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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백한 얼굴
2. 어두운 그림자 3. 창변에서 4. 재회 5. 일요일마다 6. 배신 7. 미로 8. 이혼 조건 9. 소식 10. 여수 11. 푸른 운하 작품 해설 |
Park, Kyung-Ree,朴景利,박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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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윤은 꽃으로 잠시 눈을 주었다가 은경을 바라본다. 몸이 쇠약한 탓인지 몹시 맑은 눈이었다. 은경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리에 나왔을 때 은경은 이치윤의 말이 자기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런지 그는 기분이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치윤이 냉정한 사람같이 보였기 때문에 하챃은 그 말이 크게 울려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분 눈에는 아픔이 있다. 본시부터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야.’ 그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은경의 눈에도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꿈이 짙게 모여든다.
---「1. 창백한 얼굴」중에서 “사람에 대하여 꿈을 가지는 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습니다. 돈이나 명예가 허망하다고 하지만 사람보다 허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살고 있을까요?” “애정이 인생의 전분 줄 아십니까?” 은경은 대답을 하지 않음으로써 애정이 인생의 전부라는 말을 긍정한다. ---「3. 창변에서」중에서 은경은 남식의 언동이 언제나 노골적이며 거칠었으나 액면 그대로 악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기분도 가볍고 자유스럽게 되고 또 말도 거침없이 나왔다. 그러나 이치윤에게는 어려운 마음이 항상 가셔지지 않았다. 조심스러웠고 가슴이 아프도록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를 언제나 주척거리게 하였다. ---「5. 일요일마다」중에서 은경은 영화를 보는 동안 아까 낮에 더 외로워지면 어떡하느냐고 묻던 남식의 말이 생각났다. 그의 말대로 은경은 더 외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 인연도 없이 수천의 타인들 속에 얽섞여 우뚝 혼자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 처량한 것만 같았다. 다 즐거워서 웃고 근심되어 손에 땀을 쥐는데 자기만이 외딴 곳에 홀로 아무런 감동 없이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6. 배신」중에서 이치윤은 은경의 얼굴에서 얼른 눈을 돌렸다. 감정이 메말라 버린 찬희에 비하여 은경은 너무나 싱싱한 젊음과 희망에 충만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찬희가 황량한 벌판에 쓸쓸히 앉아 있는 것이라면 은경은 햇볕 쏟아지는 푸른 잔디에 앉아 있는 것이다. 필경 사람이란 남의 불행을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스스로 헤치고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을 이치윤은 생각하였다. 그러한 생각은 찬희를 위하여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8. 이혼 조건」중에서 남식은 울고 있는 은경을 내버려 두고 담배에다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를 뿜으며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꼬마들이 줄넘기를 하고 있다. “일시적인 격정으로 은경 씨의 선택이 그릇된 것이라 한다면…… 평생을 넓은 바다에서 헤매어야 한다면…….” 남식은 놀고 있는 아이들로부터 눈을 떼지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이젠 헤매지 않겠어요. 그분 마음을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겠어요. 운하를 팔래요. 그분, 그분은 고독해요. 운하를 파서 바다를 끌어들일래요.” ---「11. 푸른 운하」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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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삶이 문학보다 먼저지요.” 고전의 품격과 새 시대의 감각을 동시에 담아낸 박경리 타계 15주기 추모 특별판 1957년 단편 「계산」으로 데뷔해, 26년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 『토지』로 한국 문학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남긴 거장 박경리. 타계 15주기를 맞아 다산북스에서 박경리의 작품들을 새롭게 엮어 출간한다. 한국 문학의 유산으로 꼽히는 『토지』를 비롯한 박경리의 소설과 에세이, 시집이 차례로 묶여 나올 예정인 장대한 기획으로, 작가의 문학 세계를 누락과 왜곡 없이 온전하게 담아낸 의미 있는 작업이다. 이번 기획에서는 한국 사회와 문학의 중추를 관통하는 박경리의 방대한 작품들을 한데 모아 구성했고, 새롭게 발굴한 미발표 유작도 꼼꼼한 편집 과정을 거쳐 출간될 예정이다. 오래전에 고전의 반열에 오른 박경리의 작품들은 새롭게 읽힐 기회를 갖질 못했다. 이번에 펴내는 특별판에서는 원문의 표현을 살리고 이전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을 넘어, 새로운 시대감각을 입혀 기존의 판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책을 선보인다. 