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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팔트 007
- 돼지 041 - 동상 056 - 버그 076 - 호수 098 - 그 여자 124 - 난파 133 - 행운 154 - 글렌 167 - 미립자 184 - 섬 189 - 크리스마스트리 207 - 우편물 214 - 내포 224 - 등대 243 옮긴이의 말 258 |
Sylvain Te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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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하는 인간의 영혼에서 길어올린 필름 조각
남명현 소설/시/희곡 PD (mhyeon_0707@yes24.com)
누군가 『노숙 인생』이 어떤 책인지 묻는다면,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보다 여러 개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다. 원경으로 펼쳐진 고요하고 한적한 바닷가, 규칙적으로 일렁이는 파도.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깊은 숲 속 낮은 소리로 우는 풀벌레. 구름 낀 하늘 아래 작은 바위섬 하나. 그 섬에서 불확실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멍한 눈빛의 이방인... 책을 덮고 나면 한 편의 고요한 단편영화를 감상하고 외딴 영화관을 나설 때의 복잡한 감정이 차오른다. 여운에 젖어 싱숭생숭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를 보러 오기 잘했다는 생각만큼은 분명한. 영화 내용을 잘 이해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그래도 작품의 잔상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는 막연한 기쁨.
테송의 문장들은 어딘지 무미건조하다. 하나하나 떼어내서 살펴보면 그다지 강렬한 특색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정어리떼처럼 조직적으로 결합되어 불현듯 사람의 마음을 깊이 찌른다. 때문에 열 장 남짓한 비교적 짧은 분량 가운데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이야기 초반이 아니라 후반에 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을 읽어가는 것은 마치 굴곡이 심한 물미끄럼틀을 타고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첫 한두 쪽 정도는 어떤 서사가 전개될지 가늠하기 어렵다. 하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 급류에 말려들듯 자연스레 서사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까지 결말을 예측할 수 없으며 마무리는 늘 의미심장하다. 그럼에도 이 미심쩍은 느낌을 위해 활자 사이를 유영했구나 하고 깨닫는다. 이야기가 끝나면 한동안 벙벙하고 이를 곱씹으면 왠지 먹먹하다. 낮고 오랜 울림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책 속에는 심성이 곱고 아름답기만 한 인물도 없지만, 악의로 가득찬 사람 또한 없다. 투박한 행동과 말투 기저에는 사랑이라는 연한 속살이 자리하고 있다. 운명의 장난과 갑작스러운 비극에 말려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사람들. 작가는 이 사람들의 '모난 부분'에 카메라 렌즈를 줌인한다. 우리와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마치 우리 모습을 그려낸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모난 부분을 이토록 세심하게 담아내는 작가가 흔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3인칭 시점 소설이 많은데도 대개 1인칭으로 읽히는 건 이 때문이다. 한 작가가 담아냈다고 믿어지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주제, 다채로운 배경과 인간상. 오직 먼 길을 떠나 여러 장소를 맴돌며 진득이 관찰하고 사유한 사람만이 자아낼 수 있는 문체. 아름답다고도 괴이하다고도 은밀하다고도 말하기 힘든, 어떤 수식어로도 충분하지 않은 이야기집. 그럼에도 이 작품집에 굳이 어울리는 단어를 찾으라면 '노숙'이다. 그 까닭은 책의 말미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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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길 때문에 느리게 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풍경 구석구석을 알았으며, 사고 때문에 슬퍼할 일이 없었고, 시간적 여유는 있었으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멋진 새 아스팔트 위에서는 달랐다. 모두가 돌진하면서 피가 뜨거워졌다.
--- p.33 변한 건 우리가 아니라 사물의 가치라는 겁니다. 그게 예전과 같지 않다고 했지요. 고기 한 조각이 쟁취였을 때는 돼지 한 마리의 가치가 컸지요. 고기 한 조각이 습관이 된 뒤로 돼지는 그저 생산품이 되었고요. 고기가 권리가 된 뒤로 돼지는 제 권리를 잃었다는 거죠. --- p.49 지뢰는 모범적인 보초다. 그것은 몇십 년 동안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매복한 채 제 자리를 지킨다. 거미조차 먹이를 기다리다 지치고 마는데, 지뢰는 욕구 없는 병사다. --- p.57 날짜를 아는 건 존엄의 표현이다. 감옥에서 날짜를 세지 않는 자들은 다른 자들보다 더 빨리 미쳐간다. --- p.99 숲과 자갈길 사이에서 망설이며 하루를 보냈다. 어떤 이들에게는, 행복이 다른 곳에 있다고 확신하면서, 삶이 그렇게 흘러간다. 적어도 그는 그런 암초를 피했다. 은둔생활은 그에게 불만에 대한 예방주사를 놓아주었다. --- p.119 대리석 시대의 그리스에서 영원한 견고함을 추구하는 사유학파들이 발전한 것은 그 지리적 단순성 덕이다. 이런 풍경에는 정신적 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공기, 땅, 바다라는 요소들의 표현으로 축소된 자연은 철학자들에게 세상의 배열방식을 명확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작업을 도왔다. --- p.144 이들의 마음속에 권태가 생겨났다. 그들은 시간의 적도무풍대에 갇혀 있었다. 일 분 일 분이 고요한 파도에 휩쓸리는 빈 조개껍질처럼 흘러갔다. 난파는 그들을 세상의 흐름에서 배제했고, 생존은 그들을 시간의 흐름에서 빼냈다. 마침내 태평양에 밤이 내리면, 하루가 그들에게는 한 달처럼 길게 느껴졌다. --- p.197 지옥은 타인이 아니라 타인들이 도착할 가능성이다. --- p.225 매년 그들은 3주 동안 항해했다. 소금보다 걱정을 잘 녹이는 건 없었다. 게다가 에드는 일 년 내내 여행했다…. 이 배는 그들 사랑의 풍압 중심점이었고, 만남의 장소였다. 뱃머리에는 파란색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애드 비탐ad vitam(삶에게). 파도의 덧없음에 내거는 영원의 약속. --- p.2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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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쿠르상 단편 부문 수상(2009)
