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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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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여는 글 _ 제2시집을 내면서 / 4
추천사 … 박종한 / 7
추천사 … 김준한 / 8
순수의 시절, 영원히 사라진 paradise … 조욱현 / 10
유년의 고향 꿈꾸기와 노년의 인생 반추 … 손해일 / 12

제1부 : 수취인 없는 편지
박 따던 날 / 38
시간을 새긴 둥근 엉덩이 / 39
배반의 장미(1960년대) / 40
백령도 사곶해변에서(26. 6. 16일) / 42
백로 / 44
사과밭에서 / 45
부산 해운대에서(26. 6월 18일) / 46
빈집 / 48
희망 다지기 / 50
선재도 뻘 다방 / 52
소금 받으러 가는 길 / 54
수수엿 / 56
수취인 없는 편지 / 58
슬픔의 이유 / 60
새댁 / 62

제2부 : 시간이 머무는 풍경
밤을 빚는 서정 시인 / 64
산그늘에 젖어 든 자장가 / 65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던 청록빛 / 66
샛강을 걸으며 / 68
봄이 오는 길목에서 / 69
시간이 머무는 풍경 / 70
싸리비 / 72
바람이 일군 목화밭 / 74
오솔길 / 75
새들이 돌아가는 저녁에 / 76
오월 / 78
오월에는 / 80
이월의 잔설 / 81
자연이 내게 준 첫 문장 / 82
잠진도에서 / 84
풀잎마다 맺힌 기억 속의 이슬 / 86
푸른 학 / 87
기억의 언덕에서 피어난 계절 / 88
내가 꽃이 될 때 / 89
꽃집 앞에서 / 90
주님은 나의 호수 / 92

제3부 : 바람의 노래
바다에 쓴 편지 / 94
바람의 노래 / 95
바람이 받아 적은 숲의 목소리 / 96
낙조 / 98
들꽃, 서러운 맑음 / 100
찻잔에 고이는 달빛 / 101
칡넝쿨의 가면 / 102
파랑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 104
첫사랑 / 106
만조 / 107
초록의 유전자를 거닐다 / 108
할아버지 제삿날 / 110
허공에 심은 꿈 / 112
허공을 스치는 바람처럼 / 114
꿈꾸는 반야 / 115
흑백 그림(1960년) / 116

제4부 : 기억 속의 동화
나의 노래 / 120
천국의 사이다 / 121
고요한 비명 / 122
기억 속의 동화 / 123
기억의 침몰 / 124
기억을 헹구는 그녀 / 126
그리움 / 127
날개 달린 구두 / 128
가을 연서 / 130
너는 쓸쓸한 바람이 되어 / 131
누에의 집 / 132
마음속의 세탁소 / 134
말 표 고무신 / 136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 / 138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 139
흙의 숨결 / 140
청보리 커튼 / 141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144쪽 | 200g | 130*210*20mm
ISBN13
9791194817710

출판사 리뷰

〈여는 글〉

2025년 2월, 첫 시집 『찔레꽃 피는 언덕』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 다시 그 시집을 펼쳐 보면 부끄러움에 어디론가 숨고만 싶은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때의 저는 「시」에 대해 깊이 공부하거나 철학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피어나는 생각들을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으로 적어내렸을 뿐이었지요. 육십 년 동안 마음속 이야기를 담아왔던 일기들을 밑거름 삼아, 한 줄 한 줄 시의 옷을 입혀 엮은 것이 바로 첫 시집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많은 이들에게 보이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에게만 마음을 나누고 싶었기에 소량으로 출간하였고,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필요한 분이 계실까 하여 교보문고에도 작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부족하고 서툰 점이 많지만, 그때의 꾸밈없고 투명했던 마음만큼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소중한 보석으로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저는 뜻하지 않게 중증의 청각장애를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소리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며 겪어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 그 안에서 삼켜야 했던 눈물과 아픔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첫 시집에 쓰지를 못했고,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도 역시 그 깊은 상처의 이야기를 모두 꺼내어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막상 펜을 들고 그 시간 들을 떠올리면, 마음보다 손끝이 먼저 굳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생채기의 딱지를 떼어내기에는, 그 기억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 쓰라린 기억들을 시로 녹여내기 위해서는, 저 스스로가 먼저 그 시절의, 나의 상처를 용서하고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조금 더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어놓으려니 두려운 마음이 앞서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족한 저의 글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싸안아 주시고, 따듯한 시선으로 읽어주신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한다.”
나에게 행운이 있다면, 그 행운마저도 사랑하는 딸들에게 주마.
언젠가는 지금은 담아내지 못한 그 아픔과 고통의 시간 들을 가감 없이 글로 써 내려가고 싶습니다. 저와 같은 자리에 있는 장애인들에게 시원한 냉수 한 모금처럼, 잔잔한 물결처럼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깊은 슬픔과 비애가 가슴속에 상처로 남아 있는 분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는 그런 시집을 꼭 만들고 싶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언제나 묵묵히 곁을 지켜주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에게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저를 믿고 사랑해 주는 효성스러운 세 딸과 사위들, 그리고 세상을 밝히는 귀한 다섯 손주에게, 평소에 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이 글에 담습니다.

“사랑해요, 정말 고마워요! 사랑한다, 나의 딸들아! 그리고 고맙다”.
아울러 저에게 부족한 점을 지적해 주고, 따뜻한 조언과 지도를 아끼지 않은 샘문그룹 지율 이정록 이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문학상 대상 수상자이며, 그리고 『눈물 강 위에 세우는 다리』의 저자이신 김준한 시인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에서 함께 공부하며 변함없는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학우님들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끝으로 아뢸 말씀은 제가 시집 제목을 처음에 “파랑새는 돌아오지 않는다”로 정했다가 본의 아니게 “바람의 노래”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조욱현 작가님께서 감사하게도 첫 번째 제목이었던 “파랑새는 돌아오지 않는다”에 대한 추천사를 써 주셨는데 뒤늦게 제목을 바꾸는 바람에 죄송스럽게도 본의 아니게 추천사가 약간 엇나간 점이 있으나, 독자님들께서 많은 이해를 해주신다면 고맙고도 감사하겠습니다.

