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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부 3부 4부 옮긴이의 말 |
George Orwell,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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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즈미어로드 주민의 9할은 자신들이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엘즈미어로드와 그 주변 단지 전체는 사실상 ‘헤스페리데스13 주택단지’라는 거대한 사기판의 일부이며, 이 단지는 ‘명랑 신용 주택금융조합’의 소유다. 주택금융조합은 아마 현대의 가장 영악한 사기 집단일 것이다. (…) 주택금융조합들의 신을 모시는 거대한 신상(神像)을 세우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것은 좀 독특한 신상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양성(兩性)인 신일 것이다. 상반신은 최고경영자고 하반신은 임신한 아내인 형상 말이다.
--- p.26 멋진 6월 아침이었다. 미나리아재비가 내 무릎까지 자라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일자 느릅나무들 머리가 살랑거리기 시작했고, 초록의 나뭇잎들이 커다란 구름이 되어 비단처럼 매끄럽고 화사하게 출렁였다. 오전 9시고 나는 여덟 살이었으며, 내 주변은 온통 초여름이었다. 들장미가 아직 피어 있는 산울타리가 울창해서 더 커 보이고, 머리 위로는 하얗고 보드라운 구름이 조각조각 떠 있고, 멀리 언덕들과 어퍼빈필드 주변의 푸르스름한 숲이 보였다. --- p.96 요즘은 낚시를 다니는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 물방아 돌아가는 개울이나, 요새를 둘러싼 못이나 소가 목을 축이는 연못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지금 영국의 민물고기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어릴 때에는 어느 연못 어느 개울에도 물고기가 살았다. 지금은 모든 연못이 말라버렸고, 용케 공장 폐수에 오염되지 않은 개울이 있다 해도 녹슨 깡통이나 오토바이 타이어로 꽉 차 있다. --- p.121 우리 가족 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어려운 한 해를 보냈고 손해를 보았는데, 과연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했을까? 나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절이 1909년 무렵이었다는 걸 기억하시기 바란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치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으며, 새라진 사람들의 체계적인 저가(低價) 공세에 밀려 망한 뒤 먹혀버릴 것임을 내다볼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아버지 젊은 시절에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 p.152 외판원 일도 일정한 급여를 받는 자리는 없었다. 있다면 커미션을 받는 자리뿐이었다. 이는 마침 대대적으로 시작되고 있던 착취 방식이었다. 아무 위험부담 없이 물건을 홍보하고 매출도 올릴 수 있는 더없이 환상적이고 간단한 방법이며, 시절이 나쁠 땐 언제나 번성하는 방식이다. (…) 얼마 안 돼 나는 커미션을 받는 조건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짧은 시간에 잇달아 꽤 많은 것들을 취급해보았다. 그렇다고 진공청소기나 사전을 팔러 다닐 정도로 전락하지 않았던 건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 p.200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하던 옛 시절이 뿌리부터 잘려나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만큼의 지각은 내게도 있다. 나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다가올 전쟁이, 전후(戰後)와 식량배급줄과 비밀경찰이, 생각할 것을 지시해주는 확성기가 눈에 선하다. 나만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아니다. (…) 그런데도 이 학식 있는 사람은, 평생 책과 함께 살았고 역사에 푹 빠져 있어 몸에서 역사 향이 발산되는 듯한 이 사람은, 세상이 변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 --- p.249 험악한 시절이 시작되기 전에 평정심을 되찾고 싶을 뿐이었다. 천치가 아닌 이상 험악한 시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의심할 이는 없을 테니 말이다. 우린 그 시절이 과연 어떠할지는 알 수 없어도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건 안다. 전쟁일지, 공황일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 그런 시대에 직면하자면, 내면에 온전한 느낌을 간직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 p.264 ‘어떤 일이든 다 벌어지고 말리라.’ 우리가 마음 한구석에 두고 있는 일들, 끔찍이 두려워하는 일들, 악몽일 뿐이거나 외국에서나 있는 사건이라고 자위하는 일들이 전부 벌어질 것이다. 폭탄, 식량배급줄, 경찰봉, 철조망, 무슨 색 셔츠단, 슬로건, 거대한 얼굴 포스터, 침실 창밖으로 갈겨대는 기관총. (…) 원한다면 맞서 싸울 수도 있고,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못 본 척할 수도 있고, 스패너를 들고 나가 사람들과 누군가의 얼굴을 내려칠 수도 있다. 하지만 벗어날 길은 없다. --- p.302 |
중년의 보험영업사원이 감행한 일주일간의 일탈!
