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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문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다자이 오사무
수치 / 가정의 행복

사카구치 안고
벚나무 숲 만개한 꽃 아래 / 타락론

다케다 린타로
대흉의 제비 / 그대, 죽지 말지어다

오다 사쿠노스케
길 / 흙발 그대로의 문학

다나카 히데미쓰
야호(野狐) / 사요나라

후기
우울과 파멸의 망령들, 혹은 영원한 저항의 사도들

저자 소개 6

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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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zai Osamu,だざい おさむ,太宰 治,츠시마 슈지津島修治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 카나기무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가진 자로서의 죄책감을 느꼈고,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성장한다. 1930년,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井伏_二]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는 본명 대신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35년 소설 「역행(逆行)」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 현 쓰가루 군 카나기무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이다. 그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가진 자로서의 죄책감을 느꼈고, 부모님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게 성장한다.

1930년,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도쿄제국대학 불문과에 입학하지만,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후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井伏_二]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그는 본명 대신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1935년 소설 「역행(逆行)」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단편 「역행」이 올랐지만 차석에 그쳤고, 1936년에는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한다. 복막염 치료에 사용된 진통제 주사로 인해 약물 중독에 빠지는 등 어려운 시기를 겪지만, 소설 집필에 전념한다. 1939년에 스승 이부세 마스지의 중매로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한 후 안정된 생활을 하면서 많은 작품을 썼다.

1947년에는 전쟁에서 패한 일본 사회의 혼란한 현실을 반영한 작품인 「사양(斜陽)」을 발표한다. 전후 「사양」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 작가가 된다. 그의 작가적 위상은 1948년에 발표된, 작가 개인의 체험을 반영한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수차례 자살 기도를 거듭했던 대표작은 『만년(晩年)』, 『사양(斜陽)』, 「달려라 메로스」, 『쓰기루(津?)』, 「여학생」, 「비용의 아내」, 등. 그는 1948년 6월 13일, 폐 질환이 악화되자 자전적 소설 『인간 실격(人間失格)』을 남기고 카페 여급과 함께 저수지에 몸을 던진다.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상품

사카구치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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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o Sakaguchi,さかぐち あんご,坂口 安吾,사카구치 헤이고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다자이 오사무와 더불어 ‘무뢰파(無賴派)’의 대표 작가이다. 본명은 헤이고.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아버지 니이치로와 어머니 아사 사이의 5남으로 태어났다. 사카구치가의 선조는 지금의 후쿠오카현 가라쓰의 도공이었다가 후에 니가타로 이동해 온 지방 부호다. 아버지 니이치로는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니가타 신문사 사장이었고 한시 시인으로도 알려진 정치가로서 언제나 다망했으며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사카구치가의 재산은 체면과 의리를 중시했던 니이치로의 대에서 탕진되게 된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 다자이 오사무와 더불어 ‘무뢰파(無賴派)’의 대표 작가이다. 본명은 헤이고. 1906년 10월 20일 니가타현 니가타시에서 아버지 니이치로와 어머니 아사 사이의 5남으로 태어났다. 사카구치가의 선조는 지금의 후쿠오카현 가라쓰의 도공이었다가 후에 니가타로 이동해 온 지방 부호다. 아버지 니이치로는 당시 중의원 의원이자 니가타 신문사 사장이었고 한시 시인으로도 알려진 정치가로서 언제나 다망했으며 장남을 제외한 자식들에게는 무관심하고 냉담했다. 사카구치가의 재산은 체면과 의리를 중시했던 니이치로의 대에서 탕진되게 된다. 니이치로의 전처와 첩의 아이까지 합한 열세 명의 형제 중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난 안고는, 어린 시절 이미 방랑벽이 있었으며, 골목대장 행세를 하며 싸움질을 하고 돌아다녀 어머니의 미움을 사는 한편, 주로 무사들의 군담을 숙독했고, 남몰래 닌자의 인술을 연구하기도 했다. 1919년 니가타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이 무렵부터 집과 학교를 싫어해서 수업을 빠지고 홀로 방황하는 날들을 보내다 낙제하게 되고,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발자크 등의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가 결국 1922년에 퇴학당했다. 그해 가을 상경해 부잔 중학교에 입학했고 에드거 앨런 포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을 인생의 낙오자로서 사랑하며 그들의 작품을 숙독했다.