2026년 6월 30일

시인 박상희 드림

〈평설〉

유년의 고향 꿈꾸기와 노년의 인생 반추

- 손해일(시인, 문학박사, 국제펜한국본부 제35대 이사장)

[1] 머리말

박상희 시인(이하 박 시인)의 제2 시집 『바람의 노래』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충남 태안 출신인 박 시인은 2019년에 한하운문학회 신인상으로 등단해 2024년에 〈한하운보리피리문학상〉도 받았고, 이번에 두 번째 시집을 내고 있다. 방송통신대에서 늦깎이로 국문학 전공하는 것을 비롯해, 샘문을 통해서도 다양한 문학 활동을 하고 있어 그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박 시인은 머리말에서 “2025년 2월, 첫 시집 『찔레꽃 피는 언덕』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 다시 그 시집을 펼쳐 보면 부끄러움에 어디론가 숨고만 싶은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때의 저는 「시」에 대해 깊이 공부하거나 철학적으로 고민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마음속에 피어나는 생각들을 순수하고 솔직한 마음으로 적어 내렸을 뿐이었지요. 육십 년 동안 마음속 이야기를 담아왔던 일기들을 밑거름 삼아, 한 줄 한 줄 시의 옷을 입혀 엮은 것이 바로 첫 시집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더구나 “살아가면서 저는 뜻하지 않게 중증의 청각장애를 갖게 되었다. 세상의 소리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며 겪어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 그 안에서 삼켜야 했던 눈물과 아픔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픔을 첫 시집에 쓰지를 못했다”고도 한다. 그 쓰라린 기억들을 시로 녹여내기 위해서는, 저 스스로가 먼저 그 시절의 상처를 용서하고 세상과 화해하는 법을 조금 더 배워야 할 것 같다. “깊은 슬픔과 비애가 가슴속에 상처로 남아 있는 분들에게, 작은 위로와 희망이 되는 그런 시집을 꼭 만들고 싶다.”라고 포부를 밝힌다.

69편이 담긴 이번 시집에는 유년의 고향에 대한 추억을 그리는 작품들이 많고, 나이 들면서 세상사에 대한 관심의 확장과 순수 서정 시편들이 담겨 있다. 박 시인은 시적 발상이나 시어 선택, 시를 이끌어가는 힘, 문장력 등이 잘 훈련되어 있다. 자신의 스토리를 욕심껏 길게 쓰다 보니 수필 같은 분위기도 있으나, 유려한 문체로 공감을 주고 있다. 박 시인의 이번 시집을 “유년의 고향 꿈꾸기와 노년의 인생 반추” 차원에서 살펴본다.

[2] 유년의 고향 추억과 행복한 꿈꾸기

흔히 젊은이는 미래에 살고 늙은이는 과거에 산다고 한다. 노인에겐 살아온 인생 자체가 즐거운 추억이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조차도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인생 비망록이다. ‘수구초심’이랄까? 박 시인의 경우도 탯자리인 고향 태안에 대한 추억의 시편들이 많다. 고향 찾기는 심리학의 대표적 방어기제인 ‘승화(Sublimation)’에 해당한다. 어릴 적 겪었던 결핍과 상처, 그리움, 추억, 무의식적 갈망 들을 예술적 표현으로 아름답게 발산하는 행위이다. 발달 심리학자 에릭슨에 의하면, 이것은 삶의 후반부나, 전환기에 이루어지는 중요한 심리작업이다, 단순한 추억팔이가 아니라 과거를 회고하고 유년기의 언어를 현재의 언어로 재구성하여 지나온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심층 심리학적으로는 유년의 순수함을 불러옴으로써 현재에 느끼는 외로움이나 허무감을 달래려는 자가 치료적 보상 목적도 있다.

특이한 점은 박 시인이 유년의 고향 추억을 회상하는 작품마다 마치 아련한 꿈을 꾸듯이 행복감에 젖는다는 점이다. 어릴 적 고향집, 아버지, 어머니, 오빠, 언니와 자신 모습이 한편의 작은 스토리의 동화처럼 전개된다. 독자로서 그 장면에 공감이 가는 것은 이를 실감있게 표현하는 박 시인의 우수한 문장력에 기인한다. 함축성 있는 제목 붙이기도 좋다. 그러나 짧게 비유하고 응축해야 하는 게 시의 속성인데. 스토리를 담아야 하니 자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다. 짧은 시보다는 수필로 좀 더 자세히 실감이 나게 쓰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유년의 고향 추억은 「박 따던 날」 「봄이 오는 길목에서」 「산그늘에 젖어 든 자장가」 「소금 받으러 가는 길」 「수수엿」 「시간이 머무는 풍경」 「싸리비」 「아버지 사랑 누렁소」 「바람이 일군 목화밭」 「자연이 내게 준 첫 문장」 「새댁」 등이다.

이제 몇 작품을 통해 이를 확인해 본다.

새근새근 해산 기에 접어든 숨찬 박/ 엄마는 지붕 위 산실에 올라 산파가 되었다/
톡톡톡! 나무망치로 박을 진찰하고/ 가슴에 귀 기울여 묵직한 울림을 듣는다/바늘로 박의 숨줄 살짝 찔러보고/ 속이 여문 내를 맡는다// 쓱, 쓱, 쓱! 아버지는 박을 가르고/ 득, 득, 득! 어머니는 주걱으로 하얀 속을 긁고/언니는 밤꽃처럼 고운 박속으로 국을 끓였다// 둥그런 두레반에 둘러앉아 먹던 그 맛/ 둥글게 찬 배를 툭툭 두드리면/ 박처럼 둥근 달이 처마 밑까지 와서 하하 웃고/ 우리도 호호 따라 웃었다//
잘 익은 박 속이 채워 주던 행복/ 박 따던 날은 아득한 옛날/

- 「박 따던 날」 전문

가난의 상징이던 초가집들은 새마을운동으로 거의 없어지고, 지금은 민속마을에서나 보는 귀한 유산이 되었다. 어릴 적 시골 마을의 초가지붕에 얹힌 둥근 박과 박넝쿨은 한 폭의 동양화였다. 박 시인이 회상하는 「박 따던 날」은 마치 흥부전의 박 타는 장면처럼 정겹고 행복이 넘친다. 해산날이 가까운 신부처럼 지붕 위의 농익은 박을 가려내는 산파 역할은 엄마 몫이다. “톡톡톡 나무망치로 박을 진찰하고” 바늘로 살짝 찔러보기도 한다. 이윽고 흥부네처럼 박 타기 잔치가 시작된다. “쓱, 쓱, 쓱! 아버지는 박을 가르고/ 득 득 득! 어머니는 주걱으로 하얀 속을 긁는다.” 언니가 끓인 박 속국을 식구들이 둥근 두레반에 앉아서 즐겁게 먹는다. “잘 익은 박 속이 채워 주던 행복”이다.