현대사회의 본질인 소외와 불안에 대한 통찰 “나는 15년 동안 좋은 남편이자 아빠였다. 하지만 이제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 모르게 생긴 17파운드를 어디다 쓸 것인가?” 소설의 주인공은 마흔다섯 살 먹은 중년의 뚱보 보험영원사원, 조지 볼링. 런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의 곡물·종자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차대전에 참전해서 하급 장교로 전역했고, 운 좋게 들어간 보험회사에서 18년째 일하고 있는 샐러리맨이다. 런던 외곽 대규모 주택단지에서 살고 있으며 겨우 먹고살 만한 형편에(하류 중산층쯤 된다), 아내와 두 아이들과 함께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세일즈맨 특유의 넉살 좋은 성격에, 바람피울 기회라도 생길 참이면 굳이 마다하지 않는 현실 순응적이며 적당히 세속적인 인물이지만, 런던 상공을 날아다니는 폭격기, 임박해오는 듯한 전쟁, 히틀러와 파시즘에 대한 공포로 잠을 설칠 만큼 그가 마주하고 있는 1938년의 현실은 숨 막힐 듯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경마를 통해 공돈 17파운드가 주머니에 들어온다. 그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다 문득 20년 전 떠나온 고향을 떠올린다. 그가 원하는 것은 빠듯하게 먹고사는 문제들과 반복되는 걱정거리, 무엇보다 전쟁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난 고요함이다. 현실의 모든 중압감을 잊고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공간, 어린 시절 그만이 알고 있던 비밀 연못에서 낚시를 하며 평정심을 되찾으리라는 기대를 품은 채 옛 마을로 떠난다. “내가 그 잉어들을 낚으러 가지 못할 이유가 뭔가? (…) 나무들 사이에 감추어진 으슥한 그곳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란 생각을 해보았다. 그 속을 아직도 유유히 헤엄쳐 다니는 거대하고 거무스름한 물고기들 생각도 났다. 세상에! 30년 전에 그 정도였다면 지금은 얼마나 클까?” _267~268쪽 ‘숨 쉬러’ 나간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대규모 주택단지와 공업타운으로 변해버린 공간,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옛 연인, 쓰레기매립장이 된 비밀 연못. ‘숨 쉴 곳’은 이미 아득히 사라져버렸다. 『숨 쉬러 나가다』는 낭만주의 색이 짙은 이전의 세 장편과 본격적인 정치풍자의 세계로 넘어간 『동물농장』, 『1984』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현대사회의 실체인 불안과 소외의 징후를 예리하게 밝혀내는 예언자적 시선이 전반에 깔려 있으면서도, ‘낚시’로 상징되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곳곳의 장면들은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한편 여러 인물들의 계급과 성격을 묘사하는 솜씨도 돋보인다. 주인공 뚱보 영업사원 조지 볼링을 비롯해 쇠락해가는 관리 계급 출신의 아내 힐다, 사립학교와 옥스퍼드 출신으로 오로지 자신이 나온 학교와 그때 배웠던 고전의 세계 안에 정체되어 있는 포티어스, 히틀러가 없으면 무얼로 먹고살지 모르겠다며 볼링이 조롱하는 반파시스트 연사 등 여러 캐릭터가 오웰의 펜 끝에서 날카로운 묘사로 살아난다. “차를 몰고 언덕을 내려오며 생각한 것 하나. 이제 과거로 돌아가본다는 생각일랑은 끝이다. 소년시절 추억의 장소에 다시 가본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숨 쉬러 나가다니! 숨 쉴 공기가 없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쓰레기통 세상의 오염은 성층권에까지 도달해 있다.” _342쪽 2차대전을 예견하는 무섭도록 정확한 안목 저무는 세계, 그것을 잠식하는 ‘현대’의 탄생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주인공 조지 볼링이 좋았던 옛 시절로 회상하고 있는 1910년 전후 무렵과 소설의 현재 시점인 1938년의 시대적 상황을 잠깐 살펴보자. 