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렴주구와 탐관오리의 발호가 도저히 민중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로 가학적일 때 필연적인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민란이다. 그러나 봉건주의 외에 다른 이념을 알지 못하던 왕조시대의 민란은 몇몇 희귀한 예를 제외하면 대개 거납(拒納)운동의 범주를 넘 어서지 못했다. 전(前 )시대의 `백성`은 먹이의 피라밋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자신의 숙명을 여간해서는 거역하려 들지 않았다. 민란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살려달라는 아우성이지 결코 거역의 몸짓은 아니었다. 언론이 없는 민중이 입을 열 수 있는 방법이 란 오직 그 길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이 소설은 왕조 말기에 제주도에서 3년 간격으로 발생했던 방성칠란과 이재수란을 다룬다. 이른바 남학당(南學黨)이 주축이 된 방성칠란은 거납운동으로 시작되어 자칫 반란으로 뒤바뀔 뻔하다가 좌절된, 비교적 성격이 단순한 민란인 데 비해서 이재수란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뒤얽혀 있다. 거납운동으로 시작된 이 민란에서 어째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희생당해야 했는가? 관 에 의한 천주교 박해가 막을 내린 지 어언간 이십여 년이 지난 세월에 어째서 관이 아닌 민에 의해서 그러한 불상사가 저질러졌 는가? 그것이 과연 천주교측이 주장하듯이 `박해`인가, 아니면 마을 촌로들이 말하듯이 `의거`인가? 교난(敎難)이냐, 교란(敎亂) 이냐? 제주시 동남쪽 황사평의 교인 묘지에는 그때 죽은 교인들을 순교자로 모시고 해마다 추모제가 벌어지고 있고, 민란의 진원 지인 대정읍 인성리 네거리에는 이재수 등 민란의 세 장두를 기리는 삼의사비(三義士碑)가 세워져 있다.
전(全)도민이 봉기했던 이 두 민란은 그 규모로 보나, 그 쟁점의 심각성으로 보나 역사의 정당한 조명을 받아야 함에도 전혀 그 렇지 못한 것이 실상이다. 남학당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이재수란에 대해서도 천주교측 호교가(護敎家)의 아전인수격인 논문 이 두어 편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두 민란에 대한 고찰이다. 당시 제주로 귀양가서 두 민란을 차례로 겪었던 한말(韓末)의 거물 정객 김윤식 의 『속음청사』를 근본 사료로 하고 천주교측이 공개한 신부와 주교의 서한문, 황성신문, 그리고 민간에서 취재한 촌로의 증언을 참고하여 이 글이 씌어졌다.
나는 이 소설에서 문학성의 추구보다는 두 민란의 진정한 성격을 구명하는 데 더 큰 관심을 쏟았다. 민란은 결코 평지돌출 현상 이 아니다. 화산의 분출은 그것의 지질학적 까닭이 있고, 종기가 곪아터짐은 그것의 병리학적 연유가 있게 마련이다. 민란이 있 게 한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병리현상을 찾아내고 그것을 국사의 문맥에서 파악해보려는 것이 이 소설이 지닌 최대의 의의일 것 이다.
민란의 진행과정을 재생시키는 데 나는 적잖이 애를 먹었다. 그 복원작업은 깨어진 사금파리 몇 조각을 맞춰보며 도자기의 원형 을 살려내려는 일과 흡사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상상력이 문제가 되는데, 문학에서 높이 평가하는 `분방한 상상력`은 사건의 원 형을 크게 왜곡시킬 것 같아서 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작가적 상상력에 의한 창조작업일진대, 상상력을 절제하여 복원작업 에 더 열중한 이 작품은 아마 문학이 아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