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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한겨레출판 2025.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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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프롤로그

1부 연인들

나는 도울 거야 당신의 지옥을
여름의 연인
선배
통조림 체리
하필 오늘 거기
해로운 즐거움
펀치드렁크러브
우리는 서로에게 최면을 걸어줄 수도 있다
완벽한 디저트
첫 키스는 사과 맛
순정
사랑에 빠진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
너무 쉽게 사랑에 빠지는
여름 산책길
내 것이 아닌
먹다 남긴 오차즈케
서정이 하는 혁명
짧은 영상
오리지널 러브
더워지고 싶어서 그 시집을 샀다
학교 운동장
애인을 만들고 싶은 여자
모든 걸 저에게 알려주세요
유성 시장
언니는 한국어로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

2부 감각들

여름의 상태
집에서 음악 듣기
호사
여름에 대한 생각
카밤
가히 여름의 물건
옷장 안의 포부
여름 양파
수박
여름 오이
1954년의 여름
여름에 음식을 먹는 한 가지 방법
최고의 바닐라슈 찾기
맥도날드 아이스크림
여름의 설탕
소나기
고등학교의 여름
여름 바람
도피처
여름에 내가 반한 것
여름이면 갖추고 싶어지는 장비
나의 여름 트랙
욕망은 과하고 여름은 허용하고 카메라는 그걸 찍는다
우리 둘을 위해 우리 둘의 미래를 위해서 대화해요
대리기사의 사랑
여름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더운 나라의 해이함
가짜여도 좋은 것
감각의 축제

3부 장소들

어떤 여름 휴가에 대한 상상
여름에 감행한 것
하와이에 가자고 말하기
LA
내 여자의 열대
바닐라빈 요거트
목욕
부여
남해에는 족구장이 있다
도시의 감정 지도
밤 공원 산책
저녁의 정글짐
여름방학
성북동의 여름
내가 사랑하는 지하실
돌아갈 수 없는 여름
국립서양미술관 가는 길
비수기의 레몬

에필로그
추천의 말

저자 소개 1

199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대전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그룹 보슈BOSHU에서 활동한다. [한겨레]에 ‘서울 말고’ 칼럼을 연재 중이다. 글을 쓰다 보면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글이 잘 써지기도 한다. 엄마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써진다. 애인과 엄마, 그리고 친구가 주제이자 숙제다. 여성 전용 요가원에 다니며 거기서 대화 엿듣는 것을 즐긴다. 친구가 별로 없고 시간이 많아서 혼자 있을 때는 입술이 세모가 된 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동료들과 함께 『피리 부는 여자들』을 썼고 『사랑의 은어』를 혼자 썼다. 『나의 복숭아』에
1992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대전 페미니스트 문화기획자 그룹 보슈BOSHU에서 활동한다. [한겨레]에 ‘서울 말고’ 칼럼을 연재 중이다. 글을 쓰다 보면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글이 잘 써지기도 한다. 엄마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써진다. 애인과 엄마, 그리고 친구가 주제이자 숙제다. 여성 전용 요가원에 다니며 거기서 대화 엿듣는 것을 즐긴다. 친구가 별로 없고 시간이 많아서 혼자 있을 때는 입술이 세모가 된 원인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다. 동료들과 함께 『피리 부는 여자들』을 썼고 『사랑의 은어』를 혼자 썼다. 『나의 복숭아』에도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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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5년 08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264쪽 | 276g | 120*188*17mm
ISBN13
9791172133047

책 속으로

사랑의 시작은 그와 헤어지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가 이전까지 세상에 남겨둔 흔적을 찾아보는 거다. (…) 그때 그와 잠깐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참 좋지 않았나. 그와 노래를 같이 들은 게 혼자 듣는 것보다 좋지 않았나. 그때 달렸던 버드나무길이 어디였지? 원래 그런 길이었나? 이제 그가 없으면 그 노래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고, 그 길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불행하게 느껴지기 시작.
--- p.32

