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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7
어떤 사람의 연속성 23 지오의 의지 59 발로發露 119 마지막 선물 149 저 외로운 궤도 위에서 185 표류 공간의 서광 229 우리가 마주할 기적은 무한하기에 241 작가의 말 2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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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가벼워졌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지구의 질량이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아무 전조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신이 하룻밤 만에 니켈을 비롯한 몇몇 중금속의 질량을 수정하기라도 한 걸까? 지구는 정말로,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동시에 스스로 중력의 일부를 포기했다. 일련의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때 사람들은 잘 알지 못했다. ---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 중에서 파도가 잘게 부수어지는 듯한 신호, 그다음에는 다채로운 소리가 점차 끼어들기 시작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고, 누군가가 지면에 구두 굽을 부딪치고, 다른 누군가가 환호나 의문의 비명을 지르거나, 컴퓨터가 오류를 알리는 알람을 울리거나, 책더미가 넘어지거나, 카트가 밀쳐지며 덜컹거리는 와중에, 내가 일어나며 편지와 옷가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덧붙였다. 세상에 시간이 스미는 소리였다. --- 「어떤 사람의 연속성」 중에서 승화는 그런 수까지 꺼내고 마는 자신에게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만큼 필사적으로 변호했다. 그리고 의심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되돌아온 것이 아닐까. 이전에도 같은 일이 벌어졌을까. 자신은 몇 번이고 중첩된 역사 속에서 항상 퍼펙트 제로를 일으켰을까. 그렇다면 이번이 최초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이번 퍼펙트 제로는 ‘몇 번째’였을까. 그 반물질 폭탄은 지금까지 몇 명을 죽여왔을까. 그렇다면 지오는 이 모든 회귀적 과정을 알고 있을까. --- 「지오의 의지」 중에서 이곳은 항상 따뜻하다. 몸이 식어간다는 감각조차 들지 않는다. 공기조차 다정하다. 그 매캐한 냄새가 아니라 차고 넘칠 듯한 온기가 자애롭다. 발을 디딜 때마다 꿀렁이는 동맥을 허벅지에 박힌 파편이 막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긴 시신을 비켜 걷는다. 폭심지로부터 멀어질수록, 그곳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은 보다 황폐해진다. 바람에 모래가 섞이기 시작하면 발은 고운 입자의 대지에 포근히 닿는다. 메마른 풍경에 겹쳐진 시간이 재생된다. 그다지 높다고는 못할 평범한 건물과 길가에 차려진 시장과 상인과 시민과 아이들을 본다. 가게에서 달큼한 쿠나파의 냄새가 풍긴다. 서로 다른 말소리가 섞여 조화로운 화음을 자아낸다. 변하고 말았던 그 시대가 살아 있다. 여전히. --- 「발로發露」 중에서 투영기에 보였던 반짝임은 거미줄처럼 엉킨 선의 구조가 너무 가늘어 점처럼 반짝여 보이는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그런데…… 그것들은 진짜 점이었어요. 공중에 떠 있는 점 입자요. 그것도 모든 점이 서로를 향해 완벽히 계산된 듯한 경로로 전자살을 발사하는……. 마치 별들의 궤적처럼 보이기도 하더군요. 상자 안의 우주. --- 「마지막 선물」 중에서 “소독 절차를 진행하십시오. 진행하지 않을 시, 10분 내로 소독 절차가 강제 진행됩니다.” 유진은 소독실에 도착하자마자 들려오는 소독 절차 안내를 무시한 채 부양형 컨테이너를 열어젖혔다. 비정상 밀봉 상태 해제를 알리는 버저음이 소독실에 가득 찼지만 유진은 개의치 않고 그 속에 있는 화물 중 자신에게 왔던 것들을 모두 고르게 내려놓았다. 결국 외로운 곳으로 향하고 마는 마음처럼 어느 하나 가벼운 것이 없었다. 무거움을 잊은 채 저 궤도 위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상자들을 모두 허공에 떠 있는 컨테이너에서 꺼내 바닥에 늘어놓았다. “10분이 경과되어 소독 절차가 진행됩니다.” --- 「저 외로운 궤도 위에서」 중에서 그래, 서광……. 동트기 직전의 어슴푸레한 하늘빛 말이야. 너도 그거 한 번만 봐봐. 밤을 샌 뒤 창문 너머로 밝아오는 그 우울한 푸른빛 말고, 바깥에 나가 새벽 공기가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와중에 아무렇게나 누워서. 어둠 속에서 빛이라곤 그 미약한 한 줄기가 유일할 때, 구름 너머의 빛 자락이 점점 퍼지며 이름 없는 색들이 모이면서 하늘이 밝아오는 시간을 천천히 들이마셔봐. 그렇게 조금씩 손가락 사이로 세상의 숨결이 흐르는 걸 느껴봐. --- 「표류 공간의 서광」 중에서 지평의 끝이라 불리는 해안선 끝자락의 자허흐는 본래 지방 중소도시였다고 한다. 한때 사람이 거닐었던 번화가에 바닷물이 들어차 물에 잠겨버렸고, 그렇게 자허흐는 일부 모습만 드러낸 해저도시 같은 마을이 되었다. 구불구불 솟아오르고 내려가길 반복하는 능선 자락에 지어진 수많은 경사로와 계단이 오늘날에는 군데군데 바닷속으로 향하는 모양새가 되었고, 짠 바람에 녹슬어 삐걱대는 철골 구조물 따위가 콘크리트에 덮이지도 못한 채 삭아가는 모습이 지금의 자허흐를 이루고 있었다. --- 「우리가 마주할 기적은 무한하기에」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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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주한 멸망 앞에서
