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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언어로 읽어나가는 세상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일하는 허태임의 에세이. 멸종 위기 식물을 보전하고 숲을 복원하는 식물분류학자의 삶을 말한다. 험준한 자연, 인적 드물고 길이 없는 곳도 마다치 않고 초록이 건네는 온기를 찾는 일. 식물과 사람이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는 세상에 필요한 배려와 존중의 가치를 전한다.
2025.04.15.
에세이 PD 이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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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그 캄캄한 숲의 밤 미래의 숲을 만드는 어떤 꿈 꾸미려 애쓰지 말라 숲속의 위험하고 무서운 것들 너도밤나무의 멋진 발등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드는 일 고지를 물들이는 오묘한 매력 식물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옮기는 직업 함께여서 가능한 내가 아는 어느 동물학자 고양이가 사랑한 식물 봉화 숲해설가협회 고요한 숲의 공명 호야와 두봉 주교님 구름 꽃 피우는 자기 보호의 귀재 느리지만 오래 걸을 줄 아는 발목에 대하여 한여름 산정에서 한들대는 바람꽃 나와 팽나무를 연결해주는 59번 국도를 따라서 토끼풀을 위한 호소 세상의 모든 것을 담는 시드볼트 계절의 경계에 서서 늦여름에 물들어 가을을 알리는 붉나무 나무의 안위와 풀잎의 안부 겨우살이의 생존법 꽃이 피지 않아도 나는 두근거린다 박주가리의 디아스포라 짝사랑도 병인 양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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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사랑의 끈 같은 것을 생각한다. 서로를 잇고 있는 끈을. 겨우내 눈 속에 묻혔던 씨앗은 다음 봄이 오면 되도록 좋은 유전자를 고루 섞은 새로운 싹으로 피어난다. 그 싹은 군락을 키우고 영토를 넓히는 방식으로 힘을 보태 세대를 잇는다.
--- p.8 나는 눈물을 훔치며 매일매일 찾아오는 밤이 너희는 무섭지 않느냐고 나무에게 물었다. 어둠을 통과했기 때문에 해가 뜨는 거라고, 빛은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는 거라고, 그건 지극히 자연적인 거라는 답변이 환청으로 들렸다. --- p.39 종과 종의 경계를 재단하는 분류학은 고정불변한 진리가 아니라 변화하는 자연에 맞서 유한한 인간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가설을 진리 가까이 이끌려는 계속되는 노력이다. --- pp.44-45 각종 지도 앱에서 제공하는 정식 등산로 너머 길이 표시되지 않은 구간이 주로 내 일터다. 내가 얻을 수 있는 디지털의 혜택은 딱 거기까지다. 대신에 그때부터 나는 예상 소요 시간을 넘겼다고 초조해할 필요가 없어진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고민할 필요도 없게 된다. 길이 없는 곳에 사는 식물들을 찾아가기 위해 길을 만드는 게 나의 일이니까. --- p.53 가을에 접어들이 식물들의 잎이 말라간다고 해서 식물이 발달을 멈추는 건 아니다. 식물은 더 치밀하게 세포를 만드는 방식으로 겨울을 준비한다.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하듯이 자신의 내면을 돌보는 일. 나무는 그렇게 겨울눈을 만드는 일에 힘을 쏟는다. 겨울눈을 안전하게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낙엽의 시절에 든다. 그러고 나면 나무는 다가올 혹독한 시절을 견딜 힘을 얻는다. --- pp.64-65 공명共鳴은 물리학에서 외력에 의한 진동을 의미한다. 무지막지한 힘의 작용이 아니라 박자에 맞춘 반응을 뜻한다. 바이올린 활로 현을 긁어 진동을 일으키면 그 소리가 공명통에 닿아 더 큰 울림으로 퍼져나가는 현상. 그렇다면 누군가의 사상이나 행동에 공감해 따르는 것 또한 공명 아닐까. 어떤 사람의 자비로운 마음이 파장을 일으켜 주변을 온통 자비로운 기운으로 바꾸는 일이야말로 업業이며 깊은 울림일 것이라고, 자꾸만 더 짙어지는 유월의 가문비나무 숲은 내게 공명한다. --- p.98 호야는 대체로 심성이 곱고 순탄한 편이다. 너무 자주 물을 달라고 보채지 않는다. 두툼한 잎에 스스로 수분을 비축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식물처럼 빛 경쟁에서 앞서려 키를 위로 높이지도 않는다. 그 대신 다른 식물 아래에서 더 넓게 옆으로 퍼져 산다. 키는 작지만 품은 넉넉한 주교님 같다. 주교님과 호야에게서 풍기는 특유의 광휘가 있다. --- p.111 59번 국도가 이어준 많은 길 위에서 나는 멈추지 않았다. 팽나무를 만나며 팽나무의 언어를 알아듣고 팽나무의 이름을 바르게 불러주는 일을. 그러는 동안에 나의 포부는 그들에 대한 경외심으로 바뀌었다. 분류학적 실체를 밝히거나 오류를 바로잡고야 말겠다는 어쭙잖은 식견이 이제 전과는 다른 형태를 갖추게 된 것도 같다. 우리 행성의 대선배인 팽나무의 지혜를 배워야겠다는 희망과 기대 같은 것으로. 길 위에서 팽나무를 만나는 일을 나는 계속해서 하고 싶다. 여전히 꿈꾸고 싶다. --- p.142 이제 가을은 유독 더디게 도착하는 것 같다. 이러다 가을이 사라지는 거 아니냐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근심 따위 아랑곳없다는 듯 갈잎나무는 어김없이 제 몸에서 물든 잎을 뚝뚝 떨군다. 나는 기후 위기와 전쟁 같은 말이 몰고 오는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 깊어가는 가을과 머지않은 겨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무는 잎을 모조리 잃고서야 진짜 수형을 드러낼 테지. 나목은 무장도, 꾸밈도, 감춤도 없을 테지. 그러니 나목은 제 것이 아닌 걸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겠지. --- p.188 박주가리 씨앗의 이동을 ‘출가’라고 불러보면 어떨까. 진정한 출가란 특정 수행자에게 한정되는 게 아니며 모든 집착과 얽힘에서 벗어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출가라던 법정 스님의 법문처럼, 박주가리 씨앗은 깡마른 채 가느다랗고 길고 촘촘한 깃을 펼치며 말한다. 진정한 자유는 내적 절제에 있다고. 그걸 품기 위해서는 거듭된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해낸다. 정말 먼 곳으로 가서 더 넓은 땅에 자리 잡는 그 거룩한 일을. --- pp.204-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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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그리고 함께