우리는 서로에게 가진 감정을 말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말로 확인한다. ‘나 좋아? 얼마나 좋아?’ 하고…. 그런데 이 사람과의 일은 어떤 것도 말로 할 수 없어서 사랑이 정말로 우리 사이에 있는지 믿기 어려웠다. (…) 바깥의 불빛이 차 안에 들어왔고 어둠 속에서 그와 내가 무슨 말을 하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건 모르는 언어로 하는 사랑 고백 같았다.
--- pp.34-35

그 후 나는 내 삶에서 일련의 일을 겪고, 누구에게나 방어벽이 있으며 그것을 무너뜨리지도, 들여다보지도 않으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좀 불편하더라도 바뀔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방어벽이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받을 수도 없다. 그래도 누군가는 사랑을 버리고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
--- p.67

나는 그가 귀여워 보일 때 그의 머리를 만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잠들었다가 뒤척일 때 그를 끌어안아도 된다고 여긴다. 그에게 잘 자라고 말하고 방에서 나오기 전에 그의 볼에 손바닥을 대도 된다고 믿는다. 나는 내가 그 애를 영원히 좋아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래퍼 남자친구가 생겨서 그가 공연장에서 제일 감동하는 여자가 된다고 하면 하루 종일 심란해하다 그 래퍼가 감옥에 가길 바라겠지만 그래도 그 애를 감시하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 p.108

여름의 무엇을 기다리느냐 하면 단연 밤이다. 여름밤은 아무리 써도 닳아지지 않는다. 공용자전거를 빌려 타고 천변까지 갔다 돌아오는 사람도 전화 통화를 하며 계속해서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 여학생이 있다. 습한 날씨가 싫다고 말하지만 정말은 습기가 좋은 거다. 내가 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다.
--- p.116

엄마 말대로 수박은 한여름이 시작되기 전이 가장 맛있는 것 같다. 파삭파삭하고 물이 터지는 시원한 단맛은 그만한 게 없다. 엄마 집에 갔다가 생각지 않게 얻어먹은 수박. 큰 칼로 반을 가르고 이걸 다 누가 먹어, 할 만큼 쟁반 가득 썰어서 쓰러진 그 수박을 집어서 아무 생각 없이 씹어먹는 일의 달콤함. 어떤 할 일도 없고 책임져야 할 것도 없는, 수박껍질 갖다버릴 일도 없는 그 편안한 상태에서 수박을 얻어먹는다는 점이 특히 달고 시원했다.
--- p.135

사랑의 시작은 그와 헤어지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가 이전까지 세상에 남겨둔 흔적을 찾아보는 거다. (…) 그때 그와 잠깐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참 좋지 않았나. 그와 노래를 같이 들은 게 혼자 듣는 것보다 좋지 않았나. 그때 달렸던 버드나무길이 어디였지? 원래 그런 길이었나? 이제 그가 없으면 그 노래가 그렇게 느껴지지 않고, 그 길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불행하게 느껴지기 시작.
--- p.32

우리는 서로에게 가진 감정을 말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것보다 괴로운 일은 없었다. 나는 모든 것을 말로 확인한다. ‘나 좋아? 얼마나 좋아?’ 하고…. 그런데 이 사람과의 일은 어떤 것도 말로 할 수 없어서 사랑이 정말로 우리 사이에 있는지 믿기 어려웠다. (…) 바깥의 불빛이 차 안에 들어왔고 어둠 속에서 그와 내가 무슨 말을 하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건 모르는 언어로 하는 사랑 고백 같았다.
--- pp.34-35

그 후 나는 내 삶에서 일련의 일을 겪고, 누구에게나 방어벽이 있으며 그것을 무너뜨리지도, 들여다보지도 않으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좀 불편하더라도 바뀔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로 살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 방어벽이 있는 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받을 수도 없다. 그래도 누군가는 사랑을 버리고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
--- p.67

나는 그가 귀여워 보일 때 그의 머리를 만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잠들었다가 뒤척일 때 그를 끌어안아도 된다고 여긴다. 그에게 잘 자라고 말하고 방에서 나오기 전에 그의 볼에 손바닥을 대도 된다고 믿는다. 나는 내가 그 애를 영원히 좋아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래퍼 남자친구가 생겨서 그가 공연장에서 제일 감동하는 여자가 된다고 하면 하루 종일 심란해하다 그 래퍼가 감옥에 가길 바라겠지만 그래도 그 애를 감시하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 p.108

