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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으로 가는 길>
인디언의 가르침/나만의 장소/내 영혼의 큰 바위 얼굴/귀 기울이기/함께한 시간만큼 깊어진다/하나가 된다 <밥 그리고 집―풀과 나무> 가만히 바라보아야 하는 까닭/다른 길을 걷는 형제, 밭과 산/숲의 앞날 읽기/나무도 좋아하는 곳이 있다/나무의 이력 읽기/나무에게 절하다/사라진 영광/잎, 하늘이 차리는 밥상/풀 이름 익히기/나무 이름 익히기/나뭇잎 접시/나무 친구/원칙이 딱 서 있는 덩굴식물/지구의 웃음/ 산 넘고 강을 건너는 산뽕나무/자연장/채집의 삶 <숲의 오작교―곤충> 세상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곤충 이름 익히기/산을 보는 또 하나의 틀/먹이 사슬 그리기/사물에 말 걸기/한곳에서 꼼짝 않고/파리란 놈과/먹는 것에 따라 다른 입/곤충의 사촌, 거미/다 내주는 사랑/내 친구 땡삐/산은 누가 청소하는가/들풀비빔밥 <숲 지킴이―산새> 산에 가기 전에/새를 집으로 초대하는 법/새 이름 익히기/날 수 있는 동물/생태 건축/숲 지킴이/새는 누가 깨우는가/나무를 심는 새/시체포즈/깨어 있는 새 잠든 사람/새들의 여행/무료 종합병원 <야생의 삶―야생동물들> 야생동물을 보려면/야생동물의 이름 익히기/하늘로 던지는 돌/자연식/생명은 이빨을 통해 여행한다/삶이 보이는 발자국/온 산을 보금자리 삼아/동물들의 일기예보/이름 없는 사원/동물의 길이 가르쳐 주는 것/멀리서 보는 내 집 <또 하나의 세계―민물의 생물들> 준비-조용히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물길을 따라 오르다/물고기 잡던 날/작은 못에서/이름 익히기/사라진 가재가 가르쳐 주는 것/또 하나의 세계/보이지 않는 저수지/물의 가르침/우리는 모두 함께 한 공기를 마시고 있다/흔적을 남기지 않는 문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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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속 생활의 즐거움>
산속에 살다보니 며칠씩 사람을 못 보는 때가 많습니다. 이곳으로 옮긴 뒤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생물들을 친구 삼고 살게 됩니다. 방금도 다람쥐가 장작더미 사이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갑니다. 문밖으로는 지칭개, 엉겅퀴, 소루쟁이, 컴프리 꽃이 피어 있는 게 보입니다. 벌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와 여기저기를 뒤지다 "에이, 아무것도 없잖아."하며 그냥 갑니다. 요즘에는 왕자팔랑나비와 애기세줄나비가 자주 눈에 띈다. 줄딸기와 오디가 한창입니다. 가마니로 딸만큼 많습니다. 손과 입에 늘 오디물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쇠박새가 어깨에 앉으려고 하다가 그냥 갔습니다. 사람을 더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작은 태양광 전기 시설을 만들어 이 산속에서 노트북을 쓰고, 핸드폰을 충전해 쓰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고 행복합니다. 냉장고가 없어 늘 바로 캐고 딴 것을 먹기 때문에 항상 신선한 걸 먹게 되고, 텔레비전이 없어 하늘에 별이 뜨는 걸 보고 새소리를 듣습니다. 가끔 손님들이 찾아오면 함께 숲을 산책합니다. 짧게 한 바퀴 돌면 한 시간, 길게는 두 시간쯤 걸립니다. 그곳에서 나는 손님들에게 산에 사는 내 친구이자 형제들인 나무, 풀, 벌레, 야생동물 들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혹은 아무 말 없이 걷다가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뿐이건만 돌아올 때 보면 모두 얼굴이 환하게 바뀌어 있습니다. 산의 힘에 또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입니다. 돌아와서는 직접 가꾼 채소로 비빔밥을 대접합니다. 이름하여 생야채비빔밥. 식탁에 놓는 것은 보기 좋게 놓인 여러 종류의 야채와 고추장이 담긴 그릇, 들기름병, 그리고 그것들을 넣어 비빌 대접뿐이지만 풍성하고 정갈하고 아름답습니다. 식물만으로 차린 식탁이기 때문에 탁한 냄새 또한 없습니다. 절로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뭇 생명들의 삶의 터전 산> 볼 게 뭐가 있다고 산에 가? 가 봐야 나무밖에 더 있어? 산을 좋아하고 자주 산에 가는 사람들조차 함께 얘기해 보면 산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한번 볼까요. 혹시 참나무라는 나무를 아세요? 이름은 들어봤다고요? 그럼 참나무라는 나무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는지요? 우리의 산에는 참나무가 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본디 참나무라는 나무는 없고 갈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등을 통틀어 참나무라 합니다. 소나무와 잣나무 리기다소나무의 차이를 알고 있나요?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 나무들은 모두 바늘잎나무로 모양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소나무는 둘, 리기다소나무는 셋, 잣나무는 다섯 잎이 모여 난다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철새들의 여행을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가을날 아침 딱새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얼마 뒤부터 비슷한 수의 울새가 있는 것을 보고 딱새가 울새로 둔갑했다고 믿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황당한 설은 놀랍게도 그 뒤로 여러 세기 동안 지식인들에게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부터 먹거나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은 무엇인지, 나무의 이력을 읽는 방법은 무엇인지, 누가 청소해주는 것도 아닌데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들은 왜 그리 깨끗한지, 곤충이나 야생동물, 민물생물들의 겨울나기의 모습은 어떤지 등 뭇 생명들의 생태적인 측면들을 재미난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죠. 이름을 아는 것은 누군가를 알아 가는 첫걸음일 뿐입니다. 산에서도 우리는 먼저 이름을 묻습니다. 이것은 무슨 꽃인가요? 이 나무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우리는 그 이름을 듣고 나면 마치 그의 전부를 안 것처럼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 알았다고 여기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거기서 멈춰 버립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 앎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삶에서 깨닫게 되는 삶의 지혜들을 들려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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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현의 산 바라보기
산에 가 보면 절로 자기 마음을 끌어당기는 나무나 풀, 혹은 바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당신의 나무나 풀 혹은 바위로 삼으세요. 물론 이름표를 붙이거나 무슨 표시를 하면 안 됩니다. 힘들거나 외로울 때 그런 '내 마음의 나무'를 보면 어떤 형태로든 그 나무는 힘을 줍니다. 꼭 가지 않아도, 그 나무를 생각만 해도, 연인 사이가 그런 것처럼 힘이 납니다.
