으로 얼룩진 소년 시절의 내면 풍경을 형상화한다. 그리고 시인은 스스로의 치유를 소원한다. “진정한 치유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라는 칼 구스타프 융의 전언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융의 말처럼, 무의식에의 천착은 ‘자기’(the self)에의 접근이다. ‘자기’의 발견은 무의식과 자아(ego)의 균형을 통한 이루어진다. 그것이 융이 말한 ‘개성화 과정’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기’라는 개념은 인간이 포착하기 힘든 인식 불가능한 본체를 표현하는 하나의 구조로서 인간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융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 삶의 목표로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도 하다. (칼 구스타프 융, 융 저작 번역위원회 역, 『융 기본 저작집?3』, 솔, 2004, 159, 162쪽.)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이라니. 시인은 융의 ‘자기’를 실현하는 길을 지향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길의 중간쯤에 멈춰 서 있다. 시인은 통증을 자신의 구원으로 삼는다. “통증이 곧 구원인 셈”(「기억 내부를 활강하는 새들」)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의 시는 줄곧 “구름처럼 모호하고 유리그릇처럼 위태롭”다. “꿈속의 악마와 성자 그리고 소녀와 연상의 여인들과 그 무대들은 불행하게도 소년이 지워져도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기억 내부를 활강하는 새들」)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 박대현 문학 평론가의 시집 해설 중에서

시인의 말

고독을 하찮게 여긴 죄로
전생에서 지금까지 어둠에 감금되어 있다
바람은 스산하고 내 고통엔 유통기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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