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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結晶)
잔해(殘骸) 예언(豫言) 수장(水葬) 냉혈(冷血) 귀가(歸家) 옮긴이의 글 ㅣ 무색무취의 '그'에 대한 이야기 |
Shion Miura,みうら しをん,三浦 しを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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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정의는 무엇일까? 신뢰를 짓밟히는 것이 배신일까? 그러나 신뢰는 짓밟히는 바로 그 순간에 무너지고, 결국 남는 것은 자존심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존심이 바로 배신이라는 행위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남자에게 배신당한 여자와 여자에게 배신당한 남자가 서로 얼음처럼 냉랭하게 테이블을 마주하고 대치한다. 얼음의 차가움 못지않게 뜨겁게 타오르는 자존심을 유일한 방패로 삼고. --- p.34 어쩌면 그는 이 세상 어딘가에 불변의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다보면 치열한 감정도 닳아서 둔해지고 느릿한 변화의 물살에 삼켜지게 마련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영원히 지속될 마음을 찾고 싶다고 아이처럼 연애를 한 것이리라. 마사코가 말한 ‘외롭고 섬세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닐까. 무라카와는 가련하고 어리석은 남자이다. 그는 변해버리는 것 속에 외로움과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입에 당기는 꿈의 과실만을 원한다. 그것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고대의 황제처럼. --- pp.113~114 “엄마예요. 살해를 의뢰한 건 엄마.” 역시 중년 남녀는 무라카와 아야코의 부모였던 것 같다. 그러나 무라카와는 요전부터 큰 오해를 하고 있다. “잠깐만. 어째서 엄마가 너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 “머리가 이상하니까.” 네가? 아니면 엄마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가족과 있을 때에는 검은 옷이네. 어째서?” “물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저 사람들이 하는 짓엔 완전 넌덜머리 나. 오늘도 봤죠? 도쿄에서 학회가 있을 때마다 엄마는 아버지를 따라와요. 잠시라도 눈을 뗀 사이에 다른 여자한테 도둑맞을지도 모른다고,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하죠. 바보 같아요. 설령 그렇게 된들, 다 인과응보인 것을.” 인과응보. 그런 단어를 일상생활에서 듣기는 처음이었다. 과연 불상을 좋아하는 여자답다. --- pp.195~196 참으로 허무하다. 그리고 그 허무한 발버둥을 나도 똑같이 따라 하고 있다. 나는 이토를 사랑하고, 이토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으로는 안 되는 것이다. 독을 품은 화분의 흙이 그래도 탐욕스럽게 물을 찾듯이. ‘놀이’로 끝이 아니라, 지배가 확립할 때까지 무한하게 룰을 변형시키듯이. 사랑의 역학은 바닥 모를 어둠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뿐이다. --- p.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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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밀한 문장, 묵직한 여운이 돋보이는 소설
발표하는 작품마다 이전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구성과 문체로 평단과 독자들의 기대와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작가, 미우라 시온. 순문학과 대중문학의 경계에서 벗어나 세계관을 단정 지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하고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그녀에게는 항상 “요시모토 바나나 이래 가장 참신한 작가”, “현재 일본에서 ‘인간’을 묘사하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젊은 작가”라는 등의 찬사가 따라다닌다. 미우라 시온의 폭넓은 작품세계에서『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은 이전까지 발표했던 작품들과 궤를 달리한다. 이 소설은 위트와 유머가 깃든 문장으로 아웃사이더들의 삶을 따뜻하게 그려낸 『격투하는 자에게 동그라미를』, 『마호로역 다다심부름집』에서 선보였던 지점과 정반대에 자리한 소설이다. 작가는 발랄하고 톡톡 튀는 어투를 버리고, 건조하고 담담한 필치로 삶을 진지하게 성찰한다. 한 남자를 교집합으로 낯모르는 인연이 엇갈리고, 얽매이고, 소통하거나 단절되는 ‘삶의 고리’를 그려낸다.