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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꽃이 피다, 눈멀도록 동트는 아침 개화開花 봄이 오는 소리 매화의 시간 대지 군자란蘭 수선화 비비추 내일로 미룰 수 없는 일 고도의 빗장 또 다른 내일 별 개여울 앵두가 익는 시간 연정戀情 나그네 오월의 연가 기다림도 꽃이 될까 내 생의 봄날, 오늘 예쁜 손녀에게 2부 짙푸른 녹음, 그 그늘 잃어버린 느낌표를 찾습니다! 네 잎 클로버 까치집 풀잎에 쓴 편지 산 아카시아, 그 투박한 언어 벙어리 꾀꼬리 사람 사는 이야기 행복의 행방 빈집 투병 일기 숲속에서 시를 읽으며 한여름 밤의 꿈 유월의 숲 살구나무에 기대어 뉴카멜리아호를 타고 물은 흐르고 싶다 장사도 기행 축복의 노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3부 이윽고 단풍 드는 시간 구월이 오면 유예할 수 없는 숨결 용두산 공원 가을 연가 바람의 노래 생명의 절규 행복의 조건 오아시스 우울증 특강 죽은 시인의 노래 사색思索 산호수 마음 챙김 가을의 단면 나의 오빠에게 그리운 아버지 국립 대전현충원에서 어머니, 그 닳아진 이름에게 가을, 틈새를 읽다 참깨를 볶으며 아름다움을 찾아서 부부, 그 마음 노안老眼 4부 홀로 선 겨울나무처럼 밤이 일찍 찾아오는 계절 시련의 강 진짜 사나이 배웅 참 좋은 사람 간이역에서 겨울딸기 홀로서기 저문 강가에서 새의 무늬 동지 팥죽 큰 바위는 울지 않는다 가로등과 나 그대라는 계절에 머물다 더 기다리는 우리가 됩시다 겨울밤 겨울비, 회귀하는 마음 고단한 삶에 보내는 편지 지구의 끝에서 온 엽서 고향의 설날 명상 새해맞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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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는 아침
청솔가지 끝에 맺힌 시린 염원이 언 땅의 서릿발을 녹이고 실눈 뜬 햇살 사이로 움트는 생명의 맥박을 깨운다 상상의 날개를 달고 들판을 휘돌던 바람 일제히 여명의 창을 열어젖히면 어제의 낡은 허물은 안개에 씻기고 너와 내가 섞여 비로소 ‘우리’가 되는 눈부신 순환 거울 속 허상을 깨고 일어선 진실이 거친 파도를 넘고 넘을 때 태양은 비로소 바다에 붉은 낙인을 찍는다 오랜 가슴앓이, 그 생채기 위로 우리는 맞잡은 손으로 길을 만들어 가나니 마침내 절벽 사이로 출렁이는 푸른 근육 살아 숨 쉬는 것들의 행렬은 장엄하다 벌판의 초목들이 푸른 함성을 지를 때 함께 걷는 발걸음은 순한 양 떼와 같아도 어둠은 결코 쓰라림의 잔해가 아니다 그것은 새벽을 향한 침묵의 언어이자 눈보라를 뚫고 오는 힘찬 북소리였다 그림자는 언제나 등 뒤에 서 있지만 섬광처럼 지혜는 내 안에서 반짝이고 있다 시련 앞에 무릎 꿇지 않는 기상으로 땅끝에서 밀어 올린 사랑의 노래를 이제 가장 높은 곳의 바람에 실어 보낸다 개화開花 그대는 겨울만큼 멀리 있어도 봄에 피는 꽃은 이토록 눈부시다 추억이 어린 강가에 버들강아지 눈을 뜰 때면 지난날의 시린 바람마저 그리움의 향기로 번져간다 편백나무 들어선 고요의 숲속 벤치에 앉아 봄을 줍는 소녀 머릿결로 반짝이는 햇볕 아래 아로새긴 추억들이 그림자로 서면 여태껏 견뎌온 세월 한 톨의 씨앗 같은 희망이 함박꽃웃음으로 활짝 터지리니 다시는 우리 아프지 말자 내 사랑 봄을 한입에 물고 멀미 나도록 춤을 춰 보자 봄이 오는 소리 장독대 위 고여 있던 백설기 한 판 천사의 몫이라며 아껴두었더니 어느새 볕의 허기가 다 비워냈다 황사 그림자 드리운 마당가에 소한小寒네 꽁꽁 묶인 빗장 녹이러 간 소식은 없고 산새들만 날갯짓 퍼덕이며 지난겨울의 눈싸움에 여념 없는데 가는 세월이 아쉬운 비둘기만 목이 젖도록 구구절절 울어도 순리의 물길은 누구도 막을 수 없어 골짝마다 졸졸 은빛 수다 터져 나오면 냇가 얼음장 깨치는 언니의 빨랫방망이 소리 그 박자에 맞춰 세상이 환한 입술을 연다 매화의 시간 얼어붙은 계절의 모서리도 결국 닳아 가듯 고통 또한 쟁기질 끝에 흙이 뒤집히는 생의 과정일 뿐 발바닥에 감기는 단단한 지력을 믿으며 눅눅한 그림자를 끌고 한 걸음 더 딛는다 가슴 한구석 마른나무에 옹이 