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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부 3부 작가의 말 옮긴이의 말 |
Bernhard Sch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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裵琇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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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계단을 내려온다. 그녀의 오른발은 계단의 가장 아래 칸에 닿았고 왼발은 아직 위쪽에 있지만, 다음 걸음을 막 떼기 직전이다. 여자는 벌거벗었다. 그녀의 몸은 핏기 없이 창백하고 음부의 털과 머리카락은 금발이며, 불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광채로 반짝인다. 창백하고, 금발인 나체의 여인은, 회녹색 배경 속으로 스며들며 사라지는 계단과 벽을 등진 채, 무게감이 없이 가볍게 부유하는 몸짓으로 관람자를 향하고 있다. 반면에 그녀의 긴 다리와 둥글고 풍만한 엉덩이, 탱탱한 젖가슴에서는 관능적인 중량이 느껴진다. --- p.10
“젊다는 것은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느낌이에요. 틀어지고 어긋나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놓쳐버린 모든 것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잘못이. 더 이상 그런 감정이 없다면, 한 번 일어나버린 일과 한 번 경험한 일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면, 그러면 우리는 늙은 거예요." --- p.37 두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오지 않자, 나는 늦을 수 있는 이유를 하나 생각해냈다. 세 시간이 지난 뒤에는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냈고, 네 시간이 지난 뒤에 또 하나를 더 생각해냈다. 그렇게 나는 밤새도록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하나하나 만들어내면서, 그녀에게 혹 무슨 일이 생겼을까봐 두려운 마음을 달래려고 애썼다. 그 두려움으로 결정적인 다른 두려움을 잊으려 한 것이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오고 싶지 않기 때문에. --- p.93 여전히 나는 그녀가 화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늘 그렇듯이, 몇 분 만에. 하지만 밤은 깜깜하지 않았다. 달빛이 반사된 나뭇잎들은 은색의 광채를 발했으며 바다 표면은 무수한 별들로 덮인 듯 반짝거렸다. 달빛이 이레네의 얼굴에 가득 쏟아지자 자글자글한 주름, 탄력 잃은 살갗, 피곤하게 늘어진 얼굴선이 무자비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났고, 내 가슴은 연민으로 에이듯 아팠다. 그녀를 향한, 그리고 나 자신을 향한 연민. 우리는 늙었다. --- p.133 간혹 거울에 비친 내 나체를 보면 내 몸인 그것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 몸이 겪어온 일들, 그 몸이 안간힘쓰며 헤쳐온 일들, 그 몸이 아등바등 견뎌낸 일들! 내 감정은 자기연민은 아니다. 나는 자기연민을 경멸한다. 나를 향한 측은함이 아니라, 내 몸을 향한 측은함인 것이다. 아니면 시간의 허망함 그 자체를 향한 것이거나. 지금 내 감정은 이레네의 몸을 향한 측은함이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 허약하고, 애처로운 몸으로, 내 목에 두 팔을 감을 때 보여주던 한없는 신뢰의 내맡김, 그 몸짓은 내 마음을 연민으로 떨리게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화가 나는 것은, 그녀가 나에게 더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 p.159~160 “그림을 아트갤러리에 대여해준 것도 그를 이리로 유인하기 위해서였어?”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는데, 그것은 대답을 회피하면서, 긍정과 동시에 부정을 나타내는 몸짓이었다. 어쩌면 내가 사용한 ‘유인’이라는 단어가 기분 나쁘다는 표시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슈빈트도 오는 거야?” “그러기를 바라는 거지.” “그러면 아트갤러리에 그림을 대여할 때 내가 올 거라는 생각도 했어?” “너를 이곳으로 유인할 일이 뭐가 있겠어? 나는 페터와 카를을 한 번 만나보려고 한 거야. 네 생각은 하지 않았어.” 나도 그 문제에 내가 아무 권한이 없음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상처를 받았다. 험한 길을 운전하는 중에도 내 감정을 눈치챈 그녀는 한 손을 내 팔에 올렸다. --- p.172 이레네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내 등을 쓰다듬었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넌 만사를 다 훌륭하게 하려고만 하는구나.” 그녀는 상냥하면서도 슬프게, 다시 한 번 더 반복했다. “순진한 바보 같으니.”