여름의 무엇을 기다리느냐 하면 단연 밤이다. 여름밤은 아무리 써도 닳아지지 않는다. 공용자전거를 빌려 타고 천변까지 갔다 돌아오는 사람도 전화 통화를 하며 계속해서 같은 길을 걷고 또 걷는 여학생이 있다. 습한 날씨가 싫다고 말하지만 정말은 습기가 좋은 거다. 내가 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다.
--- p.116

엄마 말대로 수박은 한여름이 시작되기 전이 가장 맛있는 것 같다. 파삭파삭하고 물이 터지는 시원한 단맛은 그만한 게 없다. 엄마 집에 갔다가 생각지 않게 얻어먹은 수박. 큰 칼로 반을 가르고 이걸 다 누가 먹어, 할 만큼 쟁반 가득 썰어서 쓰러진 그 수박을 집어서 아무 생각 없이 씹어먹는 일의 달콤함. 어떤 할 일도 없고 책임져야 할 것도 없는, 수박껍질 갖다버릴 일도 없는 그 편안한 상태에서 수박을 얻어먹는다는 점이 특히 달고 시원했다.
--- p.135

아무것도 읽지 않아도 그 시간은 끝내줬다. 몸에는 불편감이 없었고,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정도의 소리가 들려올 정도였으며, 물놀이의 노곤함은 시간이 흐르며 나른하고 자유로운 기분을 만들어주었다. 바람은 풀장에 떠 있는 나뭇잎을 움직이게 하고 바깥의 풀냄새를 실어 오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내 앞에는 발을 걸칠 수 있는 작은 테이블도 있고, 커피도 향긋하게 내려진 데다 얼음도 많았다.
--- pp.213-214

우리의 모터보트는 크림에 레몬즙을 한 방울 섞은 듯한 색이었다. 바다와 모래는 물감을 뚝 떠서 펴 바른 듯했다. 엄청난 소음과 물길을 일으키며 배가 떠가기 시작할 때, ‘낡은 흰색은 예쁘구나’ 생각했다. 사람들의 맨발, 찰박찰박한 물, 몸에 달라붙는 티셔츠와 바람에 젖혀지는 셔츠, 따뜻하게 젖은 몸. 지금 나는 한국보다도 추운 나라에 와서 눈이 쌓인 도시를 걷고 있다. 거리를 다닐 때는 떨어지는 간판에 맞아 죽지 않도록 주의한다.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기 때문에.
--- p.216

나는 가끔 공간에 얽혀 있는 기억이 너무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든 그곳에 가면, 그곳에 자주 드나들던 시절이 한꺼번에 딸려 나오기 때문이고, 그맘때 자주 어울리던 사람을 다시 그때처럼 소중히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현재라든가 지금의 여건이라든가 그런 게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다. 오로지 과거의 기억과 그때의 감정만이 중요해진다. 장소가 없어지는 것도, 장소가 그대로 있는 것도 전부 큰일이다.
--- p.232

여름이 아닐 때도 여름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향수를 찾아다녔지만, 향수는 좋기만 해야 해서인지 그 냄새를 구현하지 못했다. 플랑크톤과 세균과 안 좋은 것이 섞인 냄새. 흙먼지 냄새. 불운한 기운…. 그 모든 게 합쳐져야 그리운 냄새가 되는 것인지.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피크민블룸’이라는 게임을 켰다. 레몬을 주웠다. 가져오는 데까지 24일이 걸린다고 했다. 노랗고 싱싱한 레몬이었다.

