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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고 버려진 것들 앞에서 설레기
엄마의 낡은 밥상 제주도의 구덕과 책과 상인의 눈빛 가격을 매기기 애매한 물건 3할의 성공률과 영국 구두 인생 여행가방의 바퀴가 멈췄을 때 멸종 직전의 유선 진공청소기 헌책방에서 사는 헌책 스위치와 보낸 7년 나는 인천부두에서 보물을 만났을까 고체 비누와 도시의 향기 깨진 조명을 붙인 성탄 전야 동대문 원단 시장에서 배운 것 스타우브보다 비싼 나의 가마솥 나무 사러 가는 길 안경을 찾아 헤맨 날들 집에 천 년 된 나무토막을 두는 건 나름 의미 있지만 아무것도 아니다 병풍처럼 살 것인가 병풍을 살 것인가 우일요가 문을 닫던 겨울과 품위 있는 남자 어깨끈 달린 라디오 이야기 에필로그: 오래된 물건 구입을 권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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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것은 다르다. 헌것들은 잘 정형화되지 않는다. 새것의 표면은 하나같이 매끈하지만 모든 헌것의 흠집은 조금씩 다르다. 특히 요즘 새 물건들은 탄생 설화도 표준화된다. 온갖 신제품에 ‘브랜드 스토리텔링’이 붙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상품화된 서사일수록 표준화된 기승전결이 있다. 그러니 이런저런 브랜드 스토리라는 걸 뜯어보면 전문가들이 별도의 이야기를 개발한 뒤 상품에 어떻게든 접붙인 경우도 많다. 헌 물건엔 그럴 여유가 없다. 중고품 가게에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한번 버려진 것들이다. 그런 물건엔 고유한 이야기가 있다. 남이 버린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만지고 살피다 보면 그 이야기를 찾아내거나 상상하게 될 때도 있다. 당장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도 좋다. 헌것과 나의 생각이 붙으면 그 자체로 뭔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된다.
--- pp.11~12, 〈낡고 버려진 것들 앞에서 설레기〉 중에서 누구에게나 생활은 고달프다. 하나하나 일을 해나가는 건 겁난다. 뭔가를 결정하는 건 어렵다. 나도 그렇다. 그 사이에서 돌아보니 추억 같은 물건 몇 개가 쌓여 있었다. 나는 장우석 실장과 뭔가를 맞춰 나가며 고달프고 두렵고 어려운 도시 생활을 헤쳐온 건가 싶기도 하다. --- p.39, 〈가격을 매기기 애매한 물건〉 중에서 나이가 들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친해지는 것 같다. 내 경우로 보면 돈은 없는데 좋은 물건을 한번 사보려는 아저씨들. 입맛으로 치면 멋은 없는데 맛은 있는 식당에 부러 가는 사람들. 그런 아저씨들과는 사람 많은 자리에서 우연히 함께 앉았을 때 서로의 성향을 확인해 가까워질 때가 있다. --- p.89, 〈나는 인천부두에서 보물을 만났을까〉 중에서 2024년 나는 연초부터 연말까지 내내 뭔가 고치고 있었다. 크고 작은 물건부터 경력의 방향성과 현금 흐름까지. 고치다 보니 한 해가 다 지났는데도 고칠 게 남아 있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거실에 신문지를 깔고 웅크리듯 엎드려 뭔가를 붙이고 있었다. 낡고 깨진 전등갓을. --- p.107, 〈깨진 조명을 붙인 성탄 전야〉 중에서 배움이 돈과 직결된 건 아니지만 돈을 쓰는 게 정성의 표시라면 확실히 돈을 써야 했다. 얼굴을 익힐 때마다 업체의 사장님들은 작은 뭔가를 알려주었다. 때로는 옆에 계시던 손님들이 알려주기도 했다. 한번은 경상도 말투를 쓰던 어떤 손님이 어떤 물건의 재료로도 애매해 보이는 나무토막을 만지작거리며 “이걸 이 값에 팔면 안 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끼어들었다. “실례지만 이게 좋은 나무입니까.” 그는 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 나이테를 보세요. 촘촘하죠. 나무의 밀도가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나무가 좋은 나무예요.” --- p.139, 〈나무 사러 가는 길〉 중에서 사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의 삶은 결국 뭔가의 병풍이나 배경이다. 이 나이쯤 되면 뭐가 됐든 어딘가의 병풍을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조금 더 근원적으로 보면 주체적인 삶이 마냥 딱히 좋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주체적인 삶의 정의와 당위는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다. 하지만 병풍 하나쯤은 살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병풍을 사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논리라고 할 수도 없는 생각의 흐름이지만 이게 내 패턴이니 별수 없었다. --- p.166, 〈병풍처럼 살 것인가 병풍을 살 것인가〉 중에서 사장님의 답변은 가변적이고 유연했다. “언제 되나요.” “다음 주쯤 와봐요.” “얼마인가요.” “되어봐야 알아요.” 나는 점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다음 주까지 기다렸다. 그 다음 주 화요일에 찾아가자 사장님께서는 “왜 월요일에 오지 않았냐”고 내게 가벼운 타박을 주셨다. 가벼운 타박이야말로 세운상가 같은 시장의 특산물 아닌가. 내가 그런 생각으로 만만해 보이는 웃음을 짓는 동안 사장님은 수족관 속 활어회를 보여주듯 전원을 켜 라디오 소리를 들려주셨다. --- pp.189~190, 〈어깨끈 달린 라디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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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가 불가능한 사람들의 전국 진심 자랑