식물분류학자가 일하는 방식 저자의 일터는 언제 곰이 나타나거나 진드기에 물리거나 해가 져서 깜깜해질지 모르는 인적 드문 산속이다. 저자는 식물에 대한 애정을 품고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간다. 저자는 해발고도 1300미터 이상에서만 피는 바람꽃을 보기 위해 산 정상을 오르고, 노랑팽나무를 찾기 위해 59번 국도를 따라 이곳저곳을 누빈다. 울릉도에서만 만날 수 있는 너도밤나무를 기록하기 위해 울릉도 태하령의 너도밤나무숲을 탐사하기도 한다. 때로 진드기에 물리고, 산에서 길을 잃어 어둠 속에 갇히기도 하지만, 식물을 향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땅 속에 뿌리를 내려 주변 환경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식물처럼, 저자는 홀로 숲을 탐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료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며 일을 해나간다.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을 추적하는 동물학자 우동걸 박사와 산불 피해를 입은 지역의 동식물에 대한 생태 조사를 하고, 전 세계에서 단 두 곳뿐인 시드볼트 중 하나인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를 꾸려나간다. ‘너도’로 시작하는 따뜻한 어조의 말은 타자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나와 너를 결속해 하나로 묶어주는, 어딘가에 연결돼 있으니 외로워하지 말라는, 거기가 어디든 힘내서 발붙이고 살라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탱하게 해주는 힘을 지닌 그런 말.― 『숲을 읽는 사람』에서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마주한 초록의 온기 식물과 사람이 물들어가는 시간 『숲을 읽는 사람』에는 산속에서 채집한 식물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화려한 장미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있는 그대로의 수수한 모습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는 찔레꽃,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씨앗에 독성 물질을 심어놓는 귀룽나무와 씨앗에 날개를 달아 훨훨 날게 하는 박주가리, 다른 존재와 공생하는 겨우살이의 이야기가 조곤조곤 이어진다. 이 책의 특징은 식물분류학자로서의 일에 대한 글과 식물에 대한 글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책의 구성은 내용과도 맞닿아 있다. 저자가 식물에게서 받은 온기 어린 이야기는 주위 사람들과의 다정한 경험으로 확장된다. 어린 시절 식물을 향한 사랑을 처음 일깨워준 할머니, 올괴불나무꽃 향기에 여전히 소녀처럼 기뻐하는 엄마, 호야 화분을 선물로 건넨 두봉 주교, 비무장지대를 나란히 누비며 우정을 나눈 다큐멘터리 감독과의 기억은 식물에 대한 이야기와 화음을 이루면서 읽는 이에게 깊은 울림을 전한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모자라고 부족한 생명체다. 그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힘은 절대적인 단 하나의 몫이 아니라는 것. 접목이라고 했던가. 자연 속에서 과학을 하면서 나는 식물이라는 타자와의 소통을 배우고 있는 것 같다.― 『숲을 읽는 사람』에서 기후 위기, 전쟁, 산불,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숲은 점점 더 파괴되어가고 있다. 『숲을 읽는 사람』은 매번 그 파괴의 현장을 마주하면서도 끝내 회복의 가능성을 놓지 않는 식물분류학자의 이야기이다. 저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잎을 떨군 자리에 새로운 싹을 틔우는 식물처럼 다시금 찾아올 봄을 온전히 마주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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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식물을 발견하면 눈을 반짝이고, 빛과 온도에 따라 식물의 낯빛을 섬세하게 살피는 사람. 식물의 서식지에서 함께 살아가며 식물의 감각기관을 갖게 된 사람. 백두대간에 깃들어 사는 풀과 나무의 이름을 불러주고 살뜰하게 돌보는 사람. 그러는 동안 흔치 않은 경험을 하고 위험에 처하기도 하는 사람. 식물을 통해 인간의 역사와 생태계를 읽어내는 사람. 인간이 숲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그리고 숲은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하게 번역해서 전해주는 사람, 허태임. ‘식물인간’이라는 편견 어린 말 대신 최고의 찬사로서 그를 ‘식물적 인간’이라 부르고 싶다. 그런 사람이 손과 발로 대지 위에 쓴 책이니, 어찌 한 문장 한 문장 감동적이고 향기롭지 않겠는가. - 나희덕 (시인,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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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저자는 풀꽃 하나, 나무 한 그루를 통해 삶의 풍경을 들려준다. 이 책은 식물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구자의 손끝에서, 농부의 밥상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식물은 생생히 살아난다. 물과 햇빛 없이도 피어나는 문장이 있다면, 아마 이 책일 것이다. 나무처럼 단단하고 꽃처럼 섬세한 문장들이 숲처럼 마음을 감싸는 이 아름다운 에세이를 자연과 사람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권한다. - 이정모 (前 국립과천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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