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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명
2. 삐에로와 국화 3. 8월의 사상 작품 해설_김윤식 작가 연보 |
李炳注, 호: 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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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지 말아라. 자네는 아직 젊다. 자네는 역사를 변명하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써라.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 ---p.38
두 사람이 판자문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주영숙이 꽃다발을 뜰에다 내동댕이친 직후였다. 국화꽃의 그 샛노란 송이송이가 산란한 채 비좁은 뜰을 꽉 채우고 있었는데 그 꽃송이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괴물처럼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p.110 시간이 해결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뭔가 잘못된 인식이 아닌가 한다. 시간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시간은 대립된 문제를 해갤해주는 것이라 아니라 대랍자를 파괴해버림으로써 문제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p.1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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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이 많아 글을 쓴다
이병주는 한이 많아 글을 쓴다고 했다. 만약 이 말을 그의 육성으로 들었다면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일제강점, 한국전쟁, 독재정권 등 한국 역사의 고비마다 그 한복판에 있었던 그이기에, 그 한복판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결국 글쓰기라고 명명했던 그이기에 되지 않은 위로나 어설픈 동조는 쥐구멍 찾기에 바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가 문학을 권하다 종교의 자리에 문학을 갖다놓을 수 있다고, 이 세상이 각박한 것은 문학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므로 사회 각 영역에 개개의 문학이 관류해야만 우리의 정신이 옥야를 이룬다고 호언장담했던 이병주. 「변명」은 어째서 그가 문학인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작품이다. 「변명」은 시종일관 주인공과 마르크 블로크의 대화를 담는다. 마르크 블로크 당신도 레지스탕스를 하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면서 도대체 무슨 역사를 변명한단 말이오, 하는 것이 주인공의 이의 제기다. 마르크 블로크와 동렬에 있는 학도 탈출자 탁인수의 죽음, 그를 밀고한 장병중의 탄탄대로의 삶, 그를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주인공의 무기력감. 이 모든 것 앞에서도 역사가 우리를 기만한다고 욕하는 대신 변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마르크 블로크에게 주인공은 역사 대신 문학을 제안한다.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이는 곧 이병주 자신의 목소리다. 참혹한 역사는 작가 이병주에게 문학을 권함으로써 비굴한 노예 신분의 학도의 삶에서 벗어나라고 독려하는 것이다. 「삐에로와 국화」 역시 전쟁과 분단이라는 비극적 역사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처할 수 있는지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간첩 죄명으로 사형에 직면한 박복영을 주인공 강신중은 사방팔방으로 뛰며 변호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박복영에게는 숨겨진 사연이 있었고, 이 때문에 사형을 자초한다. 결국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 그 진짜 이유가 밝혀진다. 강신중은 자신은 결국 삐에로였을 뿐이라고 자조한다. 거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모든 개개인은 삐에로일 수밖에 없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8월의 사상」도 위 두 작품과 역사 의식 면에서 같다. 이야기는 한 노인이 지나친 음주 생활로 심각한 건망증을 앓게 되며 시작한다. 얼핏 사사로운 이야기로 보이지만 노인이 8월 15일을 단주일로 정하는 순간 이야기는 역사로까지 확장된다. 학도병 생활을 같이한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몇몇 전우의 사망 소식을 들으며 단주 결심은 위기를 맞는다. 개인의 슬픔이 역사의 슬픔으로 번지는 순간이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 모든 소설이 역사와 사상을 다룰 필요는 없다. 이병주 자신도 문학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서는 그 위상을 지킬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소재의 글을 쓰든, 본인이 어떤 삶을 살든 지금 이 순간의 역사 속에 있다는 사실만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 순수하게 개인의 불안을 그린 소설이라 해도, 기실 그 개인의 불안은 사회 구조의 모순과 맞닿아 있다. 문학과 역사의 경계에 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던 작가 이병주. 지금 이 순간 그의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일 자체가 이미 개인이 역사 속에 있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