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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속 깊은 서가 흔적 상처론(論) 책의 생태학 도끼의 값을 묻다 난세(亂世)의 산수화 황씨 할아버지 봄 들판에 아들을 불러오시다 미안하다 1 짜증론 범론 간지럼론 지금 일어서면 사람의 시간 총론(銃論) 할머니들이 먹여 살린다 지구사진협회의 권고 1 아니다, 이대로가 맞다 중인리(中仁里)의 봄 풀밭으로 날아간 정구공을 찾는 네 가지 방법과 한 가지 단서 2부 필생의 여름 백일홍(百日紅) 사랑론 걱정론 전쟁 속 극장 뒤 닭장 증후군 꽃들과 싸우다 부고 위내시경 흐르는 시간 속에서 새신감각 미안하다 2 미안하다 4 타자기 유감 여행론 기억 속 폭풍 개미처럼 낙타처럼 편견 중력을 엿보다 그해 여름, 어떤 밤나무 오로지 하나가 필요할 때 젊은 예술가를 위한 노래 옛 애인들의 표정 3부 나와 사과 가을, 도원(桃園)에서 어떤 단감나무의 시간 사과와 나 알면 멀어진다 보호색 죽음하고만 싸운다 30만 년 전 가을 수유리 비둘기 절개지(切開地) 지나며 아무도 짐작으로 몸을 씻지 않고 마지막 산책 엠에프디 분리 배출 안내 닻 둥근 나무 속 둥근 방 아웃사이더 감별하기 폭주족 십 년 세월 상가(喪家)에서 오징어는 다 먹다 말빚 4부 서늘한 새벽 햇볕의 기한 타임머신론 숨결 뒤편 로 레벨 포멧 불영(不影)계곡에서 인연 우주는 내 한쪽 귀를 차갑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린 해설 / 낯익은 듯 낯선 시의 위엄 / 고형진(문학평론가) 추천의 글 / 마종기(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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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을 먹으면 몸에 흔적이 남는다
옷에 튄 검은 점들 입안에 들어가기 전 격렬하게 흔들리는 면발이 문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짜장색 옷을 입는다 아니면 아예 먹지 않는다 구운 땅콩을 먹으면 낮은 데 흔적이 남는다 낮은 데 흩어진 얇고 질긴 속껍질들 무언가를 지키도록 생긴 것들의 최후가 문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노천에서 땅콩을 깐다 아니면 아예 그냥 먹는다 사람도 만나면 살에 흔적이 남는다 다시 혼자일 때 살아나는 숨소리 또는 체온 그리고 뜻 없는 웃음, 채 알아듣지 못한 속삭임 잃은 온기를 바깥에서 구하는 버릇이 문제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실내를 따뜻하게 한다 아니면 아예 만지지 않는다 만지지 않으면 낭패 대신 후회가 남는다 ---「흔적」중에서 모름지기 짜증은 아무한테나 내는 것이 아니다 짜증은 아주 만만한 사람한테나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짜증을 받아줄 마지막 사람은 제 엄마다 엄마들은 보통 자식의 마음과 제 마음속을 분간 못하는 불구, 자식들은 엄마에게 어떤 원죄가 있다고 믿는다 어떤 빚이 있음을 본능으로 안다 짜증이 심한 사람은 엄마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한테도 짜증을 낸다 필시 이 사람은 제 식구를 아주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달리 보면 식구를 예사롭지 않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더 심한 사람은 남한테도 짜증을 낸다 이 사람은 아주 힘있는 놈 아니면 망나니임에 틀림없다 짜증낼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저 자신한테 짜증을 부린다 이 사람은 저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아니면 저 말고는 아무도 안 믿거나 못 믿는 사람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 사람은 필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짜증론」중에서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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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이희중 시인의 세번째 시집을 펴낸다. 첫 시집 『푸른 비상구』에 이어 두번째 시집 『참 오래 쓴 가위』가 출간된 지 15년 만의 일이다. 이희중 시인의 시집을 기다려온 이들은 알겠지만 그는 시에 있어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다. 시에도 어떤 순리가 있다면 그 흐름에 그대로 몸을 맡기는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시와 시인의 보폭이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팽팽한 완력으로 당겼다 조였다 벌이는 둘 사이의 기싸움이 분명 있을 텐데 겉의 평온함은 놀라울 정도로 볼륨 제로의 침묵을 자랑한다. 고수라 한다면 바로 이러한 무심에 심중을 두지 않을까나.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읽히는 시들 뒤로 깊이라는 여운이 오래 내 속 깊은 데서 징소리를 낸다. 