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모든 일들의 시작 …7
꼬마는 춤추지 않는다 …14 내 머릿속의 타이어 …24 난기류 …37 M …47 동체착륙 …62 글이 내는 길 …74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 …84 빗자루를 든 꼬마 …96 나의 아름다운 상담사 …106 이해의 이해 …117 꼬마에게 보내는 편지 …128 예술가의 길 …138 독서클럽 …152 독서클럽 2 …163 늑대를 떠나보내기 …174 꿈 …185 용서란 무엇인가 …196 터닝포인트 …210 1일 1 단편 읽기 …223 에필로그|나의 두 할머니들 …235 |
심윤경의 다른 상품
|
트로이에서 이타카까지 보름이면 가닿을 길을 이십 년 동안 방황했던 오디세우스쯤은 우습도록, 나는 가족이라는 찻잔 속의 태풍에서 오십 년간 길을 잃고 헤맸다.
---p.10 「모든 일들의 시작」 중에서 대체로 침착하고 온화해 보이는 외모 아래, 골이 뎅뎅 울리도록 시끄럽게 발악하는 꼬마의 쇳소리를 나는 감추고 살았다. 겨우 한 겹 신문지로 덮은 것처럼 위태롭고 엉성한 은폐였다. 나는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울부짖음에 쫓겨다니다가, 그것을 사람의 언어로 번역해 소설로 옮겼다. ---p.17 「꼬마는 춤추지 않는다」 중에서 활자들은 십여 년간 그들을 붙잡은 마지막 족쇄였던 일렬 정렬마저 극복하고 자유롭게 부서져 훨훨 날아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불꽃놀이나 꽃다발 같은 작은 궤적들을 남기며 폭발한 후 소멸했다. 글자들이 일렬 정렬된 물리적 상태를 드디어 파괴하고 탈주해버리는 상태를 경험하면서 나는 놀라움 속에서 한 단어를 떠올렸다. 난독증. 이것은 난독증이다. ---pp.35-36 「내 머릿속의 타이어」 중에서 책이 가득한 책꽂이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괴물이었다. ---pp.59-60 「M」 중에서 나의 난독증은 난처하게도 ‘할 수 있다’와 ‘할 수 없다’의 경계가 극도로 불분명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이 어떤 때는 할 수 있고 어떤 때는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사이에서 언제나 자신이 없고 혼란스러웠다. 대개 이 모든 혼란스러운 상태를 나 자신의 나태함이나 의지박약으로 해석하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쉬운 방식으로 결론을 내리곤 했다. ---p.139 「예술가의 길」 중에서 나에게 책 읽기는 거의 인생 전체를 리모델링하다시피 하는 큰 노력을 기울여 도전하고 유지하는 어떤 활동이다. 두려움과 피로가 엄청나지만, 그럼에도 도전하게 되는 건 그 일이 가치 있다고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p.159 「독서클럽」 중에서 어둠은 인생의 한 부분이고, 최고의 순간은 몹시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찾아오며, 그것을 통과하는 쓰디쓴 하루하루야말로 행복을 넘어서는 존엄한 과정이다. ---p.184 「늑대를 떠나보내기」 중에서 이전의 모든 날과 달라진 아침, 간밤의 지옥과 지금 이 순간의 온전한 평화 사이에 있었던 것이 도서관에서 여러 사람의 손때를 묻힌 한 권의 낡은 책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p.208 「용서란 무엇인가」 중에서 좋은 소설과 좋은 친구들이 있는 삶이라니, 그리고 때로 그 두 가지가 하나가 되기도 한다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이 있을까? ---p.234 「1일 1 단편 읽기」 중에서 나의 난독은 M과의 투쟁과 극복을 중심 서사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그 길은 일과 사람의 관계, 소설과 나의 관계를 묻는 과정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난독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도 중년의 어느 날쯤에 나는 분명 ‘나는 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맞닥뜨렸을 것이다. ---p.241 「나의 두 할머니들」 중에서 |
|
읽기와 쓰기가 사라진 자리에서 마주하는