멸망을 마주한 세계에서 어떤 기적이 가능할까? ‘지배’를 금하고 ‘공멸’을 막아내고 ‘자멸’을 피할 수 있을까? 이하진은 우선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를 통해 피할 수 없는 빠른 멸망의 시간을 제시한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본래의 공전궤도를 이탈한 지구, 인류는 물론 모든 생명체는 속절없이 멸망을 맞이한다. 외우주로 향해 가는 지구, 중력을 잃고 길게 이어지는 황혼은 어쩌면 아름다운 황홀경처럼 보인다. 이토록 거대한 재난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의 의지는 공멸을 불러왔지만, 어떤 사람의 의지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한다. 〈어떤 사람의 연속성〉은 시간이 정지하는 정체불명의 재난이 닥친 도시에 소중한 사람을 둔 이의 편지이자 기록이다. 접근이 금지된 재난의 도시로 그는 간다. 그곳에 있는 차원실험연구소로.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친구를 구하러. 이러한 의지는 제3차 세계대전과 이후 다가온 절명의 위기에서도 분명히 존재한다. 〈지오의 의지〉에서 초거대 AI 지오는, 인간의 마지막 의지와 선택을 묻는다. 그 대답이 기적을 불러올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이러한 물음은 〈발로(發露)〉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와 독자와 마주한다. 가자 지구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학살을 알지 않느냐고. 안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우리가 만들어낼 기적을 기다리며 멸망 앞에 선 인간의 의지는 사랑과 연대에서 비롯될 것이다. 로맨스 SF라 할 〈마지막 선물〉에서 백영은 앞마당에 떨어진 운석을 분석하며 양서아에게 답신을 기대할 수 없는 이메일을 보낸다. 백영은 운석을 분석하면 할수록 그것이 특정한 메시지를 품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또한 그것이 동경하는 이의 마지막 선물인 것도. 〈저 외로운 궤도 위에서〉는 대전염병 시대에 우주 공간을 넘나드는 물류를 책임지는 택배 기사가 주인공이다. 미래의 노동자도 지금의 노동자와 크게 다름은 없어서, 그들은 저임금과 산업재해에 시달린다. 그럼에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고 사람답게 죽기 위해서 연대를 꿈꾼다. 〈표류 공간의 서광〉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기로 작정하고 소설을 읽어나가는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진다. 시간 여행에서 탈선한 화자가 누군가를 만나서 전하는 이야기, 그리하여 “이 모든 건 한 사람이 믿어가는 이야기”다. 동시에 극악한 확률에서 만난 서로를 구해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주할 기적은 무한하기에〉는 멸망이라 하기에 지나치게 아름다운 도시 자허흐의 이야기이다. 스스로 불러온 멸망을 포악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에 기시감을 느낀다면, 그 멸망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노인에게서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어떻게 할 것인가? 소설 속 신인류는, 그리고 소설 바깥의 작가는 계속해서 묻는다. 마치 그것이 소설의 역할이라는 듯이. 작가의 말에서 남들보다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만큼만 혹은 남들처럼만 살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아 투쟁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이 잘못된 게 아닌가? 우리는 왜 고작, 이렇게나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무정한 세계와 투쟁해야 하는 걸까?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적었다. 같은 질문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다고 믿고 싶었다. 내가 죽지 않고 이곳을 사랑할 이유를 찾고 싶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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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진의 세계는 고통스럽다. 중력이 사라져 만물이 둥둥 떠오르고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택배에 섞여 돌아다니는가 하면, 시간이 통째 얼어붙어 사람들이 고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우주적 스케일의 불행 앞에서 이하진의 인물들은 작을지언정 무력하지 않다. 어떻게든 존엄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고 인간답게 죽으려는 사람들. 이 책은 고통 속에서도 인간으로 남고자 몸부림치는 인물들이 남긴 아름다운 궤적, 그것이 곧 소설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시킨다. - 이유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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