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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을
강정숙
가히 202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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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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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미안하다, 몸 13/봄밤 14/저녁의 나무 도마 15/별리 16/봄날은 가고 17/애련 동백 18/내 사랑 우도牛島 20/숲 21/사과의 거처 22/오늘은 상품이다 23/천 개의 입 24/구절리 옛집 25/가을 소묘 26/그 가을, 부석사 27/12월 28

제2부

오리의 시간 31/낙과 32/자작나무 숲에서 33/시인의 밥 34/오래된 집 36/통영 37/내상 38/언덕 39/국경 없는 잠 40/이명耳鳴 41/세렝게티 42/먼 사랑 43/냉이꽃 한나절 44/말리다 45/섬 46

제3부

후일담 49/위험한 동거 50/찔레꽃 51/겨울을 건너는 일 52/9월 53/그 저수지 54/진도 바다 55/유월에 병을 앓다 56/저, 하현 57/나를 빚다 58/무릎 안부 59/흐린 날의 풍경 60/이상향을 찾아서 61/개망초처럼 62

제4부

흉터의 힘 65/소금이 올 때 66/살구의 거처 67/동백 유서 68/향기에 찔리다 70/오늘 아침 71/연꽃 질 때 72/봄날도 고운 봄날 73/보름달 74/산그림자 75/사진 한 장 76/개똥지빠귀 78/인도기러기 79/그늘에서 울다 80

제5부

내 것이 아닌 것들 83/그리운 것은 등 뒤에 있다 84/목숨 깊은 손 85/나를 스케치하다 86/지도에 없는 너 88/그해 겨울 89/소래 포구 90/능소화 피는 이유 91/그, 달팽이 집 92/장미석 94/나쁜 봄 95/풀들의 무덤을 지나며 96/데칼코마니 97/멀고도 오랜 다정 98

해설 임지훈(문학평론가) 99

저자 소개 1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2002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환한 봄날의 장례식』과 시조집 『천 개의 귀』가 있다. 수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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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62g | 125*204*8mm
ISBN13
9791158966492

책 속으로

깊이 없는 날들을 눌러주고 싶었나
대책 없이 허물어진 뼈를 받쳐 주려 했나

연붉은
내 늑골 속에
돌들이 살고 있다

무거움 가벼움에 떠밀리며 사느라
거둘 것 내보낼 것 균형을 잃고 만 죄

함부로 써버린 몸아
그러니 문득
미안하다
---「미안하다, 몸」 전문

핏물이 배어 있는 도마를 닦는 저녁
나무가 벼려 만든 밥들을 생각한다

당신은
이것을 빌려
가장이 되었다

검게 찌든 쇠솥에서 염소탕이 끓는 날은
눈부신 햇살 아래 비탈길 바장이던
덜 여문 염소 울음이 새까맣게 고였다

그 울음 받아내며 파이고 갈라져서
딴딴한 결기마저 수굿해진 도마를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밥줄이라 불렀다
---「저녁의 나무 도마」 전문

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을

그때 그 동백꽃들 서둘러 지고 있다

슬픔을 꺼내놓기에
더없이 좋은 날

덧없는 애련일랑 파랑波浪에나 얹어주고
날리는 꽃잎꽃잎 온몸으로 받는 바다

그 바다
흰 이랑에도
붉은 물이 드는 시간

무엇을 긋고 갔나
곡진한 너의 안부
잎들은 잎들끼리 서로를 적시는데

봄보다
먼저 온 이별에
숨이 붉다
저 바다
---「애련 동백」 전문

살얼음 낀 가장자리 오리 몇 어두워진다
저수지 깊은 안쪽 먹잇감이 풍성한데
거기에 닿기까지가 영원처럼 멀다

얼음 강 건너서 온 탈북녀 분임 언니
24시간 해장국집 설거지통에 붙박여
검붉은 발가락 열 개 오리처럼 뒤뚱댄다

낮게 엎드릴수록 된바람을 덜 타는 것
발목은 젖었으나 날갯짓은 팽팽하다
밀고 갈 얼음길 너머 중심부가 반짝인다
---「오리의 시간」 전문

하나의 벼린 칼을 손아귀에 쥐기까지
불과 물로 달구고 식혀 수만 번 두드려야
그렇게 물렁해져야 한 모습을 만나는 것

그러므로 당신 몸은 망치이고 담금 물이고
화덕의 불덩이이자 한 줄기 바람 되어
찰나를 베고도 남을 푸른 날[刀]이 되는 것

베어야 끝나지만 끝내 베지 못하고
녹아서 흐르고 흘러 또다시 서슬이 되는
당신의 깊은 내상이 비로소 나를 빚다
---「나를 빚다」 전문

예초기 지나간 자리 베인 풀이 마른다

풀잎이 삶의 근간인 애벌레도 살고 있어

그들의 지금 처소가 시리고 막막하다

드물게는 나도 깊이 베일 때가 있다

썼다가 지우고 마는 미완의 문맥이며

결구를 놓칠 때마다 마음을 다친다

잎이며 줄기보다 결국은 뿌리다

분재가 되기 위해 팔 꺾는 나무처럼

도졌다 다시 아무는 그 흉터가 힘이다

---「흉터의 힘」 전문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꽃 피우고 열매 맺는 일, 내 몫이 아니라며

실없이 눙치면서 속엣말 밀어냈다.