생의 깊은 주름과 오래된 상흔 심윤경은 데뷔작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서 난독증을 앓는 인물인 ‘동구’의 이야기를 그렸다. 당시 안타깝게만 여겼던 동구의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자신이 맞닥뜨리는 미래가 된다. 작가는 그 소설을 쓰며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살아오는 동안 문제에 부딪힐 때면 늘 대처해왔던 방식대로 이번에도 도서관에 가 관련한 자료를 샅샅이 살펴본다. 그러나 온갖 책을 뒤져봐도 자신의 증상에 딱 들어맞는 정보를 찾지 못한다. 난독 증세는 대개 어린 시절 시작되어 성인까지 이어지는 터라 그처럼 어른이 되어 갑작스레 발병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우울증이나 성인 ADHD를 의심해보기도 하지만, 읽기와 쓰기를 제외한 다른 일상 영역에서는 완벽하게 제 기능을 유지하기에 명확한 진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평생 해온 일을 난데없이 이어갈 수 없게 되었는데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이 심각하고도 난처한 상황 속에서 그는 혼란의 뿌리를 찾아 그동안 외면해온 자신의 속마음을 들여다본다. 고통의 외피를 들추자 그 깊숙한 곳에는 오늘날 중년 여성이자 중견 소설가 심윤경이 되기 한참 전의 ‘꼬마’가 있다. 자기만의 분명한 소신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고 탐구심과 호기심도 넘쳤던 “나의 어린 자아”(17쪽)다.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쏟아냈던 꼬마가 어느 날부터인가 더이상은 한 글자도 쓰지 않겠다며 악을 쓰고 버티고 있다. 심윤경은 자신의 “일생이 그 아이의 아픔을 이해하고 단단히 맺힌 원한을 풀어주며 일상과 글쓰기의 보이지 않는 이인삼각을 잡음 없이 완수하는 과정이라는 사실”(18쪽)을 깨닫는다. 글 막힘과 난독이 모두 이 꼬마에게서 발원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심윤경은 그와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그 과정은 녹록지 않다. 오랜 시간 ‘M’으로 표상되는 무시무시한 목소리에 제압당하며 자신의 욕망을 묵살당하고 자유를 빼앗긴 꼬마는 쉽게 화해할 마음이 없다.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그 목소리는 여전히 심윤경의 마음과 머릿속에 들러붙어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하고 자기 비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외롭고 아파하는 꼬마, 절망하고 분노하는 꼬마를 더는 모른 척할 수 없다. 심윤경은 더이상 M에게 복무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며 노트북 앞에 앉는다. 부서져 훨훨 날아가는 철자들을 앞에 두고, 눈을 감고서라도 써나가기 시작한다. 캄캄한 하늘을 비행하는 눈먼 조종사의 마음으로. M인가 꼬마인가. 나는 그 갈림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M의 영광도 꼬마의 파멸도 아닌, 나의 자유를 찾아가는 길. 이것은 이전까지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내 앞에 길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_「M」에서 읽기의 다른 이름들; 아득한 절망, 거대한 혼란 그리고 상처를 끌어안는 화해와 치유에 관하여 탄탄한 기승전결의 구조와 질서를 구축하는 데 누구보다 능숙한 베테랑 소설가조차 자신의 인생이라는 작품에서만큼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그는 ‘난독증을 앓는 소설가’라는 믿기 힘든 상태를 벗어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는 채로 까마득한 “기승전전전”(236쪽)의 시간을 보낸다. 책이 가득 꽂힌 책꽂이가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거대한 괴물처럼 여겨져 서점에 들르는 것조차 꺼리게 될 거라고 과연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도무지 사양할 방법이 없어 얼결에 시작하게 된 학부모 독서클럽이 그에게 예상치 못한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 힘겹게만 여겨지던 책 읽기를 타인과 더불어 하는 경험은 더딜지언정 마음에 조금씩 용기를 불어넣는다. 타인과 마음을 나누고 혼자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책들을 우연히 만나 위로를 얻으면서 그는 잃어버린 읽기의 세계와 다시금 마법처럼 연결된다. 난독은 그에게 읽고 쓰는 삶을 앗아간 생애 최악의 사건이었으나 동시에 평생 외면해온 상처를 똑바로 마주하고 고통의 쇠사슬을 끊어낼 기회를 안겨준 귀중한 선물이기도 했다. 아득한 절망이자 거대한 혼란이었고, 끝내 화해와 치유, 해방과 자유의 다른 이름이 된 읽기. 『난독 일기』는 가장 어두운 순간이 인생 최고의 순간일 수도 있음을 알려주는 한 소설가의 증언에 가까운 고백이자 읽고 씀으로써 자유를 되찾는 삶의 해방 일지다. 작가라는 나의 정체성은 글을 쓰는 것으로만 유지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정말로 더 못 쓰겠는데 작가로 살아가려면 글을 써야 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나는 작가로 살아야만 했다. 글을 써야 했다. _「글이 내는 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