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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현실, 침묵의 시간
의학 연구원인 페드로는 쥐를 대상으로 암 세포의 분열과 유전자 지도를 연구하던 중, 자신에게서 훔쳐낸 실험용 쥐를 번식시켜 자신에게 되팔려 하는 무능하고 가난한 무에카스 가족을 알게 된다. 어느 날 한밤중에 다급하게 페드로를 찾아온 무에카스는 딸인 플로리타가 위독하다고 도움을 간청하고, 그가 안내된 판자촌에서는 엉터리 민간요법이 총동원되는 가운데 만삭의 플로리타가 하혈을 쏟으며 죽어가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페드로는 중절 수술을 시작하지만 그녀는 숨을 거두고 만다. 순간적인 판단 착오는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더 큰 실수로 이어지고, 불리한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그는 지하 감옥에 갇혀 벽에 그린 낙서에서나 위안을 찾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작품은 애증과 복수, 쾌락과 연민이 교차하는 통속 소설 같은 긴장감 속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집단 무의식에 대한 끊임없는 관찰과 비판을 곁들인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독재 정치가 지속되면서 국제관계에서 고립되었던 스페인의 반역사적인 시간관과 비역동성, 즉 변화와 발전을 거부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속성을 비판한다. 딸이자 손녀인 도리타를 페드로에게 시집보내는 것이 최대의 목표인 전쟁 미망인 모녀, 아버지의 권력으로 페드로를 석방시키려는 부유한 친구 마티아스, 도시 빈민으로 전락한 농민으로 근친상간을 저지른 무에카스 등 뚜렷한 개성을 지닌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통해, 투우나 뮤지컬에 열광하던 보통 사람들과 세련된 감식안과 호사 취미를 자랑하는 최상류층, 끼니를 잇는 것이 최대 관심사인 빈민층이 각각의 생명력을 얻는다. 제목인 ‘침묵의 시간’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현실, 개인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를 고발한다. 소설의 부활을 증명하다 20세기 스페인 최고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소설에 대한 개념Ideas sobre la novela》(1925)에서 ‘소설의 죽음’을 진단했다. 독자들의 실제 삶이 소설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이며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서 언어를 매개로 현실을 재현하고 상상하는 작가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현되는 삶과 실제 삶 사이에 거리를 두고 낯설게 만든 이 소설에서 ‘언어가 과연 실제의 삶을, 객관적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무용하다. 여기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보여주기’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페드로의 실패――사회적인 면뿐 아니라 개인적인 면에서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질 뿐 어디에서도 페드로가 실패했다고 서술되지 않는다. 어디에서도 ‘페드로는 명석하지만 소심한 인물이다’라고 서술하지 않지만,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생각만 많고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임을 알 수 있다. 사건에 대한 서술은 간단하게, 대상에 대한 기술은 장황하고 복잡하게 전개되어, 독자는 마치 여행자가 낯선 도시에 대해 느끼는 것과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침묵의 시간》은 실제의 삶과 전혀 다른 무엇을 창조함으로써 ‘소설의 죽음’에 대한 전제 자체를 반박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