하세월 흐른 후에야 고스란히 알게 된다.

너로 인해 슬펐고
너로 인해 아름다웠음을.

2024년 6월
강정숙

해설 엿보기

의미는 대상 자체에 있지 않다. 의미는 대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에 달려 있다. 한여름 나무의 짙은 푸르름도, 타오르는 저물녘의 붉은 노을도, 혹은 녹아 흐르는 초봄의 강물조차도 그 자체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 오직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에 의해서만 유의미한 사물로 거듭난다. 그렇기에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世界)’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내던져진 존재의 무대에 불과할 따름이기에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며, 오직 세계-내-존재에 의해서만 유의미해질 수 있다”고.

그럼에도 세계는 우리의 눈에 의미로 가득 찬 충만한 세계인 것처럼 감각된다. 눈에 비친 무수한 아름다운 사물들이 본원적으로는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어떠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세계는 우리를 향해 무수한 의미의 손짓을 보낸다. 사계절의 흐름에 따른 자연의 역동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가 되며,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에 대한 의미를 포착한다. 정녕 세계 자체가 인간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본원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라면, 우리는 왜 자연의 역동 속에서 무수한 의미를 포착하고 이를 언어화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눈에 비친 모든 사물에 자신을 투영하며 사물의 역동을 의미의 체계로 받아들인다는 본능 때문이다. 인간의 의미 부여 행위는 의식적일 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것이기도 해서, 자신의 눈에 비친 모든 사물과 현상에 자신의 경험을 투영하고 의미를 포착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사물을 통해, 세계를 통해, 자신을 반성적으로 발견한다. 매 순간 우리를 향해 손짓하는 충만한 의미의 세계란 뒤집어 말해 내 안의 언어화되지 못한 의미들이 눈앞의 사물을 경유하여 의미화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눈앞에 둔 강정숙 시인의 시집, 『아직은 조금 오래 그리워해도 좋을』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시집은 시인이 정련해 낸 수많은 시적 공간이 무수한 적층을 이루며 세계가 지닌 부단한 면모를 다채로운 모습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반 접혀 홀로 삭는 산모롱이 너와집”(「구절리 옛집」)을 바라보며 그 속에 뉘인 시간을 바라보고, 또 한편에서는 “달빛 아래 부석사”(「그 가을, 부석사」)를 바라보며 부석사 그늘에 맺힌 시간을 바라본다. 그뿐일까. 무수히 많은 공간이 강정숙이라는 시인의 눈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니, 그 모습이란 실제의 공간을 넘어 독특한 언어적 미감을 포괄한 고유한 시적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대리 자작나무는 결마다 상처다
부대끼지 않으려고 제 가지 떨군 자리
흉터로 무늬를 새겨 한 풍경 이룬 숲

견디며 사는 게 어찌 그들뿐일까
부딪치고 멍들어도 서로를 에두르며
빛나는 생의 한때를 꿈꾸는 게 아닌가

들켜버린 마음인가, 잎잎 발그레하다
발등 부은 한나절이 바람 따라 쓸리고
미답의 우듬지 새로 축복 같은 볕이 든다
- 「자작나무 숲에서」 전문

인용한 시에서 시인은 자작나무 켜켜이 선 숲의 모습을 바라본다. 자작나무들이 빚어내는 독특한 밀집도가 특징적인 이 시에서, 나무들의 특징적인 공간감은 시인의 눈을 거쳐 서로에 “부대끼지 않으려 제 가지 떨군 자리”로 다시 빚어진다. 자작나무가 빚어내는 이 독특한 밀도는 이윽고 “부딪치고 멍들어도 서로를 에두르”는 의인화된 모습으로 시화(詩化)된다. 눈에 비친 사물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곳의 특수성을 식별해 내고, 이를 특유의 미감 어린 언어를 통해 묘사하며 시적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시인의 방식이다.

사물은 시인의 고유한 내면을 통과해 특수한 의미를 부여받으며, 무관계한 사물의 세계 또한 서로를 에두르는 특수한 공동체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이를 간추려 말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사물은 시인의 눈을 거침으로써 비로소 무정한 세계에서 벗어나 고유한 의미망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고 말이다. 이처럼 시인의 독특한 시각이 있기에 자작나무 숲에 쏟아지는 한 줄기 햇살은 “미답의 우듬지 새로 축복 같은 볕”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리라.
- 임지훈(문학평론가)

추천평

강정숙의 시를 읽는 동안 비워둔 의자가 하나 있다. 의자와 나 사이에는 미적 거리가 존재한다. 건너편에서 미끄러져 가는 시간의 그림자, 이를테면 그 의자는 숨죽이는 적요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시인의 시를 읽는 동안 시의 고독을 긍정하게 된다. 시인의 펜은 시간의 어느 순간을 잡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끼지만 그것은 언제나 모든 목표를 우회한다. 강정숙 시인은 빈 의자에 앉아서 숨을 참는다. 기억이 과거로부터 이토록 자유롭다. 덜 말하는 방식으로 되풀이하는 시는 다만 잡을 수 없어서 결코 저버릴 수 없는 충만에 가까워진다. 그리하여 그 어디도 아닌 여기로의 도래! “아무렴 밟고 가시라” 두 손 흔들면서 인사를 건네는 환하고 슬픈 시인의 목소리는 덤이다. - 김보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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