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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
정이담
한겨레출판 202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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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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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
작가의 말

저자 소개 1

심리학 학사 및 석사 졸. 상담전문기관에 근무하며 소설을 쓴다. 판섹슈얼. 장르의 구획을 넘나들며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를 통해 가려진 목소리들의 세계를 드러낸다. 제1회 로맨스릴러 공모전에서 『괴물 장미』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괴물 장미』 『불온한 파랑』 등을 펴냈으며 퀴어 아포칼립스 소설집 『무너진 세계의 우리는』에 「신인류 바이러스」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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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6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266g | 110*188*17mm
ISBN13
9791172132736

책 속으로

이곳은 하루도 빠짐없이 어두운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1년은 365일. 그게 서른 번쯤 지났으니 만 번의 겨울을 견딘 셈이다. 죽음도 삶도 없는 공간에선 시간의 흐름 따윈 의미가 없다.
--- p.9

이윽고 세상엔 잿빛라일락법이 선포되었다. 사랑을 말하는 열성 인간들을 겨울 속에 가두는 잔혹한 법이었다.
--- p.27

금지어와 관련된 전기 신호가 일정 횟수 이상 발생하면 생체코드관리국 산하의 보안국에 알림이 가는 식이었다. 그는 이 방법으로 체제를 위협하는 세력을 축출해 구금하겠다고 떠벌렸다.
--- p.34

이브. 그 소녀의 이야기를 끼워 넣은 이유는 실감 나는 거짓말을 하기 위해선 약간의 진실을 섞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 p.37

교관은 학생들을 원형으로 앉혔다. 이곳에 입학하는 소녀들의 나이는 저마다 달랐다. 졸업하는 나이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관찰한 동급생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다들 생존을 궁리하는 굳은 표정으로 속내를 숨긴 채 눈인사도 주고받지 않았다.
--- p.41

교관이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그의 눈을 마주하자 소름이 끼쳤다. 조금의 안광도 없이 시커멓기만 한 눈이었다. 감정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눈. 이 학교에 젖어들면 저런 텅 빈 영혼을 갖게 되는 걸까. 난 필사적으로 어머니와 이브의 눈을 떠올렸다. 실종되기 전 마지막 기억 속의 어머니는 여전히 선명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이브의 눈동자는 어떤 황폐한 자리에서도 봄 햇살처럼 밝았다. 투덕거리는 마음들 아래에, 우주를 보존하는 가장 큰 기둥은 언제나 사랑이었으므로.
--- p.46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내 쪽을 바라보던 유난히도 이질적인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탁하고 검은 교관의 눈동자와는 정반대되는 눈이었다. 그 눈은 엄청나게 투명하고 맑은 연보라색이었다. 순식간에 시간이 멈췄다.
--- p.49

“사실 난 부르주아들을 좋아하지 않아. 혜택은 있는 대로 다 받아놓고 성취가 오로지 제 노력 덕이었다고 착각하는 배부른 것들 말이야. 보통 그런 부류는 남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 열심히 싸울 때 뒤로 빠져 있다가 콩고물만 받아먹거든. 재수 없는 비겁자들이지, 안 그래?
--- p.93

때마침 하얀 맨발 한 쌍이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교관의 것이라기엔 작은 발이었다. 코끝에 은은한 라일락 향이 풍겼다. 리수였다.
--- pp.117-118

다른 아이들이 저녁을 먹으러 가는 동안 방향을 틀어 기억삭제실로 향했다. 기억삭제실은 별관 꼭대기 층의 복도 끝에 있었다. 외관은 흔히 보이는 창고처럼 평범했으며 잿빛 문에는 아무런 표식도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안쪽에는 기억삭제를 위한 온갖 소름 끼치는 장비가 가득했다.
--- p.145

리수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리수는 답장은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을 가로질러 전등을 껐다. 방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길 기다리고 있으면 이내 짙은 라일락 향이 느껴졌다. 천천히 내게 다가온 리수의 손가락이 눈가를 매만졌다. 그 애의 손가락이 나의 눈꼬리를 거쳐 뺨과 턱을 타고 내려왔다.
--- p.147

“……방금 네가 한 말. 너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날 살리겠다는 말……. 그거 엄청 이기적인 말이야.”
--- p.164

이 일을 계속한다면 리수는 다른 종으로 변해버릴지도 몰랐다. 완전한 이종(異種)의 존재로…….

--- p.172

출판사 리뷰

기억이 삭제되면 사랑하는 마음도 사라질까?
인간을 통제하는 기술과 그에 맞서는 몸의 의지

인간의 DNA를 컴퓨터 언어로 변환한 생체코드로 전 국민의 우성화를 추진하는 근미래의 한 국가. 그곳의 독재자가 여자아이들이 느끼고 나누는 ‘사랑’의 발생과 유행을 막기 위해 ‘잿빛라일락법’을 통과시킨다. 법 제정의 목적은 명확하다. 독재자는 “불안정한 존재들을 취약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게 바로 사랑”이라면서, 법이 정한 금지어인 ‘사랑’을 말하는 열등한 여자아이들을 소녀원에 가둔 뒤 기억을 지우고 조작해 마침내 우성으로 만들겠다고 밝힌다. 옆집 소녀를 사랑하거나 영화 속 캐릭터를 사랑한 아이들은 1년 365일 내내 눈보라가 치는 곳, 코드를 조작해 진짜 계절의 풍경 위로 겨울을 드리운 광막한 소녀원으로 ‘죗값’을 치르고 정신을 ‘개조’하러 입학한다.