막연하게 엄격한 구도자의 삶을 동경하여 1926년, 도요 대학 인도철학윤리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불교서와 철학서를 섭렵하는 데 몸을 혹사하며 공부에 매진한 탓에 생긴 신경쇠약 증세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라틴어, 프랑스어 등 어학을 맹렬히 공부한다. 193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동인지 [말]과 [청마]를 창간했다. 1931년에 발표한 단편소설『바람 박사』와 『구로타니 마을』이 소설가 마키노 신이치의 극찬을 받음으로써 신진 작가로 급부상한다. 1932년 여류 작가 야다 쓰세코를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1936년 절교한 후 신생을 기하며 교토를 방랑하면서 그녀와의 사랑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눈보라 이야기』를 썼다. 1946년, 전후의 시대적 본질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파악한 「타락론」과「백치」에 의해 일약 시대의 총아, 오피니언 리더로 떠오르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에세이 「타락론」에서는 전쟁에 졌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인간에게는 타락의 본성이 있고 혼란은 필연적이며, 타락을 통해 다시 일어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타락론」을 소설화한 것이 「백치」다.

1947년 가지 미치요와 결혼하고, 전후의 시대상을 반영한 소설과 에세이, 탐정소설, 역사 연구, 문명 비평 르포르타주 등 다채로운 집필 활동을 전개하여 전후의 난세에 문화와 역사 및 사회의 흐름에 대한 대중의 지적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와 동시에 세무 당국을 상대로 한 소송, 경륜 부정 사건 고발, 각성제와 수면제 중독에 의한 정신착란 발작 등 실생활 면에서도 언제나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1955년 2월 17일 지방 취재 여행에서 돌아온 후 자택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향년 50세였다. 전후 일본 사회의 혼란과 퇴폐를 반영한 작풍을 확립하고 시대의 새로운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일본인에게 충격과 감동을 안겨준 사카구치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와 오다 사쿠노스케 등과 함께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무뢰파 작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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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다 린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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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田麟太?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에서 출발하여 점차 화려한 도시의 그늘에 가려진 뒷골목 서민들의 삶과 쇠락해가는 인간 군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일본 최고의 번화가이자 동시에 가장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들었던 도쿄 아사쿠사의 밤거리를 영원한 무대로 삼은 작품들은 무뢰파의 선구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화려한 네온사인 뒤편에서 꿈틀거리는 부랑자와 사기꾼, 매춘부들과 함께 호흡하고 뒹굴며 그들의 땀내 나는 이야기를 날것 그대로 건져 올린 그의 삶은 가히 그 자체로 치열한 문학적 실험이었다.

오다 사쿠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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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kunosuke Oda,おだ さくのすけ,織田 作之助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와 함께 사회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저작활동을 펼친 전후 무뢰파 작가. 스탕달의 영향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제3고등학교에 5년 재학하다 중퇴했다. 「비」로 다케다 린타로(武田麟太郎)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오다사쿠(애칭)는 왁자한 오사카 풍경과 저잣거리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편소설 『메오토젠자이(부부 단팥죽)』로 큰 사랑을 받았다. 「권선징악」 등 역작을 차례로 발표했으나 장편 『청춘의 역설』이 반군국주의 작품으로 발금처분을 받았다. 1946년에 패전 직후의 혼란스러운 세상을 묘사한 단편을 발표했으며, 사소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와 함께 사회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저작활동을 펼친 전후 무뢰파 작가. 스탕달의 영향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제3고등학교에 5년 재학하다 중퇴했다. 「비」로 다케다 린타로(武田麟太郎)에게 인정을 받았으며,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오다사쿠(애칭)는 왁자한 오사카 풍경과 저잣거리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생생하게 묘사한 장편소설 『메오토젠자이(부부 단팥죽)』로 큰 사랑을 받았다. 「권선징악」 등 역작을 차례로 발표했으나 장편 『청춘의 역설』이 반군국주의 작품으로 발금처분을 받았다. 1946년에 패전 직후의 혼란스러운 세상을 묘사한 단편을 발표했으며, 사소설의 전통에 결별을 선언한 평론 「가능성의 문학」을 집필, 그 실험적 작품이라 여겨지는 장편 『토요부인』을 [요미우리신문]에 8월부터 연재했으나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미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아 건강을 해친 상태였다. 한편 「수필 오사카」, 「오사카의 얼굴」, 「오사카의 발견」 등 오사카의 감수성을 유쾌하고도 시니컬한 필체로 써내려간 산문을 다수 남겼다. 모든 사상이나 체계에 대한 불신, 옛 전통에 대한 반역을 목표로 삼았으며 고유의 감각과 직관에 바탕을 둔 스탕달풍의 템포가 빠른 작풍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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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히데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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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emitsu Tanaka,たなか ひでみつ,田中 英光