고요히 또는 느린 가락처럼/ 빛을 지우며 번지는 땅거미는/ 어머니 냄새로 온다// 저녁은 그래서 어머니의 시간이다/... 푸른 머위밭 지나/ 비탈길 굽이돌아 숨겨진 오솔길/

부끄러워 몰래 따 먹던 입덧 주전부리/ 옷소매에 쓱쓱 닦아 먹던 새콤한 기대/
복사꽃 발그레한 새댁이/ 굽은 나무 그늘에 앉아/ 낯 서른 그 봄을 달게 먹었네//
앵두 같은 첫딸을 품에 안고/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던/ 눈부신 스물다섯 살/
푸른 시절 가니 다시는 오지 않고// 아아, 어느새 복숭아 같던 첫딸도 늙어가고/
거울 속엔 백발의 노인이 서 있다/ 유수 같은 세월 속 소박한 행복들을/
주머니 구멍 난 줄 모르고 길에다 흘리고 왔다네//

- 「새댁」 일부

이 작품엔 여인 3대의 추억이 있다. “어슴푸레한 저녁은/ 어머니 품... 빛을 지우며 번지는 땅거미는 어머니 냄새로 온다” 새댁이 아련히 그리는 친정어머니 모습이다. 푸른 “머위밭 지나/ 비탈길 굽이굽이 숨겨진 오솔길”을 가서 “낯선 시집살이 첫날”을 반기던 건 박 시인 본인이다. 복사꽃 발그레한 새댁이 입덧 주전부리로 “부끄러워 몰래 따먹던 개복숭아” “앵두 같은 첫딸을 품에 안고/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던/ 눈부신 스물다섯 살 새댁”이 있다. 이젠 복숭아 같던 그 첫딸도 늙어가고/ 거울 속엔 백발의 노인이 서 있다“ 그게 소박한 행복인 줄도 모르고, 길에 흘리고 온 아쉬운 세월이다.

서해 바다/ 멀리 고깃배 위로 흰 구름 정처 없던 곳//... 도라지꽃 피는 보라길/ 소금 사러 가는 일은 언제나 내 차지//... 가도 가도 끝없는 산길을,//
멀리 까마득히 바닷가 외딴 염전 집 양철지붕... 그 섬 유일한 소금 집/ 유일한 침쟁이 한의사 집/ 유일하게 자식들을 서울대학에 보낸 집이라/ 거기 지붕 끝만 보여도 가슴이 턱 막혔다// 그 집 대문 앞에 서면 내 혀가 꼬이고/... 그 집 앞에서 내가 작아지는 까닭도 모른 채/ 왜인지 모르게 슬퍼지던 그 소금 집// 이제 소금 집 앞을 지나며/ 그 옛날 오래된 풍경을 꺼내 본다/ 눈부신 하얀 소금, 참외 향기// 나는 아직도 아홉 살 꼬맹이/ 그날의 풍경이 영원한 악보가 되어 흐른다//

- 「소금 받으러 가는 길」

화자인 박 시인이 아홉 살 꼬맹이 때 외딴 산길을 걸어 소금 심부름하던 추억이다. “서해 바다/ 멀리 고깃배 위로 흰 구름 정처 없던 곳” “쿵쿵 엄마의 심장 뛰는 소리 들리는 그 길”로 “소금 사러 가는 일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멀리 바닷가 외딴 염전 집 양철지붕이 유일한 소금 집이다. 또한 그 섬의 유일한 침쟁이 한의사이며, 자식들을 서울대 보낸 집이라, 어린 마음에 왠지 주눅이 들고 작아져 가슴이 턱 막혔다. 이제 소금 집 앞을 지나며 오래된 풍경을 꺼내본다. 아홉 살 소녀에겐 소금과 함께 심부름 잘 왔다며 싸준 개구리참외의 향기도 남아 있다.

아슴아슴 감꽃이 지고 나면/ 아기 감이 솜털처럼 매달리던 날// 우린 감나무 그늘 아래서 소곤거리며/ 떨어진 흰 단추를 주워 모아/나는 여덟 살 감꽃 공주가 되고/
모퉁이 집 한 살 많은 문수는/ 나의 왕자가 되어 웃음 짓던 골목//... 치마폭에 가득 하얀 별을 주워 올리면/ 감꽃 사세요, 잘 익은 감꽃이요/ 단추 사세요, 귀여운 단추 사세요/... 지금도 푸른 감나무를 보면,/ 감꽃처럼 하얗고 동그랗던/ 문수 얼굴이 선명히 떠오른다//

- 「시간이 머무는 풍경」 일부

“아슬아슬 감꽃이 지고 나면” 그 자리에 감또개가 열린다. 나는 여덟 살 감꽃 공주가 되고, 한 살 많은 문수는 왕자가 되어 소꿉놀이를 즐겼다. 지금도 감나무를 보면 “감꽃 사세요, 감꽃 단추 사세요”를 함께 외치던 문수 얼굴이 떠오른다. 박 시인의 유년의 추억은 대부분 8~9세에 멈추어 있는 듯하다.

