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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에의 열망 담은 박제가의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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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서문 1: 서명응 서문 2: 박지원 서문 3: 박제가 자서(自序) 북학의 내편(北學議 內編) 수레[車] / 배[船] / 성(城) / 벽돌[?] / 수고(水庫) 기와[瓦] / 자기[#] / 삿자리[] / 주택[宮室] 창호(窓戶) / 뜰[階?] / 도로(道路) / 교량(橋梁) 목축[畜牧] / 소[牛] / 말[馬] / 나귀[驢] / 안장[鞍] 구유통[槽] / 시장과 우물[市井] / 장사[商賈] / 은(銀) 화폐[錢] / 철(鐵) / 목재[材木] / 여자의 의복[女服] 연극[場戱] / 중국어[漢語] / 통역[譯] / 약(藥) 장(醬) / 인장[印] / 담요[氈] / 저보(邸報) 종이[紙]/ 활[弓] / 총과 화살[銃矢] / 자[尺] 문방구[文房之具] / 골동품과 서화[古董書畵] 북학의 외편(北學議 外編) 밭[田] / 거름[糞] / 뽕과 과일[桑菓] 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론[農蠶總論] / 농기도서(農器圖序) 용미차(龍尾車)에 관한 논의[附李喜經龍尾車說] 과거론(科擧論)Ⅰ / 과거론(科擧論)Ⅱ 정유년 증광시에서 제출한 시사책[附丁酉增廣試士策] 관직과 녹봉[官論 祿制] / 재부론(財富論)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通江南浙江商舶議] 풍수설과 장지[葬論] / 군사를 논한다[兵論] 존주론(尊周論) / 북학변(北學辨)Ⅰ / 북학변(北學辨)Ⅱ 북학변(北學辨)Ⅲ /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丙午所懷] 진소본 북학의(進疏本 北學議) 북학의를 임금님께 올리며[應旨進北學議疏] 수레[車] 9칙(則) / 밭[田] / 거름[糞] 5칙(則) / 뽕[桑] 농기구[農器] 6칙(則) / 철(鐵) / 볍씨[稻種] 곡식의 이름[穀名] / 지리(地利) 2칙(則) / 논[水田] 수리(水利) / 늙은 농부[老農] / 구전(區田) / 모내기[注秧] 감자 심기[種藷] / 말리(末利) / 유생의 도태[汰儒] 둔전의 비용[屯田之費] / 하천의 준설[濬河] 2칙(則) 창고 쌓기[築倉] 3칙(則) / 배[船] / 노하운선기(潞河運船記) ‘오행(五行)을 잃고 버렸다’는 데 대한 생각[五行汨陳之義] 번지와 허행[樊遲許行] /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방법[祈天永命] 농업과 잠업에 대한 총론[農蠶總論] / 재부론(財富論) 강남 절강 상선과 통상하는 문제에 대한 논의[通江南浙江商舶議] 2칙(則) 존주론(尊周論) 열린 사회를 위한 개혁 개방론, 박제가의 북학의 박제가 연보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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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가난한 백성은 모두가 아침저녁 먹을거리조차 없는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는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자가 몇 집 되지 않는다. 이른바 어려울 때를 대비해 준비한 곡물이란 것도 옥수수 몇 자루나 마늘 수십 개를 그을음으로 검게 탄 초가집 벽에 달랑 달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시골의 농부들은 한 해에 무명옷 한 벌도 얻어 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태어난 이래 침구가 무엇인지 구경조차 못하고, 이불 대신 멍석을 깔고 그 곳에서 아들과 손자를 기른다. 아이들은 10세 전후가 될 때까지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이 벌거숭이로 다닌다. 그러니 이 천지 사이에 가죽신이니 보선이니 하는 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한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러하다. --- pp. 140 ~ 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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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이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 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에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심한 경우에는 마치로 상대를 치고,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고 싸우며, 문에서 횡액을 당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욕을 얻어먹기도 하며, 변소에서 구걸을 요구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루 안에 치르는 과거를 보게 되면 머리털이 허옇게 세어지고, 심지어는 남을 살상(殺傷)하는 일이나 압사(壓死)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 p. 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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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1천 호(戶)가 사는 마을이라도 반듯하여 살 만한 집을 한 채도 찾아볼 수가 없다. 평평하지 않은 언덕에다가 다듬지도 않은 나무를 세우고 새끼줄로 묶어 기둥과 들보로 삼는다. 그것이 기울든 똑바르든 불문하고 흙손을 사용하지도 않고 손으로 진흙을 바른다. 문에 틈이라도 생기면 개가죽을 베어 못으로 박아 놓으니 그 못에 옷이 찢기기 일쑤다. 혹은 짚을 머리 땋듯이 땋아서 그 틈에 붙이기도 한다. 구들장은 울퉁불퉁하여 앉고 누우려면 늘 몸이 기운다. 불을 때면 연기가 방안에 가득하여 숨이 꽉 막힐 지경이다. 문창에 종이가 찢어지면 헤진 보선으로 막아버린다.