어크로스의 ‘진심’ 시리즈는 한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탐구하고 아껴온 대상에 관한 에세이입니다. 취미와 직업 사이에서, 오래된 애정과 축적된 경험 사이에서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좋아함의 농도가 차곡차곡 쌓여 생긴 마음을 이야기하는 어크로스 에세이 ‘진심’ 시리즈 출간 일, 돈, 시간, 그리고 트렌드라는 파도 속에서 우리는 어느덧 ‘적당히’의 기술을 익혔다. 정면 돌파하기보다 적당히 버티고, 깊게 파고들기보다 얕게 흩어지는 법을 배우며 나만의 색깔을 잃어간다. 하지만 여기, 적당히 타협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 누가 시켜서도, 돈이 되어서도 아니다. 그저 좋아서, 더 알고 싶어서,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한 분야에 자신의 생을 깊숙이 밀어 넣은 이들. 어크로스 ‘진심’ 시리즈는 이렇듯 한 개인이 온 마음을 다해 아껴온 대상에 관한 뜨거운 기록이다. 이 시리즈는 유명세나 화려한 성과를 좇지 않는다. 대신 취미와 직업, 애정과 경험의 경계에서 ‘자신의 길을 꾸준히 걸어온 사람’만이 길어 올릴 수 있는 단단한 통찰을 전한다. 무언가를 지독하게 좋아해 본 사람의 세계는 한계 없이 확장된다는 점에서, 모두의 진심은 다르지만 또 닮았다. 마찰 있는 경험이 점점 사라지는 디지털의 시대, 저자들이 전하는 날것 그대로의 진심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몰입의 감각을 깨우고, 다시 한번 뜨거워질 용기를 건넬 것이다. 오래된 것들을 고치는 동안, 나도 조금씩 고쳐졌다 잡지 에디터로 일하며 세상의 온갖 좋은 물건들을 두루 접해도 희한하게 그의 눈길과 손길이 닿는 것은 오래된 물건들이다. 필요한 게 있다면 새것을 사서 문제를 즉각 해결할 수 있는 시대지만 그는 오히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좋게 만드는 일’에 마음을 쏟는다. 『서울의 어느 집』, 『좋은 물건 고르는 법』 저자이자 프리랜서 에디터인 박찬용의 이야기다. 그는 신간 『오래된 물건에 진심』에서 누군가의 손을 거치고 거쳐 자신에게 당도한 물건들과 지지고 볶는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물건들은 저마다의 굴곡진 사연을 품고 있다. 엄마에게 등 떠밀리듯 받아와 직접 분해하고 다듬은 낡은 자개 밥상, 3만 원에 사서 20년째 고쳐 신는 영국산 구두,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병풍 한 점을 구하기 위해 헤맨 시간들까지. 오래된 물건들을 삶 안으로 들이고 그 물건들을 고치고 다듬는 과정은 결코 효율적이지 않다. 수선은 늘 예상보다 오래 걸리고, 때로는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보다 비용도 더 든다. 하지만 그는 그 번거로운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저자에게 오래된 물건이란 단순히 낡고 헌 물건이 아니다. “새것의 표면은 하나같이 매끈하지만 모든 헌것의 흠집은 조금씩 다르다”는 그의 말처럼 오래된 물건의 상처와 마모는 낡음의 증거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시간을 견뎌왔는지 보여주는 흔적과도 같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어떤 물건의 가치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지나온 시간 그리고 함께한 시간 속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결국 물건뿐 아니라 사람 역시 조금씩 바꾸어놓는다는 것도. 새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내 것’의 이야기 오늘날 우리는 ‘브랜드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으로 박제된 신화가 붙은 새 물건들을 소비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상품화된 서사에는 표준화된 기승전결이 있을 뿐, 정작 물건과 나 사이의 진실한 관계는 끼어들 틈이 없다고 말한다. 어디서 사도 똑같은 품질을 유지하는 고가의 신제품은 편리하고 화려하지만, 모든 사용자에게 동일한 이미지를 강요한다. 신품 중심의 시대에서 물건은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그 자리에는 타인이 설계한 유행과 가성비의 논리만 남게 된다. 반면 헌 물건은 정형화되지 않은 고유한 흔적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비로소 나만의 이야기를 쌓을 여백을 허용한다. 비싼 값을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세속적인 명품의 기준에서 벗어나, 내 손때가 묻고 내 삶의 궤적과 함께 낡아가는 물건이야말로 진정한 명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와 비용을 들여가며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씨름하듯 보내온 시간 속에서 물건은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삶의 동반자로 거듭난다. 『오래된 물건에 진심』은 물건을 통해 삶의 속도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쉽게 사고 쉽게 버리는 대신, 내가 가진 것을 더 오래 쓰기 위해 애쓰는 마음.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고쳐 쓰는 태도. 저자는 그 느리고 번거로운 과정 속에서 오히려 삶의 밀도와 애정을 발견하게 된다. “좋은 물건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아끼다 보면 좋은 물건이 된다”는 책 속 문장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