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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1. 한국사연구 백년 / 천관우 구(舊)사학과 신(新)사학 왕조말 전후의 한국사학―내국인 왕조말 전후의 한국사학―외국인 3·1운동 후의 한국사학 일본침략전하의 한국사학 민족해방 이후의 한국사학 제2부 2. 삼국사기에 있어서의 역사서술 / 고병익 찬술(撰述)의 경위 논찬(論贊) 열조·산삭(刪削) 삼국 각국에 대한 자세 결어 3. 고려중기의 문화의식과 사학의 성격 / 김철준 4.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의의 / 이기백 머리말 사서(史書)로서의 삼국유사 역사적 위치 현대적 의의 끝맺는 말 5. 삼국유사에 보이는 일연(一然)의 역사인식에 대하여 / 김태영 서언 역사전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 전통의식의 내연과 그 발전적 부활 결어 6. 고려중기의 민족서사시 / 이우성 이규보·이승휴의 세계 영웅시와 역사시 민족서사시로 본 두 작품의 역사적 한계 결어 7. 고려시대의 역사계승의식 / 하현강 머리말 고려전기의 역사계승의식 무인정권의 성립과 역사계승의식 원의 간섭과 역사계승의식 맺는 말 제3부 8. 조선전기의 역사서술 / 정구복 서언 태조∼태종 때의 역사서술 세종∼문종 때의 역사서술 세조∼성종 때의 역사서술 결어 9. 고려사 해제(解題) / 이기백 고려사의 편찬 고려사에 나타난 사관 사료로서의 고려사 10. 17세기의 반존화적(反尊華的) 도가사학(道家史學)의 성장 / 한영우 머리말 규원사화(揆園史話)의 내용요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문화의식과 역사의식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역사인식 방법과 도가사서의 영향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사학사적 위치 맺음 말 |
姜萬吉, 호는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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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상대 부분이 불합리하고 불가신한 기사를 많이 갖고 있음은 사실이지마는 이것이 결코 김부식 등이 함부로 사실을 변개.날조한 때문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그에 선행되는 사료와 사서에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던 것을 김부식등이 오히려 버리지 않고 그대로 채록한 데서 연유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이른바 <구삼국사>인지 또는 그 이전의 사료에서인지는 추정키 어렵지마는 원초의 전래설화와 전승사실들이 중국식. 유교식인 역사편찬 이전에 이미 기록화되어 있던 것을 김부식 등이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채록, 존속시킨 데서 연속된 것이라고 추단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사가들이 김부식을 비난하는 점도 바로 <삼구사기>가 너무도 황당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권근이 <삼국사략>을 저술 진상함에 있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방언이어 상잡''하다고 비난하였고, 윤회 역시 <삼국사기>를 ''부피가 많고 용장하여 읽으면 잠이 오고, 황당하고 미친 소리 같아서 입에 담으면 불경스러운 소리가 된다''라고 하였다. 이런 평은 이극돈의 <동국통감서>에서도 마찬가지인 바 그는 <삼국사기>를 ''조략함이 극히 심하고 거기다 더해서 무계불경한 소리가 있다''라 하였으며, 또 '비야황무'하다 하였다.
--- p.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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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의 상대 부분이 불합리하고 불가신한 기사를 많이 갖고 있음은 사실이지마는 이것이 결코 김부식 등이 함부로 사실을 변개.날조한 때문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그에 선행되는 사료와 사서에서 이미 그렇게 되어 있던 것을 김부식등이 오히려 버리지 않고 그대로 채록한 데서 연유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이른바 <구삼국사>인지 또는 그 이전의 사료에서인지는 추정키 어렵지마는 원초의 전래설화와 전승사실들이 중국식. 유교식인 역사편찬 이전에 이미 기록화되어 있던 것을 김부식 등이 그것들을 버리지 않고 채록, 존속시킨 데서 연속된 것이라고 추단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사가들이 김부식을 비난하는 점도 바로 <삼구사기>가 너무도 황당한 이야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권근이 <삼국사략>을 저술 진상함에 있어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방언이어 상잡''하다고 비난하였고, 윤회 역시 <삼국사기>를 ''부피가 많고 용장하여 읽으면 잠이 오고, 황당하고 미친 소리 같아서 입에 담으면 불경스러운 소리가 된다''라고 하였다. 이런 평은 이극돈의 <동국통감서>에서도 마찬가지인 바 그는 <삼국사기>를 ''조략함이 극히 심하고 거기다 더해서 무계불경한 소리가 있다''라 하였으며, 또 '비야황무'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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