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도대체 왜 울어야 하는지,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에 그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p.291~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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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최신 장편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지 베스트셀러 · 소설가 배수아 번역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책 읽어주는 남자》의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신작 장편소설 《계단 위의 여자》가 소설가 배수아의 번역으로 우리 독자를 찾아왔다. 테러리스트와 그 주변인들의 균열된 삶을 통해 또 하나의 탁월한 도덕적 미로를 제시한 《주말》(2008)에 이어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장편에서, 그는 인간의 가장 복잡하고 내밀한 미로인 사랑과 죽음의 문제에 접근한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20대 초반에 사법 고시를 통과하고 탄탄한 법률회사의 시니어로 성공 가도를 걸어온 남자. 서로를 지지하되 짐은 되지 않았던 결혼생활, 잔정은 부족했을지 몰라도 그 덕분에 다들 성공해 해외에서 자리 잡은 아이들. 안정적인 반생을 마치고 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회사의 대표 변호사이고 지금도 굵직한 기업합병 건으로 시드니에 출장을 와 있는 상태다. 그런 그가 평생 처음, 아니 두 번째로 일탈 행위를 하려 한다. 그 그림 때문이다. 40년간 사라졌다 바로 지금, 우연처럼 그 앞에 다시 나타난 그림. 40년 전 햇병아리 변호사였던 그는 그림과 관련된 한 소송에 휘말렸었다. 그림을 그린 남자와 그림을 주문한 남자 사이의 기이하고 끈질긴 싸움. 그리고 기묘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림 속의 여인. 남자는 그림을 본 순간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를 위해 의뢰인을 배신했고 그림을 훔쳤으며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던 자신의 성공마저 버리려 했다.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자신을 그린 그림과 함께 사라져버리기 전까지는. 사라졌던 그림이 다시 나타난 지금, 그는 그 그림 너머에 그녀가 있음을 확신한다. 이곳에 그녀가 있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만나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 돈, 명예, 투쟁과 혁명. 그녀는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다고 생각한 안정적인 삶 외의 것들을 좇으며 살았고, 다시 돌아온 지금도 무언가 다른 것을 찾고 있다. 그 그림이 조명탄이라도 된 듯 하나둘 모여든 그녀의 남자들, 그들과 그녀가 벌이는 줄다리기를 다시 구경꾼이 되어 바라만 보아야 하는 남자. 남자는 생각한다. 그들에게 그녀는 무엇이었나, 내 사랑에게 나는 무엇이었나. 평생 불평 한 마디 없다가 어느 날 교통사고로 죽어버린 아내, 인정할 수 없었던 아내의 알코올의존증, 미래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빼앗긴 아이들의 여름방학과 집 안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자신이 다시 버린 그 유기견이 그의 가족에게 줄 수 있었던 따듯한 어떤 것. 스릴러처럼 빠르게 전개되는 도입부를 지나 후반부에 이르면, 소설은 서로에 대해 진실로 알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통해 사랑하고 원하고,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애잔함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수수께끼로 남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그려나간다. 여자는 말한다, 젊다는 건 우리가 망쳐버린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느낌이라고. 그리고 남자는 말한다, 자신이 젊은이들을 부러워하는 건 그들에게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과거가 쉽게 정의될 수 있을 만큼 짧기 때문이라고. 더 이상 무언가를 되돌릴 수도 없고 흘러간 시간들은 그 형체마저 희미해져 갈 때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흔히 이야기가 끝나는 지점, 주인공들의 노년에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는 그렇게 인생을 이야기한다. 남자의 삶이 그랬듯이 담담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그러나 여자의 삶처럼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서. 서평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감탄스러운 문장들로 쓰인 슐링크다운 작품. 영리하게 직조된 플롯과 스릴러를 연상시키는 긴장감, 하지만 도덕적 여운 또한 여전하다. _아우크스부르거 알게마이네 흠집 하나 없는 진정한 작품. 슐링크는 진정 독일어의 거장이다. _디 벨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