우리 집 누렁소/ 사촌네 밭갈이하는 날 새벽, 목줄을 서둘러 조여 매고.../
되새김질 끝내기도 전 입마개 하고 따라나선 소 발걸음/ 땅바닥을 짓 누르듯 아버지 마음 무겁다// 이랴, 이랴, 쩟, 쩟, 쩟, 철썩! 철썩!/ 살을 가르는 회초리 세례/ 옆구리에 박히는 매질 소리/... 우리 소가 맞을 때마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신이 맞는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며/마음속의 날카로운 회초리로 큰아버지 등짝을 후려쳤다//... 천 평 콩밭 다 갈고 절뚝이며 돌아오는 고단한 하룻길/... 아버지는 달려 나가 입마개 풀어주고 거품을 닦아 주면서/ “이놈아! 돌밭 가느라 얼마나 고생 했니. 내 죄다 쯧쯧,/ 내 형님이니 할 수 없이 널 보낸 것이지,/ 네가 매를 맞을 때마다 내 가슴에 새긴 멍 자국이다/ 자 봐라” 아버지는 앞가슴을 헤쳐 보였다/ 그 심장 속에 우리 집 보물 일등급/ 소의 사랑 하트가 새겨져 있었다//

- 「아버지 사랑 누렁소」 일부

경운기나 트랙터가 보급되기 전까지 농가의 보물 일등 급 재산은 누렁소였다. 가축 일꾼이면서 한식구다. 이 작품은 이웃 큰집의 천 평 콩밭 매는데, 아끼던 누렁소를 빌려주었는데, 큰아버지가 “이랴! 쩟! 쩟!” 소를 채찍질할 때마다 아버지는 자신이 얻어맞은 듯 너무도 마음 아파했다. 옛날 농촌이면 흔한 일이었지만 아버지의 지극한 누렁이 사랑을 보여준다. 천 평 콩밭을 다 갈고 절뚝이며 돌아온 누렁이가 안쓰러워 아버지는 다시는 누렁소를 남에게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우리 아버지/ 싸리나무로 빗자루 만들어/ 안마당 쓱쓱 사랑 마당 싹싹/ 환해진 마당 둘러보며/ 하하 웃으시던 땀방울/ 손 뻗으면 닿을까 그리워//... 지금, 싸리비도 없고/ 아버지 안 계신 쓸쓸한 마당 가/ 하늘빛 수국꽃이 때맞춰 내리던/ 이슬비를 기다리며 아버지를 찾는다//... 싸리나무 등에 지고/ 내려오는 산길/ 아버지가 보이는 아침/ 저 맑은 산새 소리 지금,/ 아버지도 듣고 계실까// 아버지가 꿈결처럼 보이는 지금/ 저 고요한 산 새소리 듣고 계실까//

- 「싸리비」 일부

옛날 시골마당 청소는 댓 이파리 비나 싸리비로 다했다. “우리 아버지/ 싸리나무로 빗자루 만들어/ 안마당 쓱쓱 사랑 마당 싹싹” 마당을 청소하셨다. 지금은 싸리비도 없고, 아버지도 안 계신 쓸쓸한 마당뿐이다. “저 맑은 산새 소리” 아버지도 듣고 계실까? 새삼 아버지가 그립다.

겨울 밑반찬 장아찌 담글 고춧잎 따는 날/ 짧은 해 서두르는 매서운 손놀림/... 어머니 홑 몸배바지 아래 깡마른 발/ 땅속 냉기 스며드는 시간// 머릿수건 아래 파리한 손길/ 찬 서리 녹인 가을볕은 뉘엿거리고/ 등 뒤로 서늘한 그림자 길어진다// 하얀 다리 줄지어 선 김장 무밭/ 서리를 막으려 짚으로 묶어놓은 배추/ 어머니 마음 애달프고//... 계절을 잊고 살던 나의 어머니/ 무명 저고리 몸빼바지에 흰 머릿수건으로/ 생을 마감했어도/ 투정 없이 살아낸/ 장한 나의 어머니// 참 장한 나의 어머니//

- 「새들이 돌아가는 저녁에」 일부

사부곡과 함께 박 시인의 뇌리에 박힌 게 사모곡이다. 대개의 농촌 아낙은 사철 바쁜 농사일과 집안 대소사와, 자식들 뒷바라지에, 눈물 마를 날 없는 게 다반사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어머니에게 바치는 헌시이다. “겨울 밑반찬 장아찌 담글 고춧잎 따는 날” “어머니 홑 몸빼바지 아래 깡마른 발/ 머릿수건 아래 파리한 손길”이 생각난다. 김장 무밭, 서리 막으려 묶어놓은 배추 등 일거리 천지인 나날들이다. “무명 저고리 몸빼바지에 흰 머릿수건으로/ 생을 마감했어도/ 그 고단함 속에 투정 없이 살아낸 장한 나의 어머니”이다.

수수엿은 어머니 마음처럼 달고도 끈적한 채로/
뒤란 독 안에 홀로 굳어가고 있다/ 객지 간 아들을 기다린 지 벌써 엿새,/ 그리움은 시간을 잊고 눅진하게 늘어진다.// 오직 저 하나/ 돌아오기만을 목숨 걸고 기다린 사랑/... 뽀얀 김 나는 고봉밥에 살이 오른 굴비를 굽고/ 참기름에 귀한 김을 굽고/ 한평생 사랑으로 버무린 나물무침 수북하게// 그 아들 차마 마음으로는 보내지 못한 채/ 한 보따리 싸주고도 일평생 바친 희생/.../ 그러나/ 이번 설날엔 온종일 기다려도 발자국 없는 집엔/ 반가운 까치도 울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벗어 놓은 흰 고무신 안에/ 자식 대신 지나가던 가랑잎/ 가만히 들어앉았다.//

- 「수수엿」 일부

이 작품은 “객지 간 아들을 기다린지 벌써 엿새째” “오직 저하나/ 돌아오기만을 목숨 걸고 기다린“ 애타는 모정을 그렸다. “수수엿은 어머니 마음처럼 달고도 끈적한 채로/ 뒤란 독 안에서 홀로 굳어가고 있다” “한 보따리 싸주고도 일평생 바친 희생”의 그 귀한 아들 오면 주려고 고봉밥에 굴비를 굽고, 참기름에 김을 굽고, 나물무침도 수북하게 준비했다. 그러나 이번 설엔 온종일 기다려도 아들은 끝내 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쳐 벗어 놓은 흰 고무신 안에/ 자식 대신 가랑잎만 몇 개 들어앉았다.” 특히 명절날 자식들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 끝내 오지 않는 경우 시골 부모님들의 그 허탈함을 자식들이 알기는 할까? 「자연이 내게 준 첫 문장」은 박 시인이 9살 무렵 세상 사는 이치를 깨닫고 나름대로 자유도 만끽하면서 조금씩 철들어가는 유년을 회상한 작품이다.