--- pp.258-259

출판사 리뷰

“여름의 연인들·여름 감각·소나기·밤 공원 산책
아이리시 카밤·비수기의 레몬·더운 나라의 해이함…”
온갖 감각이 뒤범벅되어 아찔하게 현기가 일고 마는 계절


1부 ‘연인들’에서는 작가가 여름에 함께했던 사랑에 관한 단상들이 펼쳐진다. 작가는 자신이 “어떤 순정도 없는 부정뿐인 사람”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모든 순간 그가 해왔던 사랑은 지독하게 뜨거운 여름을 닮은 순정이다.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상대로 인해 자신이 애써 만든 일상이 깨지고 모든 신체 감각이 그에게로 집중되며, 사랑이 끝난 뒤에는 “자기 내면과 혼자 남는 지옥이 펼쳐진다”.

“나는 그가 귀여워 보일 때 그의 머리를 만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가 잠들었다가 뒤척일 때 그를 끌어안아도 된다고 여긴다. 그에게 잘 자라고 말하고 방에서 나오기 전에 그의 볼에 손바닥을 대도 된다고 믿는다. 나는 내가 그 애를 영원히 좋아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래퍼 남자친구가 생겨서 그가 공연장에서 제일 감동하는 여자가 된다고 하면 하루 종일 심란해하다 그 래퍼가 감옥에 가길 바라겠지만 그래도 그 애를 감시하는 일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108쪽)

2부 ‘감각들’에서는 작가 특유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묘사를 통해 여름에 관한 이미지들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치앙마이에서 마주한 가벼운 단맛의 질깃하고 밀도 있는 수박, 숨 쉬는 것만으로 진득하고 황홀감을 느낄 수 있는 충동성 짙은 여름밤의 온기, 과잉 자체로 터질 듯한 여름을 주제로 한 영화 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다들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해수욕을 하고 나와 손에 묻은 물기를 티셔츠에 닦은 뒤, 모래사장 위에 뒤집어놨던 책을 다시 펴서, 햇빛이 너무 과하게, 혹은 너무 없는 채로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를 읽어내리며 땡볕에서 고생스럽게 독서하는 일 말이다. 그럴 때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에 몸에 남은 물기를 말리는 것 말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여름에 할 수 있는, 아주 거대하고 어리석고 천진난만한 자유가 아닌지….”(120~121쪽)

마지막 장인 3부 ‘장소들’에서는 작가가 그리워한 여름의 공간들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금방이라도 헤어질 듯한 연인과 함께한 가고시마, 마음에 둔 사람을 우연을 가장한 만남으로 마주치고 싶어 떠난 남해, 색채가 강한 태국의 어느 섬에서 만난 심드렁하고 매혹적인 미지의 인물 등…. 작가는 숨 막힐 듯 강렬했던 공간에 관한 기억들을 소환하여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시절과 인연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꼭 하와이일 필요는 없다. 연인에게, 혹은 곧 연인이 되어버릴 것 같은 사람에게 나랑 여기서 빠지자, 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뿐이다. 가서 속옷도 안 입고 돌아다니자, 사람들 시선은 신경 쓰지 말자, 휘청거리면서 걷자, 신호를 기다리면서 입을 맞추자, 나랑 놀자, 같은 말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206쪽)

“그가 나를 본다면 갑자기 여기 나타난 내가 너무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남해 운동장에서 철봉이나 하다가 온 것으로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그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너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거짓말을 해야 할지 좋은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 주제에 나도 관심이 있어서? 내 꿈이 실은 이쪽이라서? 아무튼 사랑은 아님. 너를 사랑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님.”(227~228쪽)

“여름은 어쩔 수 없이 닿고, 섞이고, 서로를 침범한다”
실제보다 더 명징하게 남을 여름의 여운들


서한나 작가의 글을 한 번쯤 접해봤거나 그에 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작가를 두고 가장 먼저 떠올릴 이미지가 바로 ‘인간 여름’일 것이다. 그에게서 나오는 에너지는 마치 연한 노란색의 레몬이 산뜻하고 은은한 향을 풍기는 듯하다. 작가는 일상의 평범한 순간도, 자신이 아는 인물들도 모조리 “조각내어” 기억하는데,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게 인간의 심리와 상황을 발골하여 언어적으로 재현한다. 수줍으면서도 충동성과 야성이 가득한 서한나 특유의 역설적인 문체는 새파랗다 못해 짙푸른 여름의 녹음과 닮았다. 터지기 직전까지 형형하게 고조시키면서도 끝내 조용히 머금고 속삭인다. 그는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간지럽힌다. 앙증맞고 사랑스럽게 스며드는 그의 재주는 또래 작가들과 뮤지션들에게 많은 예술적 영감을 주고 있다.

