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뭐 좀 먹자. 어차피 먹자고 하는 얘기잖아."
호기의 말에 친구들은 주머니를 뒤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탁자 위에 털어놓았다. 대화를 주고받느라 주문을 깜박 잊지 않았는가. 버거킹은 고객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버거킹의 고객일 수 없었다. 그리 많지 않은 돈이었음에도 중만은 바삭하게 튀겨진 프렌치 프라이를 쟁반 가득 담아왔다. 콜라는 세 컵밖에 살 수 없었지만 리필이라는 게 있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감자밖에 없대." 친구들은 중만의 말에 게의치 않았다. 프렌치 프라이를 오독오독 씹으며 친구들이 기다린 것은 찰리의 다음 말이었다. 찰리의 계획은 멈출 줄 몰랐다. "그러니까 톨게이트 있잖아. 거기 하루에 돈이 얼마나 모이는 줄 알아? 백 프로 현금으로." "만만치 않겠지. 부산 가는 데 승용이 얼마냐?" "하지만 거기는 좀 위험해. 아무래도 부담이 되지." "위험을 떠나서 일단 쪽수가 많잖아. 가만있어 보자. 톨게이트 구멍이 몇 개지? 네 명으로는 무릴걸." 친구들은 저마다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찰리의 계획은 그러한 친구들의 덧붙임을 통해 다시 예전처럼 탄탄해지고 있었다. 잠시나마 친구들이 잊고 있었던 버거킹 아가씨가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저...... 영업 열시까집니다." 그때였다. 친구들은 알아챘다. 그 아가씨의 목소리는 상냥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보다 되묻는 유진의 목소리가 더 상냥했다는 것을. 그것은 신호였던 것이다. "아가씨, 여기 하루 매출이 얼마나 돼요?" 순간 중만은 탁자 아래 놓여 있던 두툼한 볼링 선수용 가방 두 개를 꺼내 하나를 찰리에게 그리고 다른 하나를 호기에게 던졌다. 재빨리 가방을 받아든 찰리는 주방으로 향했고 호기는 출입문으로 향했다. "야 셔터 내려!" 그 말은 누가 했을까. 찰리는 의아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끝으로 찰리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도 괜찮을 거야." 버거킹의 붉은빛이 꺼진 것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 돌아서는 호기의 기분은 정말이지 언짢았지만 호기에게도 물론 해야 할 일은 있었다. --- pp. 203∼204 |
|
1974년 생 동갑내기인 찰리, 호기, 유진, 중만은 서른 살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조차 갖지 못한 이들이다. 서울 정착에 운명을 건 부모 세대로부터 태어난 이 70년대 생은 도시적 인간이다. '표면에서 미끄러지며 서로 만나고, 부딪치고, 대화하고,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찰리의 아버지의 고향은 서울이다. 찰리 할아버지 역시 서울의 이문동을 엠원 소총 하나로 지켜내었던 서울 본토박이다. 반면 찰리의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서울에 정착하지 못하고 지방으로 전전해야 했다. 이들의 서울 집은 '밝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지하방. 유치원 때 찰리는 '굴속에 들어 있는 식구들을 그린 그림' 때문에 엄마를 울려야 했다. 오로지 20년간 찰리 식구들의 최대 목표는 집 장만이었고, 결국 전쟁도 앗아갈 수 없었던 그 집을 50여 년 만에 되살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의 소유였고 어찌 된 영문인지 '종이 한 장의 증명서' 때문에 찰리 아버지의 20년의 꿈은 사라져 버린다. 찰리의 '계획'은 그런 이유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유진의 아버지는 유진 어머니를 '서울에 직장을 잡았다'는 이유로 꼬셔서 상경하였다. 유진 아버지가 서울에 와서 익힌 기술은 '커피를 타는 것'. 유진 다방이 유진 카페가 되고, 다시 유진 호프가 되는 동안, 유진 아버지가 동거한 여자만도 네 명. 유진은 유진 다방을 거쳐간 '누나'들과 '동거'하면서 자연스레 여자를 알게 된다. 한편, 유진은 고교 시절부터 써온 자살 노트를 갖고 있다. 무려 420여 가지가 되는 자살 방법, 전화번호부 분량의 유서, 여섯 벌의 수의를 갖고 있다. 왜 죽으려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속았다는 것. 이미 끝나버린 그 일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최소한 유진에게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머리가 굵어진 유진은 세상마저 자신을 자꾸만 속이려 한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진은 수많은 자살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호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철없는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다. 호기의 어머니는 사생아를 낳고 재혼하는데, 남편에게 계속 폭행을 당한다. 호기는 지금의 아버지를 '잠깐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낳은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로 여기며 자란다. 어느 날 이 '잠깐 아버지'는 호기의 기도처럼 정말로 죽게 된다. 중만은 현숙과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귀었다. 무려 16년간의 열애 끝에 중만은 차였다. 중만은 아버지와 새엄마와 함께 유통 기한이 지난 통조림의 기한 표시를 새로 써넣는 방식으로 돈을 모았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죽고 새엄마의 재산마저 큰아버지에게 빼앗긴 후, 중만은 빈털터리가 되고 현숙에게 차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중학교 시절부터 사귀게 된 친구 사이였다. 처음에는 찰리가 계획을 말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호기 그리고 유진과 중만이 그 계획에 참가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면서,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진다. '계획'을 위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세 친구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고, 찰리는 한달 하고 10여 일간 계획을 세운다. 다시 한두 달의 사전 준비 끝에 이들은 강원도의 50번 도로 길 옆에 있는 '새서울 휴게소'를 털게 된다. 찰리의 철저한 계획과 친구들의 빈틈없는 일처리 끝에 모든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이들은 50번 도로를 되짚어 모두의 고향인 서울로 향한다. 이들에게는 두 개의 결말이 남아 있다. 첫 번째 상황 : 이들의 '전복', '일탈' 나아가서는 '범행'이 드러나지 않고 순조롭게 서울의 시민 사회에 편입되는 것. 이들은 건물 하나를 구입하여 각각 카페, 게임팩 대여점, 에이브이 전문점, 편의점 들을 차렸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을 예찬한다. 오 영원한 친구, 오 행복한 마음, 오 즐거운 인생. 예! 그런 식의 가사를. 두 번째 상황 : 그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경찰서 안에서. 그들은 왜 털었느냐는 질문에 각각 이렇게 답한다. "용돈이나 하려고", "텔레비전 보고", "영화 보고", "만화 보고" 등등. 그래서 당신의 고향이 서울이라면, 관할 경찰서 피의자 대기실의 허술한 의자 위나 형사과에 마련된 간이 철장 너머에 고스란히 놓여 있는 이들 친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의 예찬이거나 서울의 비가이다. 우리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한없는 상상의 꿈들로 그려낸, 재미있고, 화나고, 슬프고, 즐거운 서울을 위한 축제의 노래다. 이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소설은 이러한 결말을 향해 치닫지는 않는다. '애초에 친구들이 부르던 노래'는 이들이 계획을 세우기 위해 처음 모였던 '버거 킹'을 터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도 괜찮을 거야."라는 찰리의 말을 남긴 채. *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인 『서울특별시』의 작품집에는 단편 「다시 한번, 그 춤을」이 수록되어 있다. 수상작에서와 같이, 날렵하고 재치있는 어조를 간직하되,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옛 몸짓과 옛 가락을 끄집어낸 소재적인 흥미를 다룬 덕에 수상작 못지않은 읽을거리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