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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과일이 맛있어지려나 봐
탄생, 오랑우탄 여름의 홀케이크 엄마가 나와서 사과 먹으래 태양의 카르텔 불합격의 맛 나도 상처받아 참외 꼭지의 냄새 조린 사과 샌드위치 맛있으면 바나나 과일의 아이 수박 특집 메로나와 멜론의 상관관계 키위 공포증 아낌없이 주는 과일 가게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기 슬픔과 과일의 단맛은 수용성 최고의 딸기 맛 한 알 먹는다고 했다가 두 알 먹는다고 해버렸다 눈 위를 걷기 과일의 위로 토마토는 채소일까 과일일까 백화점 청과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이야기 과일 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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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우리 가난했는데 어떻게 과일을 그렇게 많이 먹었지?
고향 집 거실에서 참외를 씹으며 물은 적이 있었다. 뭔가를 희생했다거나 불가피하게 견딘 시간에 대한 답이 돌아올까 약간 긴장했다. 엄마는 질문과 시차를 두지 않고 곧장 말했다. “맛있어서?” 그렇지. 과일은 맛있지. 어쩔 수 없었네. 웃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엄마가 식탁 앞에서 꼼꼼히 가계부를 쓰던 모습. 여러 개의 허름한 봉투나 영수증 따위를 늘어놓고 엄마는 가계부가 놓인 식탁보다 더 아래를 보듯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래도 과일은 어떻게든 먹었다. 과일을 많이, 정말 많이 먹고 자랐다. 그건 행복한 이야기처럼 들리게 됐다. 과일을 많이 먹어서. --- p.13 「탄생, 오랑우탄」 중에서 그렇게 마음이 사무치던 날이었다. 커튼을 치고 어둑한 방에 누웠다. 싸움은 별수 없이 후회와 상처를 남기고 그러다 보면 밥 같은 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누워서 굶어 죽어버려야지. 그러나 너는 못 굶어 죽는다. 밥을 먹게 될 것이다. 또 자신과 다투다 겨우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갔지만 역시 밥을 차릴 생각은 들지 않아서 냉장고를 열어 사과를 한 알 꺼냈다. 대충 껍질에 물을 흘리고 칼을 넣어 한 조각만 떼어 먹었다. 아무리 울상을 해도 과일만은 입으로 잘 들어간다. 아삭아삭. 그렇게 사과 세 조각을 먹고 나서 나는 조용히 프라이팬에 불을 올렸다. 달걀을 굽고 인스턴트 국을 데워 밥 한 공기를 비웠다. --- pp.32-33 「엄마가 나와서 사과 먹으래」 중에서 마음도 과일도 중심을 내어주는 것은 사랑 앞에서다. 잴 것 없이, 대어볼 것 없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그랬다. 어느 날 놀러 온 친구에게 대접하려 여러 과일을 깎아 두 개의 그릇에 나누어 담은 일이 있다. 평소보다 칼을 깊게 넣어 깎은 과일의 가장 달콤한 부분을 친구의 그릇에 담았다. 맛이 덜하고 딱딱한 가장자리는 내 그릇으로 슬그머니 옮기거나 친구가 보지 않는 틈에 재빨리 집어 입에 넣었다. 너희 집에서 먹는 과일은 늘 맛이 좋아. 어디서 사? 나도 알려줘. 친구의 볼이 동그랗게 불러 있었다. 바보야. 그건 내가 제일 맛있는 부분을 너에게 주기 때문이야. --- p.50 「불합격의 맛」 중에서 그렇게 상처받고 흠집 나면서 나는 세계를 이해하거나 이 세계에 사는 것에 적응해나갔다. 사랑과 미움이 닮았다는 이야기, 감동과 상처는 비슷하다는 말에 약간의 이해를 더할 수는 있었지만 역시 마음에 별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사랑은 사랑이다. 미움은 미움이다. 상처는 상처고, 감동은 감동이다. 때로 동시에, 같은 얼굴을 하고 일어나지만 별개의 존재다.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에는 대단한 방법은 없었다. 그냥 살아 있을 뿐이었다. --- p.58 「나도 상처받아」 중에서 실제로 쥐어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허황된 망상이라고 해도. 아무래도 좋고 자주 나쁜 이 삶에서 환희와 닮았던 그 하늘을, 아름다움을 인지하던 나의 생생함을 조약돌로 만들어 쥐어본다면. 주머니에 몇 알씩 넣어두고 만져볼 수 있다면. 그렇게 돌 쌓으며 살아가보는 일도 가능한 것 아닌가. 역으로 걸으며 주먹을 쥐었다가 살짝 벌려 손바닥을 보았다. 의욕 없다. 아무래도 좋은 것과 다 싫은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슬픔이 너무 많다. 미래와 축복은 없다. 