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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하드 SF 거장의 최신 중단편집
21세기의 그렉 이건이 궁금하다면, 이번 중단편집으로 시작해보자. 특유의 서늘한 광기 어린 서사와 수학적 실재를 무기로, 이제 더 나아가 우주의 시간 위에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한다. 인류 너머를 상상하는, 독보적인 시선.
2026.03.10.
소설/시 PD 김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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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털의 밤 ·007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061 너 혼자서? ·105 꿈 공장 ·173 크라이시스 액터스 ·227 미토콘드리아 이브 ·267 암흑 정수 ·317 방랑자의 궤도 ·399 잠과 영혼 ·435 작가의 말 : 한국의 독자들에게 ·530 옮긴이의 말 ·5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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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인간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직은.
그리고 그가 여기서 마음이 약해져 포기한다면, 앞으로도 결코 대등해지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털의 밤」중에서 누리가 기쁜 듯이 옹알거리기 시작했다. 아이샤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아이샤는 잠시 흐느꼈다. 지아니를 떠올리며, 칭이를 떠올리며, 참담하게 변했을지도 모를 지구의 상황을 떠올리며. 이윽고 아이샤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딸을 향해 나직하게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서로 눈을 마주 볼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중에서 “마치 내가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도 얼마든지 잘 살아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잖아. 난 나무가 아니라 덩굴이야. 혼자서는 땅에 떨어져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덩굴식물. 그래서 난 어차피 이길 가망도 없는 경주에 목을 매는 대신 나를 지탱해 주고, 내 앞길을 터줄 큰 나무에 의지하는 쪽을 택했어. 내가 그걸 원하는 건, 그게 나라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기 때문이야.” ---「너 혼자서?」중에서 그러나 이제 거의 모든 앱은 일종의 무기가 되어버렸다. 그것이 초래하는 크고 작은 문화적 충돌과는 무관한 차원에서 말이다. 제임스는 자신이 투하하려는 폭탄의 의의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전략적 조작에 응함으로써 한때는 결코 참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꼴이었다. ---「꿈 공장」중에서 잔해 속에서 누워 있던 어린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어머니는 울부짖었지만, 아이를 찾아낸 사내는 활짝 웃더니 사내아이를 들어 올려 양팔로 안았다. 이웃들을 둘러보니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비나이가 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필사적으로 감정을 추스리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칼은 잘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자칫 자제심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크라이시스 액터스」 중에서 “당신들이 만들어 낸 상징들 따윈 모두 불태워 버려!” 나는 외쳤다. “남자든 여자든, 부족주의든 범세계주의든 간에 이젠 필요 없어. 당신들의 잘난 조국이나 있지도 않은 지모신 따위를 숭배하는 일도 이젠 그만둬. 지금 우리는 유년기의 끝에 와 있다고! 그러니까 인류의 족보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혈연 따위도 엿이나 먹으라고 해. 남이 옳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라고.” ---「미토콘드리아 이브」 중에서 나는 말했다. “모든 건 대학 시절에 시작됐어. 앨리슨이 낸 아이디어였지. 천재적이고, 아름답고, 정신 나간 아이디어.” 케이트는 시선을 돌렸다.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내가 일부러 모욕적인 말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내가 대량 살인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일들에 관해서는 그만큼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내 이야기는 앨리슨으로 시작해.”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건 여기서, 당신과 함께 끝나.” ---「암흑 정수」 중에서 “이런 미친!”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마리아가 다가왔다. 아마 피와 살을 가진 듯한 선지자는 마리아에게 외쳤다. “이 새끼 미쳤어! 나한테 못 오게 해!” 마리아는 내 팔을 잡더니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내게 몸을 기대며 내 귀에 자기 혀를 집어넣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여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더니, 몸을 돌려 잰걸음으로 떠나갔다. 마리아가 말했다. “해부치고는 좀 약했지만, 이만해도 내겐 유리한 증거야. 내가 이겼어.” 나는 주저하다가 마음에도 없는 항복 선언을 했다. “맞아, 네가 이겼어.” ---「방랑자의 궤도」 중에서 그는 멈췄고, 그런 다음 다시 시작했다. ‘그’라는 집이 침묵해 있는 동안, 그의 기억과 성격을 구성하는 가구와 물건들은 먼지막이 커버에 덮인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는 그것들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두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의 피부 아래에 보관되어 있었다. 영혼이란 단지 몸이 깨어 있을 때 몸이 느끼는 감각에 불과했다. 그가 잠들면 영혼은 사라진다. 그가 죽은 뒤에는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잠과 영혼」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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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의 장편 집필로 다져진 그렉 이건의 중단편 미학
