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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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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잠깐. 조용히들 해. 조용히.”
선생님이 외쳤다. “창문을 모두 닫아.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안 돼.”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아이들을 바라보더니 복도로 나갔다. 나는 선생님을 눈으로 좇다가 국어 교과서를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아이들이 와글거리는 말들이 국어책에 씌어 있는 것처럼 그 소리만이 의식되었다. 주로 “야, 멋지다”는 말과 “나도 함 해봤으면”이라는 말, 그리고 “야, 재미있겠다!” 같은 말이었다. 그중에서도 “야, 재미있겠다!”라는 말이 가장 많았다. 어떤 때는 감동적인 묘기라도 보는 양 한꺼번에 “우아!” 하고 외쳤다. 나는 화가 나려고 했다. 미친놈들. 불이 났는데 재미라고? 그렇지만…… 나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아빠가 화재를 진압하다가 순직하지 않았다면. --- pp.11-12 아빠가 탈출하려고 애쓴다. 뜨거운 연기 때문에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다. 폭발의 충격으로 헬멧이 날아가버려 불을 켤 수가 없다. 소방 호스를 찾아 바닥을 더듬으며 움직인다. 그러다가 그 애를 발견한다. 그 애는 천 더미 틈에 꼭 끼인 채 늘어져 있다. 아빠가 그 애를 안아 올린다. 아이는 살아 있다. 아빠는 필사적으로 입구를 찾아 움직인다. 그때 콘크리트 기둥 하나가 무너지며 아빠를 덮친다. 아빠는 머리를 다치고, 무거운 기둥에 깔린다. 아이가 울며 아빠에게 달라붙는다. 아빠는 안간힘을 써본다. 소용없다. 아빠는 빠져나오지 못한다. 갑자기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 금세 정신이 희미해진다. 아빠는 우는 아이의 얼굴에 간신히 산소마스크를 덮어씌우고 정신을 잃는다………………………………………………………………………………………………………………………………………………………………………… 비슷비슷한 상상을 여러 번 해보았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상상뿐이었다. 그 당시 아빠의 동료 소방관 아저씨들을 찾아보면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엄마가 싫어할 것 같았다. 엄마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그 일에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 pp.32-33 아이의 목소리가 또 올라갔다. 조절이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아이는 또 나를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어린아이처럼 맑은 웃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상한 빛깔에 전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재빨리 김밥 한 줄을 썰었고, 그 애가 선 채로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꾸 나를 보고 히죽거렸다. 내가 마음에 드는 건가? 무심코 속으로 묻는데, 순간 내 가슴이 철렁했다. 한참 뒤늦은 그제야, 그 애가 바로 아빠가 구한 애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쿵덕쿵덕 심장이 속도를 높였다. 순식간에 생각도 감정도 복잡해졌다. 내 머리와 가슴이 내 생각과 감정을 서로서로 부정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나는 앞서 머릿속으로 되풀이한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 다른 쪽으로 결론을 내려고 애썼다. --- p.115 나는 화재 진압복을 입고, 헬멧을 쓰고, 호스를 꼭 쥐고 괴물로 변한 시뻘건 불을 향해 나아가는 소방관 아저씨를 상상했다. 아저씨는 무섭고 외롭다. 여기저기 동료 소방관들이 있지만, 그래도 무섭고 외롭다. 아저씨가 자신을 외롭고 무섭게 한 성난 불을 죽이기 위해 차가운 물을 뿌린다. 아저씨는 괴물과 싸우는 의로운 전사다. 아빠도 전사였다. 의로운 전사. 엄마 말로는 숭고한 전사. 아빠가 동료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불 폭풍에 날려 정신을 잃는다. 아빠는 홀로다.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깨어난다. 뜨거운 암흑 구덩이에서 홀로.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외로움이니 무서움이니 하는 말은 너무 부족하겠지? 그 아이를 발견했을 때는 기뻤을까? 