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 필통/물잔 (포인트 차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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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나를 부른 이름
나를 키운 팔 할은 … 009 언제나 꿈꿔온 순간이 … 015 야간 비행 … 023 여름의 풍속 … 029 당신과 조우 … 046 현수막 휘날리며 … 054 한여름 밤의 라디오 … 060 나의 기원, 그의 연애 … 071 카드놀이 … 078 안아볼 무렵-이효석문학상 수상 소감 … 091 몸과 바람 … 096 속삭임-단어 사전 1 … 099 기우뚱-하다-단어 사전 2 … 102 2부 너와 부른 이름 생일 축하-창비 오십 주년 축사 … 107 여름의 속셈-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십 주년 발문 … 114 그녀에게 휘파람 … 126 연호관념사전 … 140 그녀의 푸른 손-황순원문학상 축사 … 150 두근두근 산해경山海經 … 159 말言 주변에서, 말주변 찾기-박완서, 「닮은 방들」 … 164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헤르타 뮐러, 『숨그네』 … 170 부사副詞와 인사-단어 사전 3 … 176 초겨울-단어 사전 4 … 180 3부 우릴 부른 이름들 알록달록한 점점點點 … 185 리듬의 방향-귄터 그라스의 『양철북』과 폴란드 북부 도시 그단스크 … 193 문장 영향권 … 204 점, 선, 면, 겹 … 213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 229 아는 얘기, 모르는 노래 … 245 빛과 빚 … 257 잊기 좋은 이름-「물속 골리앗」 작가노트 … 264 말의 약점-단어 사전 5 … 271 초판 작가의 말 … 273 개정판 작가의 말 … 277 |
Ae-Ra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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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 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p.12 「나를 키운 팔 할은」 중에서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맘속에선 미풍이 불던 우리의 여름. 창문 너머론 거대한 초록이 넘실거리고, 그 시절 대중에게 사랑받던 젊은이 둘이 “나 더이상 무얼 바라겠니”라 노래하고 있었다. 대걸레와 빗자루를 든 그애와 내가 서 있는 창밖으론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하얀 뭉게구름이 흘러갔고, 힙합 문법에 맞게 사회 비판을 일삼던 두 가수는 그때만큼은 서정적인 멜로디에 몸을 맡긴 채 지금이 참 좋다고, 젊어서 참 기쁘다는 식의 가사를 읊고 있었다. ---pp.20-21 「언제나 꿈꿔온 순간이」 중에서 이따금 나는 내 성정의 경박하고 아름다운 어떤 부분, 내가 껴안는 상스러움의 많은 부분은 그 별들의 영향에서 나온 게 아닐까 생각한다. 토성의 영향 아래 있는 우울한 기질의 학자처럼, 빛을 흡수한 뒤 천천히 사라지는 야광 별의 영향을 받으며, 길을 걷고, 물건을 사고, 가끔은 그 대가리가 커다란 모니터 앞에 앉아 글을 쓰다, 전화가 오면 다시 벌떡 일어나 놀러 나갔던 것은 아닐까 하고. ---p.28 「야간 비행」 중에서 만일 언젠가 제 소설에 명랑한 세계가 가능했다면 그건 제가 특별히 건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특별히 밝은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찧고 까불며 놀 수 있는 마당을 선배들이 다져줬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제 농담이 선배들의 진담에 빚지고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p.110 「생일 축하」 중에서 누군가의 문장을 읽는다는 건 그 문장 안에 살다 오는 거라 생각한 적이 있다. 문장 안에 시선이 머물 때 그 ‘머묾’은 ‘잠시 산다’라는 말과 같을 테니까. ---p.118 「여름의 속셈」 중에서 요즘 나는 ‘우리는 누군가와 반드시 두 번 만나는데, 한 번은 서로 같은 나이였을 때,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상대의 나이가 됐을 때 만나게 된다’는 걸 배웠다. 살다보면 가끔은 두번째 만남이 훨씬 좋다는 것도. ---p.122 「여름의 속셈」 중에서 부사는 명사나 동사처럼 제 이름에 받침이 없다. 그래서 가볍게 날아오르고, 허공에 크게 선을 그린 뒤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바로 그거’라고 시치미를 뗀다. 부사 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버리는 안이함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참’ ‘퍽’ ‘아주’ 최선을 다하지만 답답하고 어쩔 수 없는 느낌. 말(言)이 말(言)을 바라보는 느낌. 부사는 마음을 닮은 품사다. ---p.178 「부사(副詞)와 인사」 중에서 책을 읽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추는 이유는 다양하다. 모르는 정보라. 아는 얘기라. 아는 얘긴데, 작가가 그 낯익은 서사의 껍질을 칼로 쓰윽 벤 뒤 끔찍하게 벌어진 틈 사이로 무언가 보여줘서. 그렇지만 완전히 다 보여주지는 않아서. 필요한 문장이라. 갖고 싶어서. 웃음이 터져. 미간에 생각이 고여. 그저 아름다워서. ---pp.214-215 「점, 선, 면, 겹」 중에서 나란 사람은 타인에게 냉담해지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그렇게 애쓰지 않으면 냉소와 실망 속에서 도리어 편안해질 인간이라는 것도 안다. 타인을 향한 상상력이란 게 포스트잇처럼 약한 접착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해도 우리가 그걸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얇은 포스트잇이 쌓여 두께와 무게를 지닌 무언가가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p.226 「점, 선, 면, 겹」 중에서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pp.241-242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 혹은 부족한 것은 공포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선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닐까. ---p.268 「잊기 좋은 이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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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산문집에 새 옷을 입혀 다시 내보냅니다.
덕분에 저도 오래전에 쓴 글들을 다시 읽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최근에 쓴 산문들과의 차이가 보였습니다. 예컨대 첫 산문집에 등장한 제 ‘젊은 부모’는 두번째 산문집에 이르러 쇠약해지셨고, 제가 오십 주년 축사를 건넨 출판사는 육십 돌을 넘었습니다. 이국의 한 시인이 제게 준 연필은 특별한 새 주인을 찾았고, 자전거 앞자리에서 아빠를 돌아보며 웃던 K 선배의 딸은 어엿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세번째 산문집을 낼 즈음이면 또 많은 게 달라져 있겠지요?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며 흘러가는 구름처럼 혹은 그 구름을 옮기는 바람처럼요. 물론 변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제 “성정의 경박하고 아름다운 어떤 부분, 내가 껴안는 상스러움의 많은 부분”은 지금도 여전하고, 벌받듯 맨손으로 도시의 “축제를 받치고 있을” 사람들의 근심 또한 그대로이거나 더 깊어진 듯합니다. 옛날 시의 아름다움과 누군가를 애도하는 이들의 마음 또한 변하지 않은 듯하고요. 변하지 않은 것 중에는 원고 앞에서 매번 쩔쩔매는 저의 모습도 있습니다. 어떤 글을 쓰든 고되지 않은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그 과정과 수고를 다른 데 양보하거나 위탁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뭘까 생각합니다. 제 속의 어떤 고지식함 때문일 수도 혹은 이 산문집에 적은 여러 이름 앞에서 무언가 삼가는 마음, 옷매무새를 살피는 예의 같은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닐 테지만요. 한동안 글쓰기에 용기를 잃었던 시기, 제게 힘이 되어준 이름들에게 감사와 우정의 인사를 전합니다. 정말이지 얼마나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2026년 한여름 김애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