“와! 아홉 살은 정말 좋은 나이야/ 엄마 아빠 사랑은 이제 동생한테 좀 나누어 주고/ 나는 이제 혼자서 해보는 게 많아졌거든,/ 발뒤꿈치 들고 “나 혼자 할 수 있어!”하는 것처럼//

이하 본문은 길어서 생략한다.

기억 속 고향집 창가에는/ 봄볕에 투명해진 실치 떼들이/ 은빛 자수 놓으며 몰려오고// 굽이굽이 담장 너머/ 보리밟기 맵찬 바람이 이겨낸 환희가/ 서해 해풍에 쏠려 파도로 일렁이는 청보리 커튼// 이웃집 경계를 지운 녹색 커튼 뒤로/ 엄마의 하얀 머릿수건은// 초록 바다 자맥질하는 외로운 부표 되어/ 밭고랑 사이 떴다가 잠기기를 반복하는 한 낮//... 키 큰 보리 이랑 속에서 엄마와 숨바꼭질할 때/ 사그락거리며 나를 감싸준 비밀한 녹색 커튼/ 그 아득한 오월의 바람이 오늘/ 청보리 품속에 숨겨주마고/ 보리피리 소리로 나를 부른다//

- 「청보리 커튼」 일부

박 시인이 회상하는 유년의 고향은 장면마다 행복한 꿈 꾸기의 현장이다. 마치 독자를 고향 현장에 초대한 것처럼 실감 나고 아름답게 보여주는 것은 박 시인이 시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는 반증이다. “기억 속 고향집 창가에는/ 투명해진 실치 떼들이/ 은빛 자수 놓으며 몰려오고” “파도로 일렁이는 청보리 커튼” “초록 바다 자맥질하는 외로운 부표“ ”사그락거리며 나를 감싸준 비밀한 녹색 커튼” “보리피리 소리로 나를 부른다”는 등의 표현은 한편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어린 날의 세상은/ 두 손에 쥐어질 듯 작았고/ 허공을 차고 오르는 그네 위에서/
나는 한 마리 파랑새가 되었다//... 그네가 솟구칠 때마다/ 반짝이는 수평선 너머 고깃배 떠돌던 곳/ 마음속에 엄마가 꽉 들어찬/ 욕심 없는 영혼은 날개마저 가벼웠으나//... 밭을 매던 엄마 흰 머릿수건 위로/ 녹두꽃 떨어지는 눈부신 정오/ 이른 아침/ 아버지 무명 바지 끝단마다/ 안개꽃처럼 피어나던 풀잎의 이슬들//... 자연이 주는 원초적 기쁨과/ 주체할 수 없이 주렁거리는 순결한/ 문장들로 둘러싸여 커가던 꼬맹이//...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날개를 달고/ 녹두밭 위를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그 시절 나의 파랑새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 「파랑새는 돌아오지 않는다」 일부

파랑새는 꿈과 희망의 상징이다. 어린 날 바닷가 산골 마을에서 그네를 타고 허공을 차오르면 “나는 한 마리 파랑새가 되었다/ 내 눈으로 내려다본 아늑한 세상”이다. “밭을 매던 엄마 흰 머릿수건” “이른 아침 아버지 무명 바지 끝단마다/ 안개꽃으로 피어나던 풀잎의 이슬” 등등 주체할 수 없이 아름답던 그 고향 섬인데 “파랑새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예민한 청각만이 알아듣는/ 툭, 풀썩!/ 첫 새벽, 감 떨어지는 소리에 꼬맹이 자박자박/ 찬 이슬에 닿으면 파르르 스러지던 새벽잠//... 풀잎마다 아슬아슬 매달린 보석들/ 그 투명한 거울 속에 아롱지던 일곱 살 내 눈동자/ 동쪽 하늘이 발갛게 트면/ 반짝이던 보석들은 하나둘 숨어버리고/ 아이는 가슴에 신비를 품은 채/ 다시 눈부신 새벽이 오기를 기다린다/ 자객이 담을 넘듯 감 떨어지는 그 새벽을//

- 「풀잎마다 맺힌 기억 속의 이슬」 일부

「풀잎마다 맺힌 기억 속의 이슬」은 첫새벽 예민한 청각으로 감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신비해하던 일곱 살 소녀의 기억을 그렸다. 박 시인이 꿈결처럼 회상하는 유년의 고향은 7살에서 9살 사이에 멈추어 있다.

할아버지 제삿날/ 새막 골 큰 집으로 가는 길목/... 밤길을 따라 흐르던 금싸라기별 동화 같던 그 길//... 낟가리 속에서 솔솔 새던 구수한 볏짚의 향기/... 달빛 아래 익어가던 시루떡/갓 쪄낸 하얀 쌀의 은근한 냄새가/코끝을 간지럽히며 유년의 허기를 달래 주고//... 아랫채 헛간 어둠 속에 쉬고 있던/ 묵묵한 농기구들까지도// 따스한 은빛으로 환하게 품어 안았지// 외양간의 누렁소 둔덕 같은 거대한 몸으로 앉아/
말없이 달만 올려다보고/ 잠든 꿀꿀이마저도 밝은 빛의 기운에 놀라/ 밤의 적막을 깨치고// 할아버지 먼 데서 제삿밥 드시러 오신다고/ 활짝 열어젖힌 대문 너머로 마당은 낮보다 환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할아버지 묘지 가는 길에/... 나는 아버지 손을 으스러지도록 잡고 돌아왔네/

- 「할아버지 제삿날」 일부

아버지 손잡고 “새막골 큰집으로 가는” 할아버지 제삿날은 ‘금싸리기 별 동화의 길’이다. “낱가리 속에서 솔솔 새던 구수한 볏집의 향기” “갓 쪄낸 하얀 쌀의 은근한 냄새” “아랫채 헛간 어둠 속의 묵묵한 농기구들” “외양간의 누렁소” “잠든 꿀꿀이” “할아버지 먼 데서 제삿밥 자시러 오신다고 활짝 열어젖힌 대문” 등이 이 작품의 배경이다. 「시간을 새긴 둥근 엉덩이」는 울타리 아래 구덩이 파고 똥거름 한 바가지 부어주면 주렁주렁 잘 자라는 애호박 이야기다.
「바람이 일군 목화밭」은 큰언니 시집갈 때 밤새워 솜이불 만들던 어머니를 그렸다.