이 책이 ‘여름’을 주제로 한 여타의 책과 다른 점은 단순히 계절적인 개념으로 여름을 한정 짓지 않았다는 점이다. 작가는 자신이 기억하는 여름을 두고 “무더위와 소음 속에 몸을 풀어놓고 지켜보고 싶은 공간으로서의 계절”이라고 표현한다. 때로 내면의 지질함과 구석진 마음까지도 모조리 뒤집어 꺼내 보여주는 글들은 원류에 가닿고자 하는 그만의 시도다. “비빔밥이든 엘리베이터든 뭐든 섞이는 것이 싫은” 작가 자신도, 여름날에는 “어쩔 수 없이 닿고, 섞이고, 침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날것’의 계절이 만들어내는 순간의 기록들을 읽다 보면 실제보다도 더 명징하게 남을 여름의 여운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나는 그의 목소리가 좋은 것 같다. 대나무 통 안을 깊게 울리면서 나오는 것 같은 숙성된 소리를 가진 인간이라서? 아니다, 나는 그가 가진 눈빛이 좋은 것 같다. 내 속을 뒤집어보는 듯 빤하게 보는 눈이면서도 금방이라도 어디로 가버릴 것 같은 눈빛이 좋은 것 같다. 그러면 대체 뭔가. 내가 사랑에 빠진 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아무래도 나는 그가 거느린, 그가 지나온 시간이 전부 좋은 것 같다.”(185쪽)

“여름이면 노천에서 사람 구경하는 것이 좋다. 몇 번이든 그걸 하고 싶어진다. 그것이야말로 뒤섞이는 일인 걸 모르고, “난 섞이는 건 별로, 닿는 건 별로” 그렇게 말한다. 내가 바라던 맛이 거기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를 놔두고 땡볕에 내내 앉아 있는다.”(262쪽)

추천평

서한나의 글에서는 설탕에 절인 열대과일 향, 습기를 머금은 햇빛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의 글을 읽으며 그가 들렀던 여름의 장소들을 따라 거닐 때, 왠지 덜 말라서 눅눅한 옷을 걸쳐 입은 기분이 든다. 물큰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들추며 불어오고, 눈앞에는 반짝이는 바다가 석양을 잘게 부서뜨리고 있을 것 같다. 손바닥에는 끈적이는 땀이 배어 있겠지. 이 손으로는 꽝꽝 언 쭈쭈바를 들고 다닌 적이 있고 가스 닳은 라이터가 따뜻해지도록 쥐어본 적이 있고 사랑하는 이의 손이 흩어지기라도 할까 붙잡았던 적 있다. 왜 한 번도 미지근했던 적은 없을까.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언제나 우리의 온도를 무섭게 높이거나 아주 빼앗아갔다. 미지근하거나 싱거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서한나는, 달아 빠진 것만 좋아하다가 닳아 빠진 사람이 여기 있다고 싱겁게 웃어 보일 것도 같다. 그런 그를 보고 있자면 나는 그만 사랑에 빠질 것 같은데…. 온갖 감각이 뒤범벅되어 아찔하게 현기가 일고 마는 계절처럼, 그는 나의 숨을 틀어막으러 온 게 틀림없다. 그가 열어젖힌 여름의 문 틈새로 마그마 같은 열기가 밀려 들어온다. 때때로 열기는 한기보다 더욱 나를 떨게 한다. 가슴 떨리는 사랑의 속삭임이 은어 떼처럼 귀를 간지럽혀도 내 삶은 드라마틱할 리 없지만…. 서한나와 여름을 배회할 때, 내 머릿속에서는 스프링클러가 돌아간다. 숨소리는 거의 휘파람에 가깝다. 이제 내가 사랑한 여름의 장소마다 그가 서 있다. - 고선경 (시인·『샤워젤과 소다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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