기쁨 같은 걸 느낄 여유도 없지 않았을까? 아이에게 산소를 마시게 하면서 어서 밖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겠지? 그러나 시멘트 기둥이 쓰러진다. 아빠가 거기에 깔린다. 아빠의 인생은 거기서 정지된다. 아빠의 시간도 거기서 정지된다. 성난 불과의 싸움도 정지된다. 오직 그 애의 시간만이 이어진다. 내가 그 애를 찾아냈다. 아빠의 죽음이 꽃을 피운 걸 확인하고 싶어서. 그런데 그 애는 정상이 아니다. 처음 보는 나에게 맑게 웃으며 인사했지만, 그 애는 내 눈을 보고 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똑바로 눈을 맞추지 못하는 애. 자기 속에만 갇혀 있는 애. 그 애도 외로움을 느낄까? 다른 사람과 눈빛을 나눌 수 없는 그 애도 외로움을 알까? 쓸쓸함을 알까? 자신이 누구인지 알까? --- pp.143-144 “왜 아빠와 결혼했느냐고 했지? 갑자기 엄마가 입을 열었다. 엄마는 내 반응은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결혼하기 전이었는데, 네 아빠가 근무하는 소방서를 찾아간 적이 있어. 예고 없이 그냥 갔지. 놀라게 해주려고. 가끔 그랬어. 그러면 본인도 좋아했고, 동료 소방관들도 참 잘해주었거든. 그런데 그날은 마침 아빠가 화? 진압을 하고 막 돌아온 뒤였어. 저녁이었는데, 정말 지친 모습이더구나. 그을음이 묻은 번들거리는 지친 얼굴로 환하게 웃었지. 그런데 정말 아름다워 보이더라. 난 그때 남자가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 뭐랄까……” 엄마가 말을 고르느라 잠시 멈추자, 때맞춰 아저씨도 차의 속도를 늦췄다. “순수한 전쟁을 치르고 온 사람…… 순수한 투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순수한 남자…… 그런 느낌이었어. 지친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그렇게 선해 보일 수가 없었어.” 엄마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네가 어느 정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싸우는 건 뭔가를 얻기 위한 거고, 싸우는 대상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야. 우리가 인생이라고 하는 게 그런 것인지도 몰라. 끝없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과정.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불과 싸우는 소방관들은 달라. 다른 사람을 이겨서 뭔가를 얻기 위한 게 아니라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구하긴 하지. 하지만 그게 자신을 위한 건 아니야. 소방관들은 불과 싸우지 사람들과는 싸우지 않아. 때로 목숨을 걸고서 싸워. 그날 난 그런 싸움을 하고 돌아온 네 아빠를 봤어. 진짜로 순수한 전사 같았지.” 내내 앞쪽을 보고 있던 엄마가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혼했어.”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 pp.174-1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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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확 타올랐다가… 확 식어서 얼음처럼 되고…
따스했다가 뜨거웠다가 차가워졌다가… 오락가락… “사람 속에도 불이 있다고요, 불!” 십일 년 전, 불과 싸우다 돌아가신 순수한 전사, 아빠!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아빠가 구하셨다는 아이는 지금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문지 푸른 문학’ 열두번째 권으로 출간된 이상운 장편소설 『불』은 순직한 소방관 아빠를 찾아가는 한 소년의 여행을 그리고 있다. “그는 궁금해하고, 묻고, 찾고, 기뻐하고, 부딪치고, 두려워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여행을 완성한다.”(「작가의 말」) 아빠의 순직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엄마와 ‘나,’ 그리고 아빠의 순직 덕택에 삶을 지속할 수 있었던 ‘그 아이’의 현재의 삶을 확인해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이미 호된 성장통이다. ‘나’는 화장품 가게를 하는 엄마와 단둘이 사는 평범한 듯 보이는 중3 소년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야 외삼촌으로부터 아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그해 가을에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한 뒤로는 누구에게도 그 얘기를 한 적이 없다. 