괭이 끝으로 일구고 호미로 다독이며/
삽날 끝에 실어 나르는 당신만의 대지 예술//...
영감님의 일터는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전시장/...

- 「흙의 숨결」 일부

천직이라 농사의 달인이 된 영감님의 농심을 칭찬하는 작품이 「흙의 숨결」이다. 「기억 속의 동화」는 오빠가 매어 준 그네 이야기이다. 이하 바닷가 태안군의 아름다운 섬이 고향인 박 시인이 유년의 고향을 꿈결처럼 그린 작품들이 많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3] 인생 연륜과 사회적 관심의 확장

앞 장에서 살펴본 대로 박 시인의 주된 관심은 유년의 아름다운 고향 되새김과 행복한 꿈 꾸기였다. 여기서는 나이가 들면서 사회현상에 대한 관심의 확장 측면에서 살펴 본다.

(1)먼지 뽀얗게 앉은 서울의 거리/ 쓱, 쓱, 쓱, 리듬을 타는 손길 위로/ 앞코에 퉤퉤 침 한 번/ 옆구리에 퉤퉤 침 두 번/마른 헝겊이 지나간 자리 손등에 힘줄 솟는다// 반짝반짝, 반들반들/ 낡은 신사 구두에 날개가 돋는다// 그 소년이 자라서 신발공장 사장이 되었다더라//

(2)넝마주이 집개 질도 잘하더라/... 저보다 더 큰 때가 절은 망태기를 걸머메고/ 종이 쓰레기를 한가득 주워가던 새까만 소년이/ 80년대 제지공장 사장이 되었다더라//

(3)케끼, 아이스케끼! 두 개에 1원!/ 딸까닥, 딸까닥! 나무 게다를 끌고/ 나무통에 하드를 담아 팔던 어린 소년들/ 얼굴에 핀 흰 버짐 꽃은/ 콩나물죽으로 연명하는 흔적/... 세상의 모진 풍파는 소년을 강하고 슬기롭게 키워/ 나라에 효도하는 기업인이 되었다/

- 「1960년, 흑백 그림」 일부

「1960년, 흑백 그림」은 3장면이다. 새마을운동이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이전의 1960년대 세계 최빈국의 암울한 현실이다. 운명처럼 춥고 배고프고 가난하기만 했던 막막한 사회였다. 첫 번째는 구두닦이 소년, 두 번째는 넝마주이 소년, 세 번째는 아이스케키 팔던 소년 이야기이다. 60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은 최단기간에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 10대 경제대국, 문화강국, 제5대 군사강국 등 인류역사에 유례가 없는 일류 국가가 되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경의선 유리창,/ 입김이 하얗게 서린 너머로/ 눈물 고인 너의 눈동자와/ 간절한 나의 눈빛이 서로 부딪치면서/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떠나고,//... 나는 날카로운 이념의 절벽 아래서/ 통일이란 물레를 쉼없이 돌렸다//경의선 위에 흩뿌린 언약/ 녹 슬은 철길에 잡초가 무성할 때까지/ 그리움이 가슴을 쓸고 지날 적마다/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쓸쓸한 바람을 껴안는다//

-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일부

이 작품은 통일 문제에 대한 박 시인의 관심사를 나타낸 작품이다. 유년 시절 아득한 추억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한다는 의미이다. 경의선은 러일 전쟁 중 일제가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을 서둘러 1906년에 개통한 경성(서울)에서 신의주까지 499km 철도노선이다. 현재는 남북분단으로 인해 서울역에서 도라선 역까지의 광역 전철노선이다. 경의선을 탄 화자(박 시인)은 하얗게 입김이 서린 유리창 너머로 너의 눈동자(북)와 간절한 나의 눈빛(남)이 서로 부딪침을 느낀다. 우리는 끝내 이념의 벽을 깨지 못한 채 민족 분단이 고착화 되고 있다. 화자는 “통일이란 물레로 꽃필 날만 감아올리며”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소무의도 길목/ 짠 내 밴 언덕 위 조개껍데기 같은 집/ 바다 쪽으로 창을 내고/
그 여자는 파도를 베고 잠들었을 것이다//... 바닷가에 피어난 하얀 ‘갯메꽃’처럼//... 진주를 품은 조개처럼,/ 바다에 희망을 품었으리라// 왜 떠났을까/ 창가에 마른 장미 한 다발/ 거울에 꽂힌 앳된 얼굴 사진/ 그 옆의 남자는 누구였을까// 나는 믿는다/ 낡은 창틀 아래 그녀가 버려둔 꽃씨들이/ 사랑으로 다시 꽃피울 날이/ 저 멀리 수평선처럼 이미 와 있음을//

- 「빈집」 일부

이 빈집은 농촌의 빈집이 아니다. 인천시 “소무의도 길목/ 짠내 밴 언덕 위 조개껍데기 같은 집”이다. 이 빈집에 진주조개처럼 희망을 품고 바다 쪽으로 창을 내고 ‘그 여자’가 살았을 것이다. 지금은 그 여자가 떠난 폐가가 되었지만, 거울에 꽂혀 바랜 앳된 얼굴 사진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녀가 버려둔 꽃씨들이 다시 꽃피울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갖고…

꽃내음이 오월에 더욱 향기로운 까닭은/ 억울하게 떨어진 혼령들의 숨결//...
젊은 피들이 엉겨 붉은 금남로 아스팔트 위에/ 이팝나무 흰 꽃이 우수수 떨어지고/
너무 설워 살아남은 이들이 서로 얼싸안고/ 뼈를 꿰뚫고 날아드는 총탄 속에서도/
도청 앞 광장 거대한 분수대는/ 피를 씻어내는 눈물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도 불의에 맞서/ 스스로 빛이 된 젊은 영혼들의 눈부신 몸짓//

- 「오월에는」 일부

이 작품의 5월은 눈부시고 낭만적인 계절이 아니다., 박 시인이 5.18 민주항쟁을 추념하는 5월이다. “꽃 내음이 5월에 더 진한 것은/ 억울한 혼령들의 숨결 때문”이다. “젊은 피들이 엉겨붙은 금남로 아스팔트 위에/ 이팝나무 흰 꽃이 우수수 지던 날” “살아남은 이들의 녹색 눈물로 번져 나는 5월”이다. 날아가는 총탄 속에서도 “불의에 맞서/ 스스로 빛이 된/ 젊은 영혼들의 눈부신 몸짓“이다.