노숙하며 내면을 들여다보기. “숲에는 정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정의인 건 드문 일이다.” 프랑스의 작가 실뱅 테송이 자연과 인간에 관해 쓴 책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우리가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리, 즉 광활한 세계 속의 아주 작은 부분을 여행하게 될 것임을 깨닫게 한다. 관록 있는 여행가인 이 작가는 노숙을 일상으로 삼으며, 우리를 구소련의 광대한 영토, 전통적인 스코틀랜드, 키클라데스 제도의 가장자리, 심지어 중동의 중심부로 데려가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곳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열다섯 개의 단편은 페미니즘, 동물 복지, 생태학,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나 사회적 현실을 바탕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동시에 동시대성을 유지한다. 이 책에 실린 열다섯 편의 이야기 중 〈아스팔트〉 편의 비극적 운명을 읽다 보면 인간의 애석한 망상이 초래하는 불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조지아의 낙오한 시골에 사는 에돌피우스는 도로라곤 자갈길 하나뿐인 마을에 아스팔트를 깔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미온적인 마을 사람들을 설득한다. 오로지 도시만 꿈꾸며 온종일 빈둥거리는 쌍둥이 딸을 구원할 길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해서다. 아스팔트가 깔리자 첫째 딸은 그 길로 도시를 제집처럼 들락거리다 애인의 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함께 죽고, 딸을 죽게 만든 아스팔트를 원망하며 한밤중에 트랙터를 몰고 가 아스팔트를 온통 파헤쳐놓고 돌아오니 남은 쌍둥이 딸이 슬픔을 못 견디고 손목을 그은 바람에 다급하게 이웃의 차에 실리고 있다. 이웃이 말한다. 다행히 아스팔트 도로가 있으니 도시까지 한 시간 안에만 도착하면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이 한 편의 짧은 이야기 안에 시대와 지리와 그곳 사람들의 삶이 응축되어 있다. 노숙을 일상처럼 살며 세계 곳곳을 누비는 테송의 시선은 늘 이렇듯 사람들을, 그것도 불운한 사람들을 향해 있다. 테송은 파타고니아, 조지아, 아프가니스탄 등을 배경으로 지뢰제거반 병사, 불평등과 학대에 복수하는 여성들, 집약 축산업에 절망한 축산업자, 난파선 약탈자들, 세상 끝의 등대지기… 등을 등장시켜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한껏 펼쳐 보인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저마다 비극적인 운명에 처해 있고 대부분 극적인 몰락을 피하지 못하지만, 부드러운 아이러니가 단편들 전체를 관통하며 독자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각인시킨다. 전체가 행복하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실린 한 편 한 편의 글이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건 무슨 조화일까. 스케일 있는 풍경들에,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이고 순수하면서도 화려한 문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평범하지 않은 주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다양한 인물들의 삶의 면면을 그리고, 현대사회의 명암과 연결 짓는다. 그러면서 고독, 파괴, 휴머니즘 등의 철학적 개념들도 파고든다. “피오트르는 혼자 지내지 않으려고 개 한 마리를, 배고프지 않으려고 총 한 자루를, 춥지 않으려고 도끼 한 자루를 가졌다. 이날 그는 개를 쓰다듬었고, 총에 기름을 쳤으며, 도끼를 갈았다. 모든 야심 위로 숲의 커튼을 치면 삶은 복잡하지 않다.” _ 110p 세상은 우리가 연민을 갖고 봐야 할 불운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인류는 마치 조난자들 같다고, 테송은 말한다. 그에게 인간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무언가에 갇힌 존재다. 그것이 본성이든 환경이든 아니면 물질이든. 하지만 작가는 욕망과 운명의 무게추를 간결한 통찰로 조율하며 이 세상에 조난된 우리의 희망을 자극한다. 인간의 탐욕과 무지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세상과 사람들에 결코 도덕 같은 것을 내비치지 않는데도, 그의 글은 독자로 하여금 “운명의 법과 자연의 힘이 욕망과 희망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자연에 바치는 서정시처럼 존재 내면에 미치는 풍경의 영향력을 유려하게 포착한 이 책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과소비를 생각하게 하고,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 다시 한번 가다듬게 만든다. 상상의 기제가 낳을 수 있는 것들보다 훨씬 시적인 것들을 지리적 현실 속에서 보고 살아온 그가 이 단편들에서는 길 위뿐만 아니라 인간 영혼 속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운명의 법칙과 자연의 힘을 거스르는 인간의 ‘애석한 망상’이 초래하는 불운을 더이상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