--- p. 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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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의 현실에 대한 뼈아픈 자각과 통찰의 저작
박제가는 조선이라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해부하고 진단하여 그 환부를 도려내려는 근본적 개혁을 꾀한 사상가이다. 조선 왕조의 사상적 기저인 주자성리학이라는 틀을 완전하게 폐기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사회 발전의 틀을 새롭게 정립하려 했던 그는 당시로서는 매우 불순한 사상가였다. 『북학의』** 『북학의』는 이름 그대로 풀이하자면 북쪽을 배우자는 논의다. 『맹자』 「등문공상」의 ?나는 중화(中華)의 문화로 오랑캐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지만 중화가 오랑캐에게 변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진량(陳亮)은 초(楚)나라 출신이다.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道)를 좋아하여 북쪽의 중국으로 가서 공부하였다. 그 결과 북방의 학자들로서 진량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吾聞用夏變夷者, 未聞變於夷者也. 陳良, 楚産也, 悅周公仲尼之道, 北學於中國, 北方之學者, 未能或之先也.)는 글에서 나온 말이다.
역시 18세기 후반 위기에 직면한 조선 왕조의 만성적 질병을 치유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책으로, 도덕적 우위의 학문이 권위를 행사하던 시대 풍조에 반하여 물질적 풍족을 적극적 추구의 대상으로 전환한, 당시로서는 다분히 이단적인 책이었다. 『북학의』의 내용은 폭이 매우 넓다. 상업과 유통에 대한 중시, 수레와 배?백돌 이용, 도로망의 확충, 기술과 기계의 도입 강조, 효율성의 제고를 중시한 정책, 도량형의 표준화, 사회의 개방화 등등이 그것이다. 박제가는, 국가적으로는 부국강병의 방안을 제시하였고, 개인의 생활로는 가난의 탈피와 문명의 지향을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강력한 개혁 개방론을 펼쳤는데, 이는 현실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외국을 모델 삼아 이루고자 했던 ?내부로부터 개혁?의 열망이었다. 『북학의』를 꿰뚫고 있는 사상적 특징은 기존 사회에 완강하게 고착된 폐쇄성?봉건성 해부와 파괴라 할 수 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지배층인 유자(儒者)의 도태까지 주장하는 혁명적 발언을 하는 등 지식인들의 인식 전환을 요구하는 전투적 주장을 쏟아내었다. 미봉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했던 것이다. 개혁 군주 정조(正祖)는 이러한 박제가의 울타리가 되어주었으나, 보수적 유자들은 서얼 출신의 탁월한 개혁 사상가 박제가를 눈엣가시처럼 여겨 호시탐탐 제거의 기회를 노렸다. 