[4] 노년의 인생 반추와 순수 서정

나이 들수록 젊은 날의 추억이 새롭고, 지는 해처럼 남은 인생이 아쉽고 너무도 소중하다. 늙어가는 것은 시드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익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박 시인의 다양한 작품 중에서 노년의 인생을 반추하거나 서정성 짙은 몇 작품을 살펴본다.

그녀는 오늘도/ 기억을 톡톡 두드린다/ 노화된 기억이/ 실타래에 걸려 헝클어졌을 땐/ 세월을 빗질하면 곱게 펴질 수 있을까// 축축이 젖어 엉킨 머리를/ 캄캄한 기억 속에 담군다// 어두웠던 기억이 화선지 위에/ 선명하게 떠오르면/ 지나간 시절이 악보처럼 가슴에 새겨진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을 빗질해야만/ 해마 속에 숨은 구부러진 시간이/ 어둠 속에서 곧게 웃는다는 그녀는// 억만 개의 시계 초침 소리가 퇴적된/ 층층의 방들을 노크하듯/ 톡톡톡!/ 기억의 켜를 두드려 아득한 것을 찾는다//

- 「기억을 헹구는 그녀」 일부

노년의 그녀는 기억을 ‘톡톡’ 두드린다. 치매 직전의 노화되고 헝클어진 기억이라도 빗질을 하면 곱게 펴질까? “축축히 젖어 엉킨 머리를/ 캄캄한 기억 속에 담근다.” 어두웠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면 “악보처럼 가슴에 새긴다” 억만 개의 초침 소리가 퇴적된 인생의 충충 방을 ‘톡톡톡’ 노크하듯 두드려 아득한 것을 찾는다.

누에는 푸른 뽕잎을 먹고/ 제 몸으로 흰옷을 지어 입는다// 흰옷은 이내 집이 되고/
지혜로운 이는 그 집을 풀어 비단을 짠다// 나도 그렇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나의 무기는 짧으나마 정직한 글 몇 줄// 가슴이 터지도록 목이 쉬도록 호소하는/ 끈적한 글줄로 나를 하얗게 감아/ 스스로 누에고치가 되어가는 일이다//... 거짓과 모방을 일삼고/ 세상을 까맣게 물들이는 자들에게/ 하늘의 벼락처럼 힘차게 내리꽂히는/ 날카로운 펜촉이 되리라//

- 「누에의 집」 일부

누에는 푸른 뽕잎만 먹고, 다섯 잠을 자고, 입으로 비단실을 뿜어 스스로 집을 짓는다. 지혜로운 이는 누에고치에서 비단실을 뽑고 그 실로 비단을 짠다. “나도 그렇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짧으나마 정직한 글 몇 줄”이다. “거짓과 모방을 일삼고/ 세상을 까맣게 물들이는 자들에게/ 하늘의 벼락처럼 힘차게 내리꽂히는/ 날카로운 펜촉”이 되는 일이다.

새벽 한강에 적셔낸 순백의 무명옷/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 조선의 자태// 고요한 기품 숨 막히는 우아함/ 그대, 시간을 초월한 고결한 영혼이여//... 유연한 곡선, 허공을 가르는 정적의 춤,/ 고독한 선비의 묵은 회한을 씻어// 모든 욕망을 재로 만든 승자/ 오직 결백한 침묵만이 맴도는 길//... 백로여, 고고한 이름이여! 하늘과 땅의/ 캔버스를 가르며 하나의 빛 순백의 서사로 비상하라//

- 「백로」 일부

이것은 백로에 대한 찬가이다. 이번 시집에 있는 자연 교감의 서정시들 중 백로 그 자체를 소재로 한 순수 서정시이다. “순백의 무명옷, 조선의 자태” “고요한 기품/ 숨 막히는 우아함” “고결한 영혼” “유연한 곡선” “허공을 가르는 정적의 춤” “순백의 서사” 등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되고 있다. 백로 그 자체보다 비유로서 백로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의 발로이다.

내가 호수라면 참 좋겠어요/ 단풍잎 하나 내려와 내 가슴에 닿으면/ 동동 떠가는 잎새의 노래를 듣고 싶어요/ 물길 아래 비친 구름과 속삭이며/ 낮은 목소리로 주님을 부를래요// 어둠이 밀려와도 두렵지 않아요/ 낮보다 환한 등불이 내게 계시니/ 나는 바람보다 가볍게 물 위를 거닐며/토닥토닥 들려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래요// 주님의 품은 나의 호수/ 나는 사랑받는 잎새/ 곱다란 노을에 잠겨 황홀한 이불을 덮고/물새도 쉬어가는 그 넉넉한 품 안에서/ 나는 밤새도록 당신의 사랑을 유영합니다//

- 「주님은 나의 호수」 전문

궁극적으로 박 시인이 찾는 인생의 귀의처는 ‘기독교 사랑 주님의 품’인 듯 하다. “주님의 품은 나의 호수”로서 존경과 애정과 그리움의 복합체다. “낮은 목소리로 주님을 부르며” “토닥토닥 들려주는 주님의 음성 들으며” “주님의 넉넉한 품에서” 밤새도록 당신의 사랑을 백조가 헤엄치듯 유영하며 느끼겠다는 신앙고백이다.