엄마도 언제부턴가 아빠 얘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면 방향을 바꾸고, 불이 났다는 텔레비전 보도가 있을 때마다 말없이 채널을 돌릴 뿐. 그러던 차에 오래된 학교 창고에 불이 나는 사고가 생기고…… 불이 났다는 사실을 재밌어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사람 속에도 불이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러면서 점점 커져가는 ‘그 아이’에 대한 생각. “아빠가 세상을 떠날 때 아빠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그 애”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엄마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그곳을 찾아가고, 조금씩 과거의 비밀들과 대면해가는 ‘나’가 ‘그 아이’를 찾아가는 여정은 ‘나와 엄마의 상처’ 깊숙한 부분을 눈으로 확인해가는 과정이면서, 어쩌면 다른 사람을 통해 지속되고 있을 ‘아빠의 현재’를 불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대면하게 된 ‘그 아이’는 자폐(自閉)의 상태이고, 그들 가족 간의 오래된 불화는 ‘나’의 내면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빠가 그 애를 보면 어떤 마음일까? 그 애의 부모에 대해서는 또 어떤 마음일까? 나처럼 실망하고 화를 내실까? 엄마 말대로 아빠가 순수한 전사라면, 자신이 불과 싸우며 구해낸 그 애가 이렇게 한참 자라 있는 걸 보면 무조건 기뻐하지 않을까? 그렇기를 나는 빌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 거라고 믿을 수는 없었다. --- p.176 “순수한 전쟁을 치르고 온 사람…… 순수한 투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순수한 남자…… 소방관들은 불과 싸우지 사람들과는 싸우지 않아. 때로 목숨을 걸고서 싸워. 그날 난 그런 싸움을 하고 돌아온 네 아빠를 봤어. 진짜로 순수한 전사 같았지.” 『불』은 이상운 작가의 네번째 성장소설이다. 『내 마음의 태풍』 『중학생 여러분』 『바람이 불어, 내가 원치 않아도』 등을 통해 흔치 않은 청소년기의 방황과 성찰을 치밀하게 그려온 작가는 이번에는 보다 근원적이고 사회성 짙은 질문을 던져놓는다. 아빠의 숭고한 죽음과 그를 공통분모로 하는 세 사람(엄마-나-그 아이)의 현재의 삶을 목도하는 ‘나’의 성찰 과정은 마치 ‘불[火]’과 같은 인생사를 토닥이고 진화(鎭火)하는 성장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사람 속에도 불이 있다”는 생각은 그런 ‘불’을 지니고 살면서도 내색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불’과 치러내는 싸움들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작가는 실제로 어느 가을 오후에 화재를 진압하고 돌아온 소방관을 우연히 목격한 후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흠뻑 젖은 옷차림에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로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그 소방관은 “노곤한 얼굴을 조금 쳐들고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편해 보였”(「작가의 말」)단다. 그리고 그 풍경은 작가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이 소설 『불』로 자라났다.” “네가 어느 정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싸우는 건 뭔가를 얻기 위한 거고, 싸우는 대상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야. 우리가 인생이라고 하는 게 그런 것인지도 몰라. 끝없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과정. 하지만…… […] 불과 싸우는 소방관들은 달라. 다른 사람을 이겨서 뭔가를 얻기 위한 게 아니라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재산과 생명을 구하긴 하지. 하지만 그게 자신을 위한 건 아니야. 소방관들은 불과 싸우지 사람들과는 싸우지 않아. 때로 목숨을 걸고서 싸워. 그날 난 그런 싸움을 하고 돌아온 네 아빠를 봤어. 진짜로 순수한 전사 같았지. […] 그래서 결혼했어.” --- p.175-176 불은 사실 너무 작아도 곤란하고 너무 커도 곤란하다. 너무 가까워도 큰일이고 너무 멀리 있어도 큰일이다. 마치 청소년들이 치러내게 마련인 성장통처럼. 이상운 장편 성장소설 『불』은 잔잔한 문체 속에 평범한 중학생의 일상을 담고 있는 듯 보이지만, 독자들의 순수한 감성에 옮겨붙는 순간, 거대한 화마로 돌변할지도 모른다. 마치 불처럼. 어쩌면 우린 그런 불을 지피고 옮기고 끄고 다시 사르는 과정을 거치면서 어른이 되어갈 테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