결국 정조가 급서(急逝)하자 박제가는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어 사지로 전락하는 운명에 처했고, 뒤이은 19세기는 정국의 경색과 주체적 개혁의 실종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박제가의 강력한 개방 요구와는 반대로 쇄국의 방향으로 나아갔던 조선은 외세의 침략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누락 없는 원문 반영, 충실한 번역으로 만들어낸 정본 『북학의』 현재 『북학의』는 총 세 부분(내편, 외편, 진소본)**으로** 박제가는 1778년 9월, 연경에서 돌아온 지 3개월 만에 『북학의』를 일차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때 내편과 외편이 모두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박제가는 자서(自序)에서 내편?외편 구분을 두지 않았는데, 3년 뒤 씌어진 박지원과 서명응의 서문에는 내편?외편이 구분이 되어 있다. 1781년(정조 5)에 쓴 「시학론」(詩學論)을 외편에 편입시킨 것도 외편이 나중에 편집된 책임을 입증하는 증거다. 이후 1798년 정조가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綸音)을 반포하자 박제가는 기왕에 쓴 『북학의』에서 농업을 다룬 내용을 추리고 수정?증보하여 상소문과 함께 바쳤는데 이것이 ?진소본 북학의?(進疏本 北學議)이다. 구성되어 전하고 있다. 내편이 중국 여행을 통해서 확인한 문명세계에 대한 보고가 주축인 반면, 외편은 『북학의』 이론을 설명하는 논설이 주축으로, 심화된 사상을 기반으로 직설적인 개혁 주장을 펼치고 있다. 정조에게 바친 ?진소본 북학의?는 앞서 지은 『북학의』 가운데서 농업에 관한 내용을 간추리고 일부 글을 추가하여 상소문과 함께 바친 것이다. 이 ?진소본?에는 경세문자의 백미라 일컬을 만큼 빼어난 산문 「병오년 정월에 올린 소회」가 실려 있다. 남아 있는 필사본들과 기출간 번역본들의 현황은 아래와 같다. 필사본 : 『북학의』는 조선시대에는 간행되지 않은 채 필사본으로 전해져 읽혔다. 필사본으로서 가장 신뢰할 만한 텍스트는 통문관 주인 이겸로(李謙老) 씨 소장본인데, 이 책은 내편과 외편 2책으로서 저자 친필고본(親筆藁本)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이 귀중한 책은 그러나 현재 그 종적이 묘연한 상태여서 접할 수가 없다. 그 외의 필사본들로는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북학의』 내외편과 국사편찬위원회 간행본 등이 있는데, 모두 이겸로 씨 소장의 친필고본을 저본으로 필사한 것들이다. 이외에도 접근이 용이한 자료로 여강출판사와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한 필사본이 있고, 국립도서관을 비롯한 몇 곳의 도서관에 『북학의』가 소장되어 있다. 기출간 번역본 : 이미 출간된 『북학의』 번역본 중에서 학술적으로 검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는 2종이 있다. 그 하나는 북한의 학자 홍희유, 강석준에 의하여 1955년 평양의 국립출판사에서 간행된 책이다. 이 번역은 전반적으로 오역이 적고 문장이 매끄러우나, 내편을 위주로 외편의 주요 내용만을 번역한 것이어서 『북학의』의 전모를 볼 수 없다. 다른 하나는 남한에서 1971년에 이익성(李翼成)에 의하여 을유문화사에서 간행된 『북학의』이다. 처음으로 전역이 이루어진 이 번역본이 종래에는 가장 널리 이용되었으나, 오역이 적지 않고 외편과 진소본 사이의 내용 차이를 구별하여 번역하지 않았으며, 번역 내용도 학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안대회 역 『북학의』 : 이번에 출간된 안대회 번역본은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필사본을 저본으로 하고 여러 영인본을 모두 대조?교감하여 원본의 모습을 복원함으로써 가장 많은 내용을 빠짐없이 수록한 정본이라 할 수 있다. 번역 측면에서도 기출간본들 가운데 가장 충실한 책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