같은 통증이 돋을 때 스스로를 지독하게 도리깨질하던 세월이 거친 껍질로 몸을 만진다 이제는 꽉 쥐었던 주먹의 힘을 조금 빼 볼 시간 메아리 없는 고독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파수꾼이 될 때 매란한고 발청향梅蘭寒苦發淸香 살을 에는 한기를 속으로 삭여내지 않고서야 저 여린 꽃잎이 어찌 뼈를 깎는 향을 토해내겠는가 혹한이 가장 뜨겁게 나를 관통하는 지금 가장 깊은 어둠의 틈새로부터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 이미 천둥으로 밀려오고 있다 대지 해를 뒤쫓느라 그림자 한 번 밟지 못했다 사철을 두고 내게 있어 가난은 살갗을 파고드는 가시밭이었기에 묵묵히 자갈을 골라내며 여기까지 왔다 부지런한 자들이여, 내 젖가슴 골짜기에 닻을 내려라 이 한 몸 기꺼이 그대들의 주춧돌이 되리니 비바람의 채찍질 따위 두렵지 않다 내 몸을 뚫고 솟아오른 저 푸른 깃발들 언젠가 꽃의 비명으로 피어나 열매 맺으리 잠시 낡은 시계태엽을 멈추고 모질게 휘몰아치던 세월의 앙금을 가라앉힌다 비로소 오롯해지는 자정自靜의 시간 겨우내 맨발로 서서 눈보라와 된서리를 몸으로 받아낸 뒤에야 날 선 마음은 부드러운 흙살이 되었다 살얼음 낀 상처가 제 몸을 깎아내며 뼛속까지 얼었다 녹기를 수차례 문드러진 살점 아래로 비로소 태초의 서늘한 향기가 고인다 여인의 속살 같은 숨결 위로 생명의 씨앗들이 기지개를 켠다 봄비 한 줄기에 심장이 다시 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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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일부]
어디든 길이 되는 바람의 시어 이훈식(시인·서정문학 발행인) 화경 이점숙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가고자 하면 어디든 길이 되는 바람처럼, 시인의 뜨거운 시혼과 내재화된 언어로 수많은 삶의 서사를 그려내고 있다. 바람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으나, 그 바람으로 인해 들꽃들이 사방으로 번지고 묶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들이 순환의 생명력을 얻는다. 이처럼 시인에게 바람은 잊혀가는 고향의 소리이자 그리움과 아픔의 잔향이며, 차마 가둘 수 없는 원초적 본능의 언어이다. 오고 감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 바람은 다 비워낸 텅 빈 가슴 같지만, 날개 없이도 하늘과 땅을 모두 소유한다. 어쩌면 시인이란 이렇듯 실재하되 잡히지 않는 바람의 언어를 추적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점숙 시인은 오랜 시간 묵히고 삭여낸 생의 언어들로 잊혔던 바람의 소리를 깨워 우리에게 들려준다. 1부에서 4부까지 우리가 흔히 지나칠 수 있는 일상의 풍경들을 사유의 깊은 곳에 침전시켰다가 생명의 혼을 불어넣는 작업, 시제의 중심에서 제 몫을 다하는 시어들은 그간 시인이 갈고닦은 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태초의 혼돈 끝에 ‘빛이 있으라’는 선언으로 코스모스의 세계가 열렸듯, 어둠을 누르고 찬란히 솟아오르는 ‘동트는 아침’을 표제로 삼은 시인의 사유는 눈부시다. 한 편의 시를 얻기 위해 가슴 태웠을 시간들이 촉촉이 젖은 시어 속에서, 덧칠하지 않은 날것의 언어로 살아 숨 쉬고 있어 무척 정겹다. 〈제1부 꽃이 피다. 눈 멀도록〉 상상의 날개를 달고 들판을 휘돌던 바람 일제히 여명의 창을 열어젖히면 어제의 낡은 허물은 안개에 씻기고 너와 내가 섞여 비로소 ‘우리’가 되는 눈부신 순환 거울 속 허상을 깨고 일어선 진실이 거친 파도를 넘고 넘을 때 태양은 비로소 바다에 붉은 낙인을 찍는다 오랜 가슴앓이, 그 생채기 위로 우리는 맞잡은 손으로 길을 만들어 가나니 마침내 절벽 사이로 출렁이는 푸른 근육 살아 숨 쉬는 것들의 행렬은 장엄하다 벌판의 초목들이 푸른 함성을 지를 때 함께 걷는 발걸음은 순한 양 떼와 같아도 어둠은 결코 쓰라림의 잔해가 아니다 ― 「동트는 아침」 중에서 「동트는 아침」의 행간을 보면 시인의 의도가 더욱 명확해진다. “어둠은 결코 쓰라림의 잔해가 아니다” 시인에게 어둠은 감춰야 할 상처나 절망의 찌꺼기가 아니다. 