‘나’는 가짜 계절로 뒤덮인 세상에 틈을 만들어 진짜 계절의 모습을 보여주는 초월적 존재 ‘이브’를 사랑한 죄목으로 그곳에 들어간다. 우수 학생이 되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버린 어머니 ‘은주’가 일했던 생체코드관리국에 입사하는 게 진짜 목적인 ‘나’는 입학 첫날부터 교칙을 어기고 사랑을 강변하며 분위기를 흐리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동급생 ‘리수’가 계속 거슬린다. 설상가상으로 모범생인 ‘나’와 문제아 리수는 기숙사 룸메이트로 묶여버린다. 리수는 매번 ‘나’에게 다가와 호감과 반감이 절묘하게 섞인 태도로 의도를 알 수 없는 미묘한 질문을 던지고, 그 애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라일락 향은 얼어붙은 ‘나’의 마음을 자꾸만 흩뜨린다.

‘나’가 독재자의 우성화 작업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교내 공용 컴퓨터를 돌며 아이들의 코드를 외부 조력자에게 반출하던 어느 날, 복도에서 누군가가 쫓기는 소리를 듣는다. 뒤이어 컴퓨터실 문이 열리고 다급히 뛰어 들어온 아이가 리수라는 걸 깨닫는다. 순간 그 아이는 누가 봐도 수상한 ‘나’를 숨겨주기 위해 복도로 다시 뛰쳐나가고, 창밖에서는 겨울의 하늘이 갈라지며 햇살이 드러난다. 리수가 사라진 직후에 발생한 이브의 틈. 이 공교로운 우연에 ‘나’는 리수가 혹시 이브인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내 신경을 거스르는 사람과 날 곤경에서 구해준 사람, 계속 시선이 머무는 사람, 오래도록 사랑해온 사람이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예감이 짙어지고, 학교 컴퓨터에서 발견한 의문의 파일들이 은주와 이브 사이에 오갔던 비밀 편지라는 걸 알게 된 ‘나’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가는데…….

‘나’는 사라진 어머니의 비밀을 풀고 생체코드관리국에 입사해 독재자의 계획을 망가뜨릴 수 있을까? 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끌리는 리수와 미지의 소녀 이브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까? 마침내 우성과 열성이라는 이분의 구별을 몰아내고 이 세계에 다시 사랑을 불러올 수 있을까?

아름다운 언약과 사랑, 그 소망을 상징하던 꽃들 사이로 라일락 빛을 발하는 틈이 열리고 있었다. 오랜 겨울을 가르고 봄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기억하는 모든 빛깔의 꽃들로 뒤덮인 이브의 얼굴이 그 사이로 나타났다. 그 모습을 마주하자 열렬한 황홀감이 엄습했다. 그 얼굴은, 나를 닮은 이브였다. _본문에서

턴 시리즈 소개


지금 가장 새로운 이야기로의 가뿐한 귀환, 턴(TURN)은 한겨레출판과 리디가 공동 기획한 장르 소설 시리즈입니다. SF, 스릴러, 미스터리 등 다채로운 소설을 통해 이야기 본래의 재미와 가능성을 꿈꿉니다. 이야기의 불빛이 켜지면 새로운 세계에 도착합니다. 한계 없는 턴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TURN 01 조예은 《입속 지느러미》
TURN 02 강민영 《식물, 상점》
TURN 03 설재인 《그 변기의 역학》
TURN 04 청예 《낭만 사랑니》
TURN 05 김달리 《플라스틱 세대》
TURN 06 정이담 《열세 번째 계절의 소녀들》
전건우(근간)
조영주(근간)
유진상(근간)
가언(근간)
이수현(근간)

작가의 말

글쓰기는 나에게 깃든 사랑을 가장 초라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사랑은 만병통치약이 아니고 때론 겪지 않아도 될 불행마저 가져다주는데도. 미련한 계절이 지나고 당도한 낯선 봄에 다시금 속수무책으로 감탄하며 내가 만난 너의 아름다움을 영원으로 만들고자 애를 쓴다. 고작 그런 욕망 때문에 운명이 바뀌는 사람도 있다.
사랑은 누군가를 동경하는 일일 수도
들끓는 사회를 바꾸는 투사나 연대자가 되는 일일 수도
함께 추락하여 문제아가 되거나
무한한 계절 속에 갇히거나
은폐된 것들을 폭로하거나
안고 키스하고 속삭이거나
육체와 무관하게 더 깊은 영혼을 교류하는 일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의 얼굴일 수 있어야 한다.
무량한 얼굴이 가져오는 계절 속에서만 우린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전할 이가 곁에 있는 사람도, 그런 이를 영원한 겨울 속에 묻어야만 했던 사람도 수많은 사랑의 매개자인 자연이 당신의 계절을 전부 기억한다는 걸 믿어주길.
그에 비하면 나무의 허물 위에 글자를 기록하는 일이란 얼마나 초라한가 생각하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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