1913년~1949년. 소설가. 도쿄 출생하여 어머니의 집안인 다나카 가에 호적을 올렸다. 가마쿠라에서 성장했으며 1932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재학 중 조정 일본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올림포스의 과실」을 썼다. 1935년부터 동인잡지에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다자이 오사무에게 사사했다. 주재원으로 있던 당시 경성(현, 서울)에서의 체험, 형님의 영향으로 입당한 공산당에서의 체험, 애인과의 신주쿠에서의 생활이 문학의 배경에 있다. 1948년 다자이의 자살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무렵부터 수면제, 여자, 술에 빠져 퇴폐적 생활을 보냈으며 『여
1913년~1949년. 소설가. 도쿄 출생하여 어머니의 집안인 다나카 가에 호적을 올렸다. 가마쿠라에서 성장했으며 1932년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 재학 중 조정 일본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올림포스의 과실」을 썼다. 1935년부터 동인잡지에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다자이 오사무에게 사사했다. 주재원으로 있던 당시 경성(현, 서울)에서의 체험, 형님의 영향으로 입당한 공산당에서의 체험, 애인과의 신주쿠에서의 생활이 문학의 배경에 있다. 1948년 다자이의 자살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무렵부터 수면제, 여자, 술에 빠져 퇴폐적 생활을 보냈으며 『여우』 등과 같은 무뢰파적 작품을 발표하게 되었다. 1948년 11월, 다자이 오사무의 무덤 앞에서 자살했다. 향년 36세였다. 대표작으로는『올림포스의 과실』, 『지하실에서』, 『여우』, 『안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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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눈으로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세상의 다양한 텍스트를 지켜보고 이해하려 애쓴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는 단 한 줄의 고백도 적지 못한다는 지독한 아이러니를 안고 살아가는 중이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8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115*190*20mm
ISBN13
9791197158728

책 속으로

당신은 작가란 ‘얼간이 같은 짓의 진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의식해야만 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중에서

소설가 따위, 아주 한심해. 인간쓰레기야. 거짓말만 잔뜩 쓰고 있어. 조금도 로맨틱하지 않은걸. 영원히 남의 얼굴을 하고 태연하게 있겠다는 속셈이잖아.
---「수치」중에서

술도 담배도, 또 맛있는 안줏거리도 지금의 일본인에게는 사치니 그만두라고 한다면, 일본에 좋은 예술가는 단 한 명도 없게 됩니다. 그것만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위협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은 아까부터 정부니 국가니 하면서 짐짓 중대한 일인 양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를 자살로 이끄는 정부나 국가는 냉큼 사라지는 편이 낫습니다. 아무도 아깝다고 생각 안 합니다.
---「가정의 행복」중에서

그곳은 벚나무 숲 한가운데였습니다. 사방의 끝은 만개한 꽃들에 가려져 그 너머 안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소와 같은 두려움이나 불안은 어느새 사라졌습니다. 벚꽃 너머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도 더는 없습니다. 그저 고요하게, 그리고 소곤대면서, 꽃잎이 계속 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벚나무 숲의 만개한 꽃 아래 앉아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라도 그곳에, 그렇게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었으니까요.
---「벚나무 숲 만개한 꽃 아래」중에서

나는 천황제에서도 지극히 일본적인(따라서 독창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정치적 작품의 면모를 본다. 천황제는 천황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천황은 간혹 스스로 음모를 꾸밀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음모조차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이 섬으로 유배되거나 산속으로 도망치는 결말로 끝이 났으며, 결국 언제나 정치적인 이유로 존립을 인정받아왔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완전히 잊혔을 때에도 기어이 정치적인 이유로 추대되어 존재를 나타내곤 했는데, 그 존립의 정치적 이유란 말하자면 정치가들의 후각에 의한 것으로, 그들은 일본인의 성벽(性癖)을 통찰한 끝에 그 기질 속에서 ‘천황제’를 발견했다. 이는 다만 천황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체할 수만 있다면 공자가든 석가가든 레닌가든 상관없었다. 단지 그럴 수 없었을 뿐이다.
---「타락론」중에서