인간 실존과 본질을 타협 없이 관통하는 하드 SF의 정수 “『잠과 영혼』 원본에 포함된 2020년대의 작품들은 20여 년에 걸친 꾸준한 장편 집필을 통해 응축된 작가의 생득적인 ‘문학성’이 일종의 임계점에 달해 꽃을 피운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간 한국에 소개된 그렉 이건의 작품은 주로 중단편이었지만, 실제로 그는 장편 집필에 더 공을 들여온 작가다. 외계 지성체가 태양계를 격리했다는 설정의 데뷔 장편 『쿼런틴』부터, 고대 문명이 설계한 구조물이 대재앙으로 이어져 지구가 나선형으로 뒤틀린다는 설정의 최신 장편 『모든 하늘의 책(The Book of All Skies)』에 이르기까지, 그는 데뷔 이후 30년간 쌓은 15편의 장편을 발표했다. 그 집필 경험은 우주적 스케일의 세계관과 서사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여기에 개인적 역량이 더해져 번역가 김상훈의 표현대로 오늘날의 그렉 이건은 ‘문학적 임계점’을 돌파한 상태다. 문학성이 강화됐다고 해서 하드 SF의 엄밀함을 조금이라도 타협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비정할 정도로 정교한 과학적 사고실험을 끝까지 밀어붙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서와 존엄의 근거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하드 SF의 엄밀함이 문학적 서사와 어떻게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두 번째 수록작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신혼여행으로 달 여행을 왔다가 지구에 발생한 원인 불명의 재앙으로 통신이 두절된 채 고립된 한 여성의 사투를 보여준다. 그는 젖먹이 딸과 살아남기 위해 배신과 죽음이 교차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지구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작품은 벼랑 끝에 내몰린 인물의 내면과 황폐한 달의 풍경을 교차시키며, 절망과 고독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존재의 의지를 정교하게 그려낸다. 세 번째 수록작 「너 혼자서?」는 뇌와 기계를 직접 연결하는 뉴럴 링크를 강제 이식당한 네 쌍둥이의 이야기다. 이들은 기억과 감각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실험체로 사육되었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공유가 일상이 된 채 살아간다. 타인의 기억이 나의 것과 뒤섞이는 환경에서 성장하며 마주한 근원적 불안과 모호해진 자아의 경계를 파고드는 한편, 집단적 연결망에서 벗어나 고유한 단독자가 되려는 갈망과 그 집단에 대한 애정을 동시에 드러낸다. 네 번째 수록작 「꿈 공장」은 반려동물을 SNS 마케팅 수단으로 착취하고자 전자칩을 이식해 환각을 가하고 본능까지 조작하는 기술이 만연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기술의 기만성에 불쾌감을 느낀 인물은 반려동물의 순수한 꿈속 풍경을 보여주는 어플을 개발하며 생명의 존엄을 지키려 애쓴다. 하지만 기술이 의도와 다르게 역이용되는 과정을 겪으며 인물은, 이 거대한 흐름을 과연 거스를 수 있는지, 동물이 누려야 할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뇌한다. 위와 같이 21세기의 그렉 이건은 고도화된 세계가 사람의 정신 영역을 침범할 때 생기는 실존적 틈을 비추며 인간 실존과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과학적 엄밀함으로 쌓아 올린 그의 이야기는 삶의 밑바닥을 깊이 파고들며 하드 SF만이 가능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수학적 공리를 세계로 구축하는 가장 ‘이건’다운 상상력 가짜 뉴스와 음모론, 비이성적인 현대 사회를 향한 통찰 “그렉 이건의 서늘한 광기, 그리고 세계의 근간을 해부하는 통찰이 예리하게 살아 있는 완벽한 기록이다.” - 『로커스』 이번 소설집은 그렉 이건이 전작에서 보여줬던 하드 SF의 정수 또한 담고 있다. 일곱 번째 수록작 「암흑 정수」는 전작 『내가 행복한 이유』에 수록된 중편 「루미너스」의 속편으로, 서로 다른 수학 체계를 가진 두 우주의 충돌을 막으려는 수학자들의 사투를 그린다. 추상적인 수학 공식이 현실을 무너뜨리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설정으로 긴박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여덟 번째 수록작 「방랑자의 궤도」는 타인의 믿음이 물리적인 힘이 되어 사람을 특정 사상에 묶어두는 세상을 배경으로 한다. 인류의 정신이 뒤섞인 후 대다수는 거대한 신념의 늪에 머무르지만, 주인공은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채 경계를 떠돈다. 어떤 믿음에도 굽히지 않고 그를 통해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을 묻는다. 시의적이면서 사회 비판적인 시선도 날카롭다. 다섯 번째 수록작 「크라이시스 액터스」는 과학적 사실보다 자기 확신을 앞세우며 음모론에 빠져드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서늘하게 비춘다. 기후 위기를 부정하는 비밀 모임에 들어간 주인공은 자신이 세상을 속이는 거짓에 맞서고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을 통해, 각자가 믿고 싶은 것만 진실이 되는 시대가 마주한 위태로운 풍경을 그려낸다. 여섯 번째 수록작 「미토콘드리아 이브」는 유전자 분석으로 인류의 뿌리를 찾는 유행과 그 뒤에 숨은 속임수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았던 공통 조상 '이브'를 내세워 인류는 모두 한 가족이라고 외치는 단체와 그 화려한 모습에 홀린 사람들을 통해, 작품은 과학적 사실이 대중의 믿음과 만날 때 어떻게 또 다른 신화나 권력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이처럼 다양한 층위의 작품들은 과학이라는 정밀한 렌즈를 통해 인간과 세계를 응시하는 그렉 이건만의 독보적인 시선을 완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