[5] 맺는말

지금까지 박상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바람의 노래』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았다. 핵심만 요약하면…

첫째, 다양한 사회 활동을 통해, 시인이며 사회인으로서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발상과 제목 붙이기, 시어 선택, 시를 이끌어가는 힘이 우수하다. 비교적 긴 시들임에도 독자의 공감을 주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셋째, 박 시인이 고향인 충남 태안에 대한 유년의 추억들을 장면 장면 작품화하면서 마치 본인 자신이 꿈꾸듯 행복감을 느끼는 듯하다. 이른 바 ‘카타르시스’ 차원의 행복한 글쓰기이다.

넷째, 개인적인 유년의 고향 추억에서 벗어나 세상사와 사회적 관심이 확장된 작품들은 비교적 건전하고 상식적인 바탕에 연유하고 있어 바람직하다.
다섯째, 노년의 인생 반추와 순수 서정의 작품들은 긍정적인 인생관과 물아일체의 자연 교감을 나타내고 있다.

여섯째, 시의 본령은 짧고 응축된 비유가 주축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성과 내용을 자세히 피력하다 보니 작품이 수필식으로 길어지는 경향이 많다. 비유와 상징으로 ‘그림처럼 보여주는 짧은 시’가 바람직하다. 발상이나 어휘, 문장력이 우수하므로 수필이나 소설, 산문 창작도 권한다. 박 시인의 행복한 노년과 더 나은 문학적 성취가 있기를 기원하며, 평설을 마친다.

[감수 지율 이정록 교수]

추천평

순수의 시절, 영원히 사라진 paradise

박상희 시인의 「파랑새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어린 시절의 순수했던 영혼에 대한 깊은 회상을 담아낸 아름다운 서정시입니다. 시인은 파랑새라는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잃어버린 낙원 즉 어린 시절의 풍경과 감성을 섬세하게 복원해내고 있습니다.

이 시의 가장 큰 매력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생생하고 구체적인 묘사에 있습니다. 시인은 기억 속의 장면들을 눈에 보이듯 그려내며 독자를 그 시절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녹두꽃 활짝 핀 세상 흰 머릿수건 위로 떨어지는 꽃잎 안개꽃처럼 피어나던 풀잎의 이슬 등은 빛과 색채가 살아있는 이미지들입니다. 특히 푸른 하늘 푸른 물감 등 푸른색 계열의 어휘는 시 전체에 맑고 청초한 분위기를 부여하며 순수함의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또한 밀짚모자를 쓰고 논으로 가시는 아버지의 모습 풀을 메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녹아있는 따뜻한 풍경이며 작고 소소한 존재들에게까지 시선을 보내는 시인의 따뜻한 시선이 돋보입니다.

시에서 파랑새는 단순한 새가 아닌 꿈과 자유 그리고 순수한 영혼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날개가 한없이 가벼웠나보다 나는 한 마리 파랑새가 되었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어린 시절의 나는 세상의 제약과 욕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존재였습니다. 엄마의 사랑 안에서 욕심을 몰랐기에 그 영혼은 가볍고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시의 제목이자 마지막 행인 그 시절 나의 파랑새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 시의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성장은 필연적이기에 그때의 순수함과 아름다움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쓸쓸한 자각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동시에 잃어버린 것에 대한 깊은 아련함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유려한 문체가 사용되었으며 짧고 긴 호흡이 조화를 이루며 읽는 이의 마음을 잔잔하게 울리고 있습니다. 동아줄을 꼭 움켜쥔 만큼만 작은 두 손안으로 들어왔다는 표현은 세상을 전부 가지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순진함을 절묘하게 표현한 명구라 할 수 있습니다.

「파랑새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잃어버린 고향과 어린 시절 그리고 순수한 자아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입니다. 시인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아름다운 언어로 빚어내어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파랑새를 떠올리게 합니다. 비록 그 시절은 돌아오지 않지만 그 기억과 감성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가슴이 따뜻해지면서도 어딘가 먹먹해지는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 조육현 (시인)
박상희 시인은 참으로 순수한 시인이다. 그녀의 시는 추억 그 자체다. 애써 슬픔을 말하지도 않고, 고상한 언어로 자신을 치장하지도 않는다. 다만 시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조용히 만나고, 그 시간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려낸다.

자연이 안겨준 꼬맹이의 첫 문장에 눈물 같은 이슬을 매달며 아름다운 감성의 나무로 자라던 아이는, 어느새 동백섬 끝자락에 열여섯 단발머리 촌뜨기 계집아이의 모습으로 서 있다. 60년 전 흑백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아이는 오늘 백발의 노인이 되어 아득한 시간의 끝을 말아 쥔 채 다시 동백섬 끝까지 맨발로 걸어간다. 발바닥을 핥는 모래의 감촉이 잊고 있던 단발머리 시절을 불러내고, 기억은 현재와 과거를 잇는 따뜻한 다리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날개를 달고 녹두밭 위를 날아오르던 그 시절의 파랑새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박상희 시인의 시에서는 그 파랑새의 날갯짓이 여전히 살아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리움과 순수를 고요하게 품어내는 것이 그녀의 시가 지닌 가장 큰 힘이다.

박상희 시의 세계는 지나간 시간을 애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삶을 오래 견뎌온 사람에게만 건넬 수 있는 따뜻한 위로와 깊은 성찰이 시마다 스며 있다. 독자는 그녀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유년을 만나고, 잊고 지냈던 추억과 조용히 마주하게 된다.

이 시집은 한 사람의 삶을 기록한 기억의 풍경이자,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순수의 시간을 다시 불러오는 아름다운 여정이다. 박상희 시인이 들려주는 맑고 진실한 목 - 김준한 (시인)
박상희의 시에는 숨어 있는 보석 같은 시절의 시각과 청각을 되찾아주는 신비한 힘이 있다. 볼 수 없던 풍경을 보게 하고, 들을 수 없던 소리를 듣게 함으로써, 메말랐던 동심을 신비롭게 불러내는 것이다.

그리운 세계를 아이의 눈을 빌려 보여주고, 외롭지 않도록 자연을 데려와 친구 삼아주는 시인. 자연과 하나 되어 숨 쉬는 그 섬세한 몸짓들이 문장마다 가득히 넘쳐흐른다. - 박종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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