칼날 같은 말씀이 아니라 귀한 위로의 차 한 잔 같은 시, 그리하여 삶의 해무를 걷어주는 시, 그 시의 발신자 이희중 시인 얘기를 좀 해보련다. 서두를 길게 끌게 한 그의 신작 시집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를 좀더 상세히 들여다보자는 얘기렷다.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는 총 4부로 이루어진 시집이다. 각 부의 제목을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1부 ‘속 깊은 서가’, 2부 ‘필생의 여름’, 3부 ‘나와 사과’, 4부 ‘서늘한 새벽’. 구태여 부 제목을 다 발음하고자 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시집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랄까 중요 단어들을 내포하고 있는 까닭이다. ‘속 깊다’가 그러하고 ‘서가’가 그러하며 ‘필생’이 그러하고 ‘나’가 그러하다. ‘여름’이 그러하고 ‘사과’가 그러하며 ‘서늘함’이 그러하고 ‘새벽’이 그러하다. 요컨대 이들만이라도 머릿돌로 얹는다면 최소한 시들이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일은 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니 더한 집중으로 시집 속으로 맹렬히 뛰어들어본다 했을 때 이 시집은 뭐랄까 어떤 ‘제로’를 향해 쉴 새 없이 눈금을 흔들어대는 저울을 닮아 있다. 누가 더 갖고 누가 더 모자라고 할 게 없이 끊임없이 영, 그 제로를 향하려고 몸과 정신을 뒤트는 사람, 그게 시인 같다. 도통 오버를 모르는 사람, 평소의 보폭과 다르게 발이 빨라지거나 발이 느려지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 분명한 이유 없이 감정에 치우친 언사는 절대로 내뱉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결국 ‘죽음하고만 싸’우는 사람. 이번 시집에 유독 ‘~론’이라는 제목을 단 시들이 많은 이유도 나는 게서 찾곤 하였다. 「상처론」 「짜증론」 「범론」 「간지럼론」 「총론(銃論)」「사랑론」 「걱정론」 「여행론」 「타임머신론」처럼 ‘~론’이 붙은 시가 총 9편인데 이들 시를 보자면 우리가 빤히 아는 주제들을 ‘론’에 붙여 새롭게 정의하는바, 그 새로움에 더한 눈길을 끌게 한다. 이에 해설을 쓴 고형진 평론가의 말을 몇 줄 빌려와보자. “그의 ‘~론시’는 사물과 연관된 사람이나 가정을 표명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찰로 인간의 내면을 파헤친다. 어떤 사물에 대한 느낌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그 사물을 만든 사람의 마음을 성찰하고, 또 어떤 경험에서 촉발된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대신, 어떤 감정이 상대에게 전달되는 양상을 관찰하며 인간의 내면을 성찰함으로써 시인이 전하는 인간 군상들의 됨됨이들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실로 전해진다.”( 해설 「낯익은 듯 낯선 시의 위엄」에서) 어떤 식으로든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시는 절대로 안 쓰는 사람, 시인 이희중. 그는 세상 따뜻한 목소리로 세상 차가운 현실을 보태거나 모자람 없이 줄줄 읊는 사람이기도 하다. “알면 멀어진다”(「알면 멀어진다」)라고 말한 것도 시인이고, “내가 나이를 먹는 게 아니고 세월이 나를 둔 채 지나간다”(「부고」)라고 말한 것도 시인이며, “예술은, 먹을 것은 잘 장만하지 못하면서 새끼를 많이 낳거나 불러 키우는 입만 산 나쁜 부모”(「젊은 예술가를 위한 노래」)라고 말한 것도 시인이고, “그이들한테 내가 무엇이 될까보다는 그들이 나한테 무엇이 될지에 나는 늘 골몰했으므로”(「옛 애인들의 표정」)라고 말한 것도 시인이다.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시는 바로 이러한 일침이 박힌 시들이 아닐까. 안 아픈데 자꾸만 아프다고 하는 시로부터 이희중 시인은 멀리 있다. 더는 사랑하지 않는데 여전히 사랑한다고 하는 시로부터 이희중 시인은 멀리 있다. 내일 죽을 건데 영원히 살 것이라고 하는 시로부터 이희중 시인은 멀리 있다. 어쩌면 이 멀리 있음으로 읽는 우리에게 더 가까워진 것은 아닐까. 참으로 인간적이다 싶으니까, 이 인간적인 솔직함이야말로 오랜 감동의 화수분이다 하겠으니까. 시인의 말 시집 낼 곳을 정하고도 긴 시간을 보냈다. 준비하는 시간 을 즐겼다고 해야 할까. 앞 시집을 낸 해 낳은 아이가 겨울 오면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에 이르렀다. 시인이 아닌 시 간을 즐겼다고 해야 할까. 병고로 노년을 보내고 계신 두 분 육친과, 자라는 두 아들 함께 몇 해 전부터 한집에 산다. 나를 길러주신 이들과 내 가 기르는 이들 사이, 내 자리를 새겨보고 지난 자리를 돌아보는 일이 잦다. 여기, 이 뜨거워지는 별 위에서 욕심에 휘둘리며 살아가 다가 우리 모두 헤어지리라. 그러나 언젠가 저기, 지금은 알 지 못할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믿는다. 내려놓고 보니 걱정 한 보따리다.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 지 않고 더 먼 데로 가 혼자 머물고자 한다. 2017년 초가을 이희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