실컷 울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이 맑게 보이듯, 어제의 낡은 허상을 깨고 일어선 진실이 거친 파도를 넘을 때 모든 존재의 함성은 비로소 눈부신 여명이 된다. 어둠은 불확실성이 주는 아픔이 아니라, 새벽을 잉태하는 숭고한 시간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의 엄숙함처럼, 시인은 동트는 시간 속에서 ‘절벽 사이 출렁이는 푸른 근육’과 같은 생의 역동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함께 걷는 발걸음을 경외하며, 살아 숨 쉬는 것들의 장엄한 행렬을 ‘우리’라는 공동체적 가치로 명명한다. 이는 표피적인 사유를 넘어서는, 연륜이 가져다준 ‘빛의 시학’이다. 오랜 가슴앓이와 생채기를 도리어 찬란한 동트는 역사의 자양분으로 치환해 낸 시인의 깊은 시선이 실로 돋보인다. 그저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조여오던 거친 세상의 모서리들이 이내 순한 호수로 풀려 눕는다 첫돌도 채 되기 전 제 몸만 한 가방을 메고 외출하던 날 엄마 아빠의 고단함을 아장아장 다독이듯 낯선 바람 속에서도 잘 웃어주던 대견한 내 아가 본아, 네가 짓는 웃음 한 번에 내 어깨가 들썩이고 옹알이로 부르는 노랫소리에 할미의 가슴은 행복을 연주하는 해묵은 풍금이 된다. ― 「예쁜 손녀에게」 중에서 「예쁜 손녀에게」를 읽다 보면, 시인의 시선이 가장 낮고 따뜻한 곳으로 수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조부모에게 손녀란 존재 자체로 하루의 시작과 끝이며, 삶의 어떤 고통도 단숨에 휘발시키는 경이로운 구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 ‘본이’를 향한 헌사는 독자에게도 깊은 유대감과 따스한 미소를 전해준다. 작품의 행간마다 손녀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에서는 한없는 자애로움이 흘러넘친다. 낯선 세상 속에서도 대견하게 웃어주는 아이의 천진함 앞에서 거친 세상의 시름은 이내 잊힌다. 그 순수한 옹알이 소리에 맞추어 할머니의 가슴이 ‘행복을 연주하는 해묵은 풍금’으로 변모하는 대목이 이 시의 백미다. 아이의 작은 몸짓 하나가 시인의 잠든 서정을 깨우는 예술적 동인이 되는 순간이다. 삶의 비극과 고단함을 깊이 통과해 본 자만이 인생이라는 희곡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쓸 수 있다고 했던가. 시인은 자신을 옥죄어오던 거친 세상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아이가 짓는 웃음 한 번에 ‘순한 호수’로 풀려 눕는 역설적인 위로의 순간을 명민하게 포착해 낸다. 옹알이로 노래하는 손녀의 맑은 모습 속에는, 지금껏 거친 풍파를 견디며 살아온 화자 자신의 삶이 잔잔한 실루엣(silhouette)으로 투영되어 있다. 이처럼 시인은 삶에서 얻어진 생의 희로애락과 고난의 화살을 결코 외부로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자신의 내면으로 묵묵히 끌어안으며, 가장 순수한 존재를 통해 ‘긍정의 힘’과 생의 찬가로 승화시키는 성숙한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말] 돌아보니 온통 흔들리며 걸어온 길이었다. 삶의 가장 치열한 자리에서 울고 웃던 날들, 그 시린 계절을 버티게 한 것은 오직 시詩였다. 이제 평생을 묵묵히 살아내느라 고단해진 어깨를 토닥이며 겨울나무처럼 가만히 나를 들여다본다. 고독했고, 감사했고, 참으로 소중했던 시간들. 지금 저마다의 겨울을 건너고 있을 지친 당신의 어깨 위로 동트는 아침의 따스한 햇살 한 줌 내려앉기를. 2026년 8월 동트는 아침을 기다리며, 이점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