그래도 작은 돌 몇 개쯤은 놓여 있다고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런 알알의 아름다움이. --- pp.138-139 「슬픔과 과일의 단맛은 수용성」 중에서 친구는 이제 간다고 했어요. 금방 일어서서 현관을 향했습니다. 저는 싱크대 선반에서 봉투를 꺼내어 급히 상자 안의 귤을 담았어요. 그 순간에도 손끝으로 귤을 고르고 있었는데요. 작고 알이 꽉 찬 것. 그래도 너무 단단하지는 않은 것. 껍질과 알맹이의 사이가 헐렁하지 않은 것. 무른 곳이 없는 것. 친구가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귤을 봉투에 쑤셔 넣었어요. 건강해. 제가 귤 봉지와 함께 건넨 말이었어요. 친구는 귤 고마워. 말하고 떠났습니다. 귤 고마워. 지금의 고마움은 귤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닐 거예요. 나의 서툰 위로에 친구는 찬사를 보내주었습니다. --- pp.168-169 「과일의 위로」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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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크리스마스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 거야.”
손끝에서 목구멍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선명하게 전해지는 여름의 감각 기다랗게 썬 수박을 하모니카처럼 양손에 들고 와사삭 한입 크게 깨어 물고만 싶은 초여름, 매년 이맘쯤이면 어김없이 기록적 폭염이 찾아올 거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여름이 유독 힘든 사람들에게 유일한 위로는 ‘과일’이 아닐까. 마치 한여름에 크리스마스가 있다면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는 최고의 선물이기도 한 것이다. 이 책은 과일에 몹시 진심인 작가 쩡찌가 들려주는 과일에 얽힌 인생 그 자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입에 넣는 사과부터 바나나, 수박, 복숭아, 감, 키위, 귤까지. 단순한 먹을거리를 넘어, 과일은 사랑이고 성장이고 기억이고 희망이 된다. 쩡찌는 자신을 ‘오랑우탄’이라고 표현할 만큼 과일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면서도, 그 너머에 담긴 정서적, 사회적, 관계적 풍경들을 세심한 언어로 풀어낸다. 과일로 쓴 성장 에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과일, 그것은 곧 가족의 사랑이었다. 오직 맛있어서 식구들의 과일을 챙긴 엄마의 용기, 키위 공포증이 생길 정도로 한 박스 가득 챙겨 보낸 아빠의 마음, 한겨울에 소쿠리 가득 받아든 딸기 태몽, 수박 하나를 온전히 혼자 먹는 작은 사치에 대한 이야기까지, 과일에 얽힌 기억과 감정을 하나하나 꺼내 보여준다. 이 책은 과일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깊어지고 넓어지는지를 증명한다. 특히 「엄마가 나와서 사과 먹으래」 같은 제목의 에피소드는 우리의 웃음과 공감, 눈물샘을 동시에 자극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이지만 제각기 기억하는 방식은 다르다. 쩡찌는 과일을 먹는 일에서 시작해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고,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보듬고, 서툰 사랑과 우정에 울고 웃으며,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의 감각과 도시의 장면까지 사유를 확장한다. 자신의 내면은 물론 가족과 친구,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이웃과 주변의 풍경까지 관찰하고 삶의 놀라운 순간을 발견한다. “나는 오랑우탄이에요. 과일을 너무 좋아해요.” 사과, 바나나, 수박, 복숭아, 감, 키위, 귤까지 ‘만지면 만져지는 동그라미’에 대한 이야기 모든 과일은 어떤 말보다 선명한 감정을 품고 있다. 때로는 사소하고 일상적이지만 울컥하게 되기도 하고,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겪어본 어떤 순간의 감정을 ‘과일’이라는 감각적인 언어로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평소 고마운 사람에게, 기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쁜 날을 맞은 사람에게, 과일을 선물하는 사회적 관습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과일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 사이엔 이해와 배려가 있다. 