살아라, 타락하라. 이 정당한 절차 외에 진정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편리한 지름길이 있을 수 있겠는가.
---「타락론」중에서

“아아, 전쟁에 나가고 싶다.” 이런 의미 없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동안 차라리 빗발치는 포탄 아래를, 총을 메고 나아가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지금 내가 빠져 있는, 어리석고 괴로워할 보람조차 없는 수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단숨에 죽고 싶었다.
---「대흉의 제미」중에서

갑자기 멈춰 선다. 지독한 숨 가쁨이 찾아온 것이다. 가슴속 장기를 짓눌러 터뜨릴 듯한 호흡곤란이다. 눈앞이 새하얘진다. 붉은 기침이 터진다. 사에키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자신의 기침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서 있다. 쓸쓸한 한때다.
---「길」중에서

단정하게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모아두고 서재에 반듯하게 앉아서는 ‘자, 어디 책상 위 먼지부터 떨어볼까’ 하고 쓰기 시작한 작품에서 이제 대체 무슨 매력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흙발 그대로의 문학」중에서

나는 이 공안에 내 나름의 해석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그저 필사적으로 인생을 살아내고 수행하기만 하면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으리라고 단순하게 믿고 있는 나에게, 이 공안이 “체념하라, 내 마음이여, 짐승이여, 잠을 자라” 라고 말을 거는 것 같은 기분일 따름이다.
---「야호」중에서

‘사요나라.’ ‘신이여, 항상 헤어지는 그대 곁에 있으라’도 아니며 ‘다시 만날 날까지’ 따위의 감미로운 소망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허무적인 이별을 뜻하는 일본어. 나는 그런 덧없고 서늘한 이별의 말만이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일본 역사와 사회의 더할 나위 없이 빈곤한 슬픔을 떠올린다.
---「사요나라」중에서

일본인의 전쟁 도덕이란 ‘살아서 돌아올 생각 마라’다. 출정할 때 ‘다시 만날 날까지’를 기원하는 작별 인사 따위를 나누는 일은 당치도 않다. 아무래도 ‘이리 될 운명이니 작별합니다’라는 체념의 ‘사요나라’가 가장 걸맞다. 게다가 여자들은 ‘사요나라’ 뒤에 ‘용서하세요’를 덧붙인다. ‘이런 운명이 된 것을 용서해주십시오’라며 국가 권력에 대해 한층 비굴하게 사죄하고 있는 셈이다. 참으로 노예의 말인 것에 기가 막힐 따름이다.
---「사요나라」중에서

나는 나 자신을 죽음의 사자(使者)라 믿으면서도 실은 아직 삶의 세계에 ‘사요나라’를 고하고 싶지 않다.

---「사요나라」중에서

출판사 리뷰

기성의 권위와 사상에 반기를 든
젊은 저항자들의 문학사조, 무뢰파

“서로 서투른 거짓말은 하지 말기로 합시다. 나는 당신의 문장을 서점 매대에서 읽고 몹시 불쾌했습니다. 이 글만 보면 마치 당신 혼자서 수상자를 결정한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문장이 아닙니다. 분명 누군가에게 강요받아 쓴 글임에 틀림없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그걸 노골적으로 과시하려고 애쓰기까지 하는군요.”