이전에 박경리의 작품을 읽은 독자에게는 기존의 틀을 부수는 신선함을, 작품을 처음 접할 독자에게는 고전의 품위와 탁월함을 맛볼 수 있도록 고심해 구성했다. 이전의 고리타분함을 말끔하게 벗어내면서도 작품 각각의 고유의 맛을 살린 표지 디자인으로, 독서는 물론 소장용으로도 손색이 없게 했다. 한국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이름, 박경리 문학의 정수를 다산북스의 기획으로 다시 경험하길 바란다. “애정이라는 것은 받지 못하는 고통보다 주지 못하는 고통이 더욱 큰 거다.” 관계를 변화시키는 여성 인물의 능동적 사랑 시대의 흐름을 뛰어넘는 박경리 문학의 진수 다산북스에서 새롭게 출간된 『푸른 운하』는 박경리의 또 다른 걸작이다. 박경리는 『푸른 운하』를 비롯해 『애가』, 『내 마음은 호수』, 『은하』 등 애정 서사가 중심이 되는 많은 소설을 남겼다. 박경리의 연애소설이 대중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문학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 연애소설의 전형성을 따르지 않았다는 데 있다. 특히 작품 속에서 여성 인물이 각자 생의 주체로서 보이는 능동성은 개인감정을 넘어 사회적 코드로 사랑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독자로 하여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1960년대 초에 발표한 『푸른 운하』는 박경리의 애정 서사에서 보이는 여성 인물의 능동성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주인공 송은경은 사회적인 시선을 의식하고 자책감에 물러선 치윤을 찾아 떠남으로써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랑을 실천한다. 그 외에도 찬희, 경란, 인혜에 이르기까지 여성 인물이 세대와 사회적 지위를 막론하고 능동적 사랑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능동성은 저자가 추구하는 사랑의 본질을 반영함으로써 시대의 특수한 사회적 코드로 확장되어 나타난다. 치윤이 경란과의 관계에서 보여주었던 사랑에 대한 사회적 코드로서 가부장적 위계는 은경을 통해 변화하고, 김남식은 적극적이고 자기감정에 솔직하면서도 상대방의 마음을 존중할 줄 아는 새로운 이상적 인물로 그려진다. 윤 변호사 역시 찬희를 한 인격체로서 존중하고 조력함으로써 치정에 얽힌 남녀관계를 극복한다. 사랑의 완성은 사랑의 주체와 대상 사이의 감정적 교감으로 통합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무 살 송은경과 삼십 대 이치윤의 관계가 나이, 남성, 사회적 지위로 위계가 만들어지지 않고 성숙하고 평등한 사랑에 집중해 있다는 것, 그리고 남성의 위력이나 경제력, 신분 등 외적인 요소가 아닌 오롯이 남녀의 사랑이라는 정서적 끌림과 쌍방향적 소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은 이 작품의 현재적 가치를 증명해준다. “이젠 헤매지 않겠어요. …운하를 파서 바다를 끌어들일래요.” 이해와 존중에 바탕을 둔 진실된 마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 『푸른 운하』는 갓 스무 살이 된 송은경이 자신이 싫어하는 김가에게 시집보낸다는 계모와 싸우고 무작정 상경을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송은경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던 어머니의 고등학교 후배인 허찬희의 집으로 향한다. 결혼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허찬희는 국회의원인 남편 김상국이 소실을 얻어 딴살림을 차렸음에도 그 사실을 묵인하며 살아가는 처지였고, 그런 연유로 늘 고독감을 느끼던 찬희는 유독 은경과 은경의 오빠 민경에게 마음을 썼던 터라 은경을 반갑게 맞아들인다. 바로 그날 김상국의 비서인 이치윤이 급작스레 급성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게 되고 은경이 병문안을 오가면서 치윤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이치윤 역시 자유분방한 전처 경란과 달리 순수한 매력을 가진 은경에게 흔들린다. 그러나 둘의 사랑은 순조롭지 않다. 이치윤이 한 번 결혼했고 현재 별거 중이라 해도 그 사이에 딸아이가 있으며, 전처가 그를 쉬이 놓아주지 않을뿐더러 그 또한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은경과 치윤 사이에 장벽이 생기고, 민경의 친구 박지태와 치윤의 친구 김남식이 은경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관계가 복잡해지고 갈등이 심화된다. 그럴수록 이치윤과 송은경의 사랑은 더 애틋해지고, 이치윤이 전처와 이혼을 서두르면서 마침내 둘은 결실을 맺을 듯 보인다. 허나 자신으로 인해 은경이 힘들어질 것을 예감한 이치윤은 은경에게 행복하게 잘 살라는 편지를 남긴 채 시골로 떠나고, 은경은 그런 치윤을 직접 찾아 나서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은경이 시골로 가버린 치윤을 찾아가겠다고 할 때, 남식은 “평생을 넓은 바다에서 헤매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은경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젠 헤매지 않겠어요. 그분 마음을 차지하려고 애쓰지 않겠어요. …운하를 파서 바다를 끌어들일래요.”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통제하려 한다면 사랑의 본질은 퇴색되고 만다. 송은경은 치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 마음은 욕망이 아니다. 은경의 사랑은 망망대해처럼 잡히지 않을 것만 같은 치윤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조건이 붙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이 시대, 이 작품을 통해 다시금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 되새겨 보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