엄마는 나에게 언제나 빠짐없이 붉은 수박 조각을 건넸고, 과일 판매원은 손님에게 색이 예쁘고 표면이 고르게 둥근 것을 골라주었으며, 집에 온 친구에게는 작고 알이 꽉 차면서도 너무 단단하지 않은 귤만 골라 쥐여 보내고, 맛이 덜하고 딱딱한 가장자리 과일은 재빨리 자신의 입에 넣어버리는, 다정한 태도 역시 그렇다. 껍질 너머의 달콤한 속살처럼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들이 수박씨처럼 이 책의 곳곳에 박혀 있다.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삶을 좋아하는 마음이 숨어 있다. 최선을 다해도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상처와 흠집이 고달프고 매일매일 쉽지 않은 인생이지만 삶을 수박처럼 둥글게 끌어안고 견디다 보면 분명 제법 달콤하고 괜찮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 쩡찌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철석같이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화제의 만화 에세이 『땅콩일기』 시리즈 일러스트레이터 쩡찌의 첫 산문집 본문 곳곳에는 쩡찌의 감각적인 일러스트를 수록했다. 그간 『땅콩일기』를 통해 짧은 만화 컷에 깊은 감정을 담아 전해온 내공이 이번 책에도 고스란히 담긴 것인데, 이미지가 텍스트의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 독서의 묘를 배가시키는 조화가 인상적이다. 사과를 베어 무는 순간 입안에 가득 차는 향기롭고 달콤한 과즙, 특별한 날 축하를 위한 홀케이크처럼 넉넉한 수박 한 통, 맛보기 참외 조각을 건네는 과일 트럭 주인의 목소리, 그야말로 ‘오랑우탄’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단편이 그려진다. 띵 시리즈에서 글과 그림을 함께 선보이는 것은 이수희 작가의 ‘멕시칸 푸드’ 편 『난 슬플 때 타코를 먹어』 이후 두 번째 시도다. 표지 역시 이 책을 쓴 쩡찌 작가의 작품인데, 귀청 터져라 울어대는 매미 울음소리를 배경음악 삼은 채 시원한 대나무 돗자리에 앉아 엄마가 썰어주는 수박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로 좌로 고개를 끊임없이 돌려대는 회전 모드 선풍기 앞에서 입을 한껏 크게 벌리고 “아아아~” 목소리의 진동이 만들어내는 떨림을 즐기던 우리 모두의 추억. 이 장면은 이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 될 만큼 우리가 보내온 숱한 여름들을 생생하게 소환해낸다. 그 곁에는 늘 수박이 있었다. 수박이 아니면 참외나 복숭아, 포도 그런 것들이. 소박하고 평범한 하루의 끝에 시원하고 달콤한 과일을 입에 물면 오늘 하루 잘 보낸 것 같은 안도감이 있었다. 그런 여름이 쌓여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여름은 우리를 지치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한 뼘 더 자라게도 한다. 뜨거운 햇살을 받고 힘껏 영글어 수박과 복숭아와 참외의 당도가 최상위에 도달했을 때, 우리도 기분 좋게 기지개를 펴고 무엇이든 잘해볼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진다. 『파과』를 쓴 소설가 구병모가 먼저 읽고 보내온 추천사의 마지막 문장 “이 책을 읽다가, 냉장고를 열고 잊히기 직전의 과일을 꺼내어 씻은 다음 꼭지를 땄다.”에서처럼 과연 어떤 과일이라도 지금 당장 한입 베어 물고 싶어진다. 어느새 마지막 책장을 덮고 과일을 손질하며 누군가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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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존재의 당도를 측정할 수 없으며, 관계의 신선 기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때론 싱겁더라도, 혹은 너무 무르거나 상처 입었더라도 적절한 과정을 거치고 수고를 들여서 베어 물고 삼켜야만 하는 일상을 살며, 그 일상의 씨앗이 모이면 일생이 된다는 것만은 안다. 오늘치 비타민을 잊지 말라고 상기시키는 책. 그래서 냉장고를 열고 잊히기 직전의 과일을 꺼내어 씻은 다음 꼭지를 땄다. - 구병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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