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 속에 농밀한 문장, 그리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자리 잡은 묵직한 여운이 작품의 밀도를 높인다.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은 ‘팔색조 작가’라 불리는 미우라 시온이 발표한 소설 가운데에서 가장 농익은 작품이다. 낯선 남자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며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린 대학교수, 무라카와 도오루. 영원할 것 같은 그의 바람기는 의외의 여자에게 정착하게 되면서 잠잠해진다. 조강지처와 아들, 딸까지 버리고 재혼을 한 상대는 딸이 둘 있는 이혼녀이다. 여섯 편의 연작으로 이어진 『내가 이야기하기 시작한 그는』은 무라카와 도오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하지만 화자가 바뀌는 여섯 편의 연작에서 그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각 편의 화자인 다섯 남자를 통해서 그의 삶을 알 수 있는데, 그들 또한 연구소의 제자와 아들을 제외하면 그와 일면식이 없는 타인이다. 무라카와 도오루와 바람을 피운 여자의 남편, 그와 재혼한 여자의 딸을 관찰하는 흥신소 직원, 그의 친딸 약혼자가 그들이다. 공통점이라곤 그들이 무라카와 도오루라는 남자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뿐이다. 화자들 또한 서로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타인이다. 작가는 이처럼 독특한 발상과 구성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섯 인물들의 눈에 비친 무라카와 도오루의 삶뿐 아니라 그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들의 삶(그의 아내, 바람피운 상대 여자, 의붓딸, 그의 친딸), 그리고 화자의 삶을 들춰본다. 무라카와 도오루라는 인물의 뼈대 위에 다섯 화자가 층을 이루고, 층마다 각양각색 인물들의 삶을 장식하는 중층의 구조를 이룬다. 그 속에서 빛과 어둠이 교차를 이루고, 인연과 인연은 화합하여 인물들의 삶은 다양한 빛을 쏟아낸다. 세계의 탄생 혹은 소멸, 낯모르는 인연과 인연이 빚어내는 삶의 화학작용 단지 누군가를 통해 존재를 알게 됐을 뿐인 만난 적 없는 타인의 삶에 뜻하지 않게 맞닿게 된다면 내 인생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작가는 이와 같은 물음을 화두로 삼아 낯모르는 인연과 인연의 화학작용을 관찰한다. 무라카와 도오루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인물들이 겪게 될 사건의 원료가 되어 다양한 화합물을 형성한다. 「결정」 ,「잔해」, 「예언」, 「수장」, 「냉혈」, 「귀가」로 이루어진 각 장의 제목은 인물들의 인생관을 암시해주는 복선의 역할을 띠고 있다. 「결정」에서는 무라카와 도오루의 연구소 제자가 등장한다. 그는 학문적인 열정을 빼면 평범한 중년의 남자와 다름없었던 스승이 여자문제로 복잡하게 얽혀 있게 된 것을 알게 된다. 스승의 집을 찾아갔다가 자기 또한 치정 관계에 엮여 있다는 사실과 함께 남편의 여성편력을 버티며 살아온 사모의 내면을 목도하게 된다. 이 제자는 마지막편인 「귀가」에서도 화자로 나와 스승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스승과 재혼하여 죽음 앞에서도 자기 남자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여자를 지켜보며 아이 없이 건조한 결혼생활을 지속하며 이웃 고등학교 소년을 미묘하게 경계하는 자기 삶을 포개어본다. 「잔해」에서 그와 아내가 불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그간 평범한 삶을 꿈꾸었던 희망이 희석되는 것을 느낀다. 그가 바라보는 미래는 이전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언」에서 부모의 갑작스런 이혼으로 아버지인 무라카와와 헤어지게 된 사춘기의 아들은 혼돈스러운 경험을 하고 ‘멸망해버린 세계’를 가슴속에 저장한다. 「수장」에서는 흥신소 직원이 무라카와의 의붓딸이 비극적인 삶을 선택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냉혈」에서는 무라카와의 친딸과 약혼한 남자가 등장하여 약혼녀의 의붓여동생을 죽음을 조사하며 한때 일탈적인 삶을 살았던 자기 인생과 조우하게 된다. 이 연작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라카와라는 원료와 화합하는 순간, 내면에서 격렬한 반응이 일어난다. 작가는 이 반응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섬세하고 날카롭게 관찰한다. 기존 작품 속에서 명랑한 삶의 이면을 조망했던 작가의 시선은 웅숭깊은 빛을 발한다. 치열한 내적 갈등을 겪은 인물들의 결과물은 또한 각양각색의 빛깔을 보인다. 예견됐던 삶의 궤적에서 다른 곳으로 방향을 돌리거나 자기의 가치관을 내면에 공고히 각인시키기도 한다. 내면에 들어찬 새로운 세계의 탄생 혹은 소멸된 세계의 흔적을 이야기한다. 책을 다 덮고 난 이후에도 독자들의 가슴에 삶을 향한 작가의 사색적이고 진지한 성찰이 긴 여운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