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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부
저녁빛/모래 사나이/11월의 마지막 날/기다림/타오르는 책/책 읽는 남자/공포소설을 읽는 밤/비행접시/랩소디 인 블루/겨울 저녁의 시/도서관에서의 기도/겨울 저녁의 방문객/무한 속으로/영원의 풍경/환 2. 제2부 달은 계속 둥글어지고/족장의 가을 1/족장의 가을 2/초록 달팽이의 길/비단길/모래구름 아래서/항이라 속의 시인/항아리에 대한 단상/앵무새에 관한 명상/기침/솔라리스/유리병에 담긴 소식/저 짐승/먼지 속의 속삭임/주사위 놀이/새 3. 제3부 정오/장님 행렬/불면/나무 뿌리는 힘이 세다/정육점의 시인/은빛 달팽이의 추적/유적지/화려한 유적/겨울 저녁의 예감/지구 최후의 날/피를 부르는 청동 불꽃/머리 둘 곳을 찾아/자정/차가운 눈/멀리 먼 곳에서/저무는 거리에서/깊은밤 깊은 곳에/단식/사라지는 책/나그네는 길에서 쉬기도 한다 |
南眞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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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창에 가늘게 금이 가 있다
새 한 마리 흰 눈 덮인 숲을 가로질러 나는 동안 집은 짙어오는 땅거미에 점점 지워져가고 나는 식탁 옆에 앉아 거실 저편 텅 빈 풍경을 바라본다 저녁 여섯시 반 마을이 어둠의 깃 안에 몸을 눕히는 시간 저문 하늘을 담은 유리창에 그어진 금 목이 마른 나는 손을 뻗어 식탁 위 유리잔을 잡지만 이미 그곳엔 희미한 공기의 떨림뿐 새는 유리창을 파고들어 내 귓속에 금속성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미세하게 번져가는 유리창의 균열을 타고 전화선을 오가던 목소리들이 섞여든다 누군가의 눈빛이 유리창에 머물러 있다 흔들리는 창 흔들리는 방 흔들리는 집 싸늘히 식은 몸 속을 가로지르는 물의 흐름이 의식 속에서 가물거리다 멀어질 때 다시 천천히 울리는 전화벨 소리 손을 뻗어 방 전체로 번져가는 외침을 부여잡지만 이미 그곳엔 뚜 … 뚜 … 거리는 통화 정지 신호뿐 유리창에 그어진 금을 타고 밀려오는 어둠에 서서히 지워지는 거실 안 풍경들 내 귓속 이명처럼 울리는 겨울 저녁, 먼 고장의 눈사태 소리 --- pp.86-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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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잘 가꿔진 책 페이지를 넘기면 잎사귀들이 푸르게 반짝이며 제 속에 숨어 있는 나이테를 알아달라고 손짓한다 나는 매일 한 그루씩 책을 베어 넘긴다 피도 흘리지 않고서 책들은 고요히 쓰러진다 아니면 한 장씩 찢어 입에 넣고 오래 우물거린다 이 나무의 성분을 나는 짐작하지도 못하겠다 글자들의 푸른 잎맥을 따라가다가 간혹 벌레가 파먹는 자리를 발견할 때도 있다. 비록 이 나무는 꽃도 열매도 맺지 못했지만 나르대로 시원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여기 한 그루 책이 있다 책이 덩굴을 내밀어 내 몸을 휘감아오른다 무수한 문장들이 내 몸에 알 수 없는 무늬를 새기며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아무리 베어내도 무성하게 자라오르는 책나무 책나무 속에 들어가 눕는다 내 속에 뿌리 뻗은 나무에서 일제히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새떼 --- pp.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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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는 순간 불이 붙어 읽어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리는 책을 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말들은 부릴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 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 그 옛날 내가 읽은 모든 것은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 함께 몰락하는 장엄한 일생을 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만 건넨다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 pp.1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