그 30년 사이 1차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며 영국은 미국에 정치·경제적 주도권을 넘기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 파시즘의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제국주의 세력들 사이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과 더불어 영국 내부에서도 모든 생활 영역에서 자본주의 원리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던 시기가 20세기 초반이었다. 조지 오웰은 주인공의 회상을 통해, 저무는 한 시대의 질서가 현대라는 이름의 새 시대 정신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담아낸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열심히 꾸려가던 곡물 종자 가게는 대형 할인점의 체계화된 저가 공세에 망해간다.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지침 아래 무조건 고개를 조아려야 하는 여자 종업원과 그녀를 닦달하는 중간 관리자 모두가 해고라는 불안에 떤다. 런던 외곽 주택개발업자들의 사기극과 그들이 엄청난 이익을 거두는 시스템의 구조는 1990~2000년대 한국의 상황과도 너무나 유사하다. 그 모든 느낌은 “생존자는 열아홉 명인데 구명튜브는 열네 개밖에 없는 난파선”(202쪽) 위에 있는 것과 같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들을 밀어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팔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것이 현대인의 운명임을, 무엇보다 그러한 경쟁과 불안감이 전쟁을 겪으며 더 악화되었음을 오웰은 담담히 그려낸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우릴 휘어잡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행동한다는 느낌이라곤 없었고, 저항하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어떤 전쟁도 3개월을 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모든 부대가 전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_179쪽 무엇보다 이 작품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다가올 2차대전과 파시즘이 지배하는 세상을 너무나도 정확히 예견했다는 데 있다. 『동물농장』과 『1984』가 2차대전과 히틀러 혹은 스탈린식 전체주의를 경험하고 난 뒤 그 특징과 폐해를 풍자와 패러디로 회고한 이점을 누린 작품이었다면, 『숨 쉬러 나가다』는 (물론 이미 기미나 징후가 있긴 했지만) 철조망과 거대한 얼굴 포스터, 슬로건, 무슨 색 셔츠단, 생각을 지시하는 확성기 등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냈고, 그것은 작품을 출간하고 난 3개월 뒤 2차대전과 아우슈비츠로 현실화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 이후다. 우리가 빠져들고 있는 세계, 곧 증오의 세계나 슬로건의 세계라 할 만한 세상 말이다. 무슨 색 셔츠단, 철조망, 경찰봉의 세계 말이다. 비밀스러운 골방에는 밤낮으로 전깃불이 밝혀져 있을 것이며, 형사들은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감시를 할 것이다. 숱한 행진, 거대한 얼굴 포스터, 그리고 한결같이 영도자를 환호하는 100만 인파.” _236쪽 |
내가 사랑하는 작가 리베카 솔닛은 조지 오웰의 열혈 독자였다. 나는 솔닛을 따라 오웰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암울한 글에도 아름다움의 순간들이 있다. 그의 가장 서정적인 에세이들이 현실의 문제들과 씨름하는 것처럼.” 솔닛이 『오웰의 장미』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정확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철저히 현실적인 글들이라니, 그런 글을 쓰는 재능은 몹시 드물다. 오웰은 축복 같기도 하고 저주 같기도 한 재능을 가지고 이 어려운 일을 해낸다. 에세이, 소설, 르포르타주, 이 모든 장르에서 -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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