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Patricia Highsmith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다른 상품
김미정의 다른 상품
약 2년 전, 애나벨이 제럴드 딜러니와 결혼한다는 소리를 처음 들었던 순간, 데이비드는 어떻게든 이 갑갑하고 고통스러운 우울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일도 손에서 놓고 몇 주 내리 술에 절어 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 대신, 아예 생각을 접고 더 열심히 일에 몰두하다 보니 뭘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그는 혼자 있고 싶었고, 주변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직장 때문에 주변 분위기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럼에도 주변을 바꾸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 보니 상상에 살이 붙었다. 애나벨이 결혼이라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잠시 상상한다고 뭐 안 될 게 있을까? 아주 잠시나마 애나벨이 나와 결혼했다고 한숨 돌리며 행복한 상상에 빠지는 게 왜 안 되는데? 그렇다면 나와 애나벨은 무얼 하고 있을까? 분명 프로스버그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어딘가에 있는 예쁜 주택으로 이사 갔을 것이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집을 장만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회사가 있는 프로스버그의 누추한 하숙집, 그리고 그가 월급의 90퍼센트를 쏟아붓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교외에 있는 이 집.
--- p.27 밤이면 그는 2층 더블 침대에서 그녀와 같이 잠들었다.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주다 몸을 돌려 그녀를 꽉 끌어안으면 그의 욕정은 상상 속 여체의 무게를 느끼며 여러 번 절정에 도달하고도 그 이상으로 치솟았다. 그런 다음 손으로 침대보를 쓸면 그저 헛헛함과 외로움에 젖었다.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애나벨이 종종 뿌리는 걸 눈여겨보고 사둔 카슈미르 향수병을 내다 버렸다. 애나벨이 떠오르는 그따위 물건은 필요 없었다. 더군다나 향수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 p.29 “이제 날 놓아줘. 마음에서도, 다른 모든 면에서도. 당신이 이런 말 한 거 알지? 아니, 정확히 이렇게 말한 건 아니지만, 제럴드가 떠나고 나자 ‘이제 내가 사귈 차례다’라고 했어.” 찻잔을 뚫어져라 보던 두 눈에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한쪽 뺨을 타고 내렸다. 데이비드가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냈다. “자기야, 이거 써.” 애나벨이 지갑에서 미용티슈를 꺼냈다. “지금도 변한 건 없어, 데이브.” “아직도 제럴드를 사랑해?” 그는 절대로 그렇게 믿지 않았기에 이렇게 쉽게 물어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평생 과부로 살 건 아니잖아?” “그건 아니야.” 그녀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후 축축해진 미용티슈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럼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 “내 말이 바로 그거야. 유감스럽지만 우린 함께할 수 없어. 이 말을 하기가 정말 힘들다. 당신은 이해하지 않을 테니. 나도 이해가 안 되거든.” --- p.259 아침에 눈을 뜨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다시 머리가 맑아졌다. 애나벨이 그랜트 바버와 결혼하게 내버려둬야지, 한 번 더 뻔한 실수를 하게 둬야지, 오래가지 않을 테니. 그런데 재혼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바보처럼 일정이 뒤로 밀린다. 그 자식이 애나벨이 누운 침대에 기어들어 간다고 상상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뭔가 확실히 해둬야 한다. 편지를 또 보낼까? 그는 편지는 포기했다. 그랜트의 목을 졸라 쾌감을 선사하며 죽이는 방법도 있지만 그랬다간 그가 감옥에 가야 한다. 증오심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약간의 위안과 미움, 경멸을 선사한다. 그래도 그는 애나벨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었다. 애나벨은 그저 이리저리 속았을 뿐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추함과 평범함 속에 가두었다. 왜 그럴까? --- p.285 |
인생의 단 한 가지 난제는 사랑하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너 없이 나는 불완전해.”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며 철저한 계획 하에 살고 있다고 믿는 젊은 과학자 데이비드 켈시. 그런 그가 풀지 못한 단 한 가지 난제는, 사랑하는 애나벨이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데이비드는 2년 전 고향에서 애나벨을 보고 첫눈에 반하지만, 그녀는 제럴드라는 남자와 결혼한다. 애나벨이 결국 자신의 곁으로 돌아올 거라 확신하는 그는 ‘윌리엄 뉴마이스터’라는 가명으로 둘만을 위한 집을 마련하고, 주말마다 그곳에서 그녀와 함께하는 달콤한 나날을 상상한다. 하지만 애나벨에게서는 아무런 답장도 오지 않는다. 한편 이웃집에 살며 데이비드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에피는 주말이면 사라지는 그가 어쩐지 의심스럽다. 어느 날, 단 한 명의 방문객도 없던 외딴집 앞에 낯선 자동차가 들어서고 한 남자가 내린다. 데이비드를 좋아하는 마음에 몰래 그의 집에 찾아온 에피는 뜻밖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데이비드의 속내를 눈치 채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애나벨, 그녀가 결국 자신을 사랑할 거라 확신하는 데이비드, 그런 그를 향한 희망 없는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에피, 결혼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불평하며 에피와 뭇 여자들을 흘낏대는 데이비드의 동료 웨스. 커다란 사건이 없는 이 작품의 서스펜스는 데이비드가 숨겨온 비밀, 즉 그가 애나벨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내려는 주변 인물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서 시작된다. 또한 애나벨이 빙빙 돌려 거절하는데도 그녀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자기 사랑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데이비드의 답답한 러브레터에서 비롯된다. 단 네 명뿐인 주요 인물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하이스미스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고 탄식과 한숨을 내뱉게 된다. 집착이라는 감정을 숨 막히게 그려내며 ‘리플리 시리즈’를 예고한 수작 하이스미스는 1955년부터 1991년까지 무려 36년에 걸쳐 완성한 『리플리』 연작을 쓰던 중, 1960년 이 시리즈의 속편이라 할 만한 『이토록 달콤한 고통』을 발표한다. 인간의 심연, 그중에서도 ‘집착’이라는 감정을 세심하게 그려낸 이 작품의 주인공 데이비드 켈시는 얼핏 ‘톰 리플리’ 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많은 인물이지만 여러모로 리플리와는 다르다. 하숙집 사람들이 ‘성인(聖人)’이라 부를 만큼 예의 바르고 조용하며 회사에서는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는 데이비드는 일주일 중 닷새는 하숙집에, 이틀은 가명으로 구입한 집에 살면서 완벽하게 두 세계를 분리해서 살아간다. 자기 삶을 온전히 통제하며 철저히 계획을 실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이 젊은이의 맹목적인 성격은 삶의 모든 방식을 규정하는데, 타인을 대하는 자세, 심지어 사랑의 방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서 조금씩 어긋나고 비틀린 관계 역시 고장 난 물건을 수리하듯 해결하면 된다고 믿지만, 막상 위기가 닥치자 자기 보호를 하기 바쁘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에게 좋은 쪽으로 받아들이며 합리화해 끝내 주변 사람들을 해치고 마는 인물이다. 『이토록 달콤한 고통』은 ‘애초에 태어나기를 다른 인간들과 다른 괴물로 태어났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기보다, 평범한 듯하지만 어딘지 싸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우리가 그저 갸웃하다가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인간들의 심연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등골이 오싹해지기보다는 어쩐지 가슴이 서늘해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