같은 나무도 앉거나 누워서 보면 서서 볼 때와 달리 보입니다. 산이 아니라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들이 보입니다. 앉아서 보면 서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작은 날벌레들이 먼저 눈에 띌 것입니다. 날벌레들마다 주요 활동 무대가 달라서 서 있을 때는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누워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역시 하늘입니다. 파란 하늘, 흰 구름을 배경으로 수많은 날개 있는 생물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날벌레, 작은 새, 큰 새, 그리고 가끔 무리를 지어 날아가는 새들도 보입니다. 때로는 아주 높이 나는 새가 눈에 띄기도 합니다. 엎드려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땅이 코앞에 있습니다. 그곳이 풀밭이라면 풀잎과 줄기 사이로 땅이 보이고 그곳에 사는 작은 동물들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작은 동물들의 왕국입니다. '크기만을 빼고는 사람의 마을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느껴지는 게 많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데 같은 사물이 다르게 보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정지 상태에서는 움직일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이처럼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거나 앉아 있어 보면 움직이면서 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정지하고 가만히 주변 사물에 의식을 집중하면 제일 먼저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습니다. 흔히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만 주변의 사물들을 지켜보고 있을 뿐인데 거기서 많은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내가 제일이라는 교만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를 보고도 여러 가지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자만심 버리기> 식물과 영혼으로 대화를 하는 돈후앙이란 인디언이 있었습니다. 그는 식물 연구를 위해 자신을 찾아온 한 백인 식물학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식물을 채취해야 하는 사람은 먼저 식물에게 그 까닭을 말하고 사과해야 하며, 또 언젠가는 자신의 몸뚱이가 그들의 양식으로 주어질 것임을 식물에게 확신시켜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백인 식물학자에게 식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나는 당신보다 나를 조금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등하다." 평생 동안 사람은 엄청난 양의 식물과 동물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해 갑니다. 그것들이 있어서 사람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뒤에는 우리의 몸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도리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무나 풀보다 인간이 낫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래야 평등한 관계가 보입니다. 자만심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큰 소리로 "나는 당신보다 나를 조금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등하다."는 말을 반복해야 합니다. 속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하고, 또 남들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식물의 응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자연의 신비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것은 인간이라는 자만심을 버리고, 만물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 만물이 단순한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가 돼서 어울리며 경험할 수도 있는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넘어서야 하는 것인데, 그게 잘 아시다시피 무진장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돈으로도 안 되고 권력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기> 산 입구의 버려진 밭에 푸성귀를 길러 먹고 있습니다. 20평쯤 될까요? 여름에 그곳에 김장용 배추와 무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것이 자라 속이 앉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배추흰나비 애벌레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배추흰나비 애벌레도 사람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무와 배추를 좋아합니다. 다른 풀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두면 절단이 날 것 같아 처음 며칠은 잡아서 땅위에 놓고 발로 밟아 죽였습니다. 작은 것은 손가락으로 문질러 죽였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산 채로 잡아서 멀리 떨어진 풀숲에 갖다 버리기도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무렵에 한 방문객이 핀드혼 공동체의 방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영국에 있는 그 공동체에서는 작물에 벌레가 생기면 그 벌레에게 말을 건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이 배추는 우리가 키우는 것이다. 손대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곳에 가서 살기 바란다. 기간은 일주일이다. 그때까지 떠나지 않고 여기 그대로 있다가는 큰 코 다칠 줄 알아라." 그 말을 듣고 나는 크게 깨우치고 바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배추흰나비 애벌레에게 우리 밭에서 떠나 주기를 부탁했습니다.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부터 말하면 서운하게도 우리 밭의 배추흰나비 애벌레 놈들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영어만 알아듣나? 밭고랑을 왔다갔다하며 오래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한참 끝에 나는 무릎을 쳤습니다. 갈 데가 있어야 가지! 갈 데도 없는 데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래 같이 먹자! 배추 한 고랑을 배추흰나비 애벌레 몫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배추흰나비 애벌레에게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저기 저 고랑의 배추가 너희 몫이다. 저쪽 걸 줄 테니 이쪽은 손대지 마라. 알았지?"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부터 말하면, 아 이놈들이 이번에도 못 알아듣고 내 속을 뒤집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어떻게 했을까요? 말 걸기는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먹어야 할 배추에 끼인 애벌레들을 잡아다 그들 몫으로 정한 배추로 옮겨 놓아주는 수고를 달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 일은 그런대로 마음이 편했습니다. 그 작업을 통해 배추흰나비 애벌레하고도 많이 친해졌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