이 인용문은 현대의 어느 문학상 응모자가 심사 결과에 실망하여 불만을 품고 쓴 글처럼 읽힌다. 그러나 이 글의 작자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다. 1935년 제1회 아쿠타가와상 공모에 낙선한 그는 당시 특정 심사위원을 향한 이와 같은 노골적인 항의의 글을 『문예통신』이라는 문예지에 공개서한 형식으로 발표했다.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인신공격성 발언은 물론 협박에 가까운 과격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조그만 새를 기르고 무용을 구경하는 게 그리도 고상한 삶인가? 확 찔러버릴까 보다.’ 그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천하의 몹쓸 놈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가 실명을 거론하며 ‘저격’한 인물은 훗날(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당대의 문호이자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는 아쿠타가와상 최종심에 오른 그의 작품을 두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작가의 현재 생활에 불쾌한 구름이 끼어 있는 탓에 재능이 온전히 발휘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며 사생활을 이유로 낙선시킨 데 대해 다자이 오사무가 울분에 차서 쓴 당돌하기 그지없는 도발적 선언문이었다. 다자이 오사무를 한없는 자기혐오와 우울의 늪에 빠져들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허무와 파멸의 작가로 알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라면 생경하게 느껴질 만한 일화다. 그러나 그가 이끌었던 문학사조인 ‘무뢰파’의 사상을 이보다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례도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의 젊은 세대가 느낀 열패감과 소외감은 컸다. 무뢰파 문학의 작가 세대는 사실상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또 다른 피해자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위 세대, 즉 당대의 기성세대가 전쟁을 일으켰고, 전선에 내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국가의 대의 아래 폭력을 강요당한 것은 젊은 세대였음에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 과업도 결국 그들의 몫이 되었다. 일본은 망했어도 일본을 망하게 한 장본인들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러한 전후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변부로 밀려난 채 노역에 가까운 국가 재건의 대업을 떠맡은 젊은이들의 암담한 심정은 말로 헤아릴 수 없었으리라. 당시 문단의 젊은 지식인들은 그러한 패배의 그림자 속에서 기성의 가치와 도덕을 부정하며 무뢰파라는, 일단의 문학 운동을 전개한 것이었다.

세상의 가식과 위선에의 거부
철저한 타락을 통한 구원을 부르짖다

무뢰파는 기성세대의 자기기만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보았다. 전쟁도 패전 후의 비극도 바로 그들의 위선과 가식이 불러온 결과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삶을 “부끄러움 많은 생애”라고 고백하는 등 내밀하고 부끄러운 자아를 숨김없이 말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을 실토하지 못하는 기성 사회의 수치를 비꼬았다. 하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보내는 다자이 오사무의 공개서한에서도 드러나듯이 노골적인 적대감의 발산을 굳이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이는 오롯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행동이었다기보다는 기성세대의 도덕적 허영, 즉 진정 비열한 윤리적 타락이라 여긴 그것을 세상에 까발려 그들 스스로 치부를 돌아보게끔 하려는 젊은 세대 나름의 당돌한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무뢰파 작가들은 끊임없이 타락하라며 부르짖었다. 그들이 기성 사회의 허위의식을 무엇보다도 혐오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 타락이 오늘날에 생각하는 단순한 도덕적, 윤리적 타락이 아님은 명백해진다. 비록 무뢰파 작가가 자신의 실제 인생에서나 작품 속에서 술과 약물에 취해 기행을 일삼고 방탕한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이를 통한 개인적 구원을 세상에 설파하려 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들 삶에서의 타락과 그들이 세상에 요청한 타락은 언뜻 모순되어 보일지 모르겠으나, 세상의 기망으로부터 먼저 자유로워지는 것이야말로 추악하고 무너진 세계에서 승리하는 것임을 공통되게 피력하고 있다. 그들의 방탕한 삶이란 그러한 주장의 다소 과장되고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한 ‘퍼포먼스’를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실제 자신의 인생에 적용해 보여준 일종의 실천으로 보아야 할 터다.

허무와 절망의 사도들이 남긴 승리의 묘표들
모든 시대의 젊은 세대를 위한 영원한 경전

이제껏 한국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과 그의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만 예민한 영혼이 거쳐 온 지난한 내면적 고뇌의 종착역이라는 데 그쳐 있었다. 그러나 이제 젊은이들은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이 그려낸 우울과 파멸로부터, 오묘한 타락의 시선으로 들여다본 인생의 통찰과 저항의 의지를 읽는다. 작가의 자살로 귀결되는, 절망의 끝이라는 처절한 영역도 외려 숭고한 저항의 실현으로 여겨지고 있다. 스스로를 기성세대와 그들이 바꾸려 하지 않는 사회구조의 피해자라고 느끼며 출구 없는 불안과 우울의 지하도를 헤매는 세대에게 다자이 오사무가 소구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울과 절망을 교감할 수 있는 귀중한 파멸의 전거가 문학이라는 이름의 경전으로 이미 존재하는 까닭이다.

무뢰파 작가들은 병으로, 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식으로 단명했다. 그리하여 기성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않은 채 저항하는 젊은 세대의 일원으로 영원히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옛 일본의 작가들이 취한 타락의 태도는 치열한 저항의 기록으로서, 새로이 절망하기 시작한 모든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감정적으로 격한’ 위로를 줄 우울과 파멸의 경전으로 세상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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