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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른 완성과 너무 늦은 완성
문학 밖과 안으로 각자를 유배했던 랭보와 프루스트 하라르에서 지내며 그는 프랑스에서 문학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보았지만 청춘기의 작품을 계속 이어가지 않은 걸 흡족해했다. 왜냐하면 “졸작이었으니까”.(이자벨이 “왜 글을 계속 안 써요?” 하고 묻자 랭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계속할 수가 없었어. 그랬다간 난 미쳐버렸을 거야.” 그러곤 잠시 침묵한 뒤 정말 슬픈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졸작이었으니까.”) -「랭보의 마지막 여행」, 『랭보의 마지막 날』 98-99쪽 마음산 문고의 세 번째 묶음 [문학과 삶]은 이를 데 없이 유명한 이름이지만 그 천재성과 기벽 혹은 비범함 때문에 쉽게 다가서기 어려웠던 랭보와 프루스트의 소박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랭보는 1854년생 시인, 프루스트는 1871년생 소설가이자 평론가로 두 사람은 분야도 세대도 다르지만, 랭보는 일찍이 스무 살 무렵까지 최고의 작품을 써내고 그 뒤론 유럽과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에서 노동자, 용병, 무기 밀매상으로 살며 문학 밖에서 문학을 향수했다. 반면 프루스트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사교계의 총아로 지내다가 부모의 죽음 이후인 서른여덟 살부터는 집에 칩거하며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했다. 문학적으로 이른 완성을 맛본 랭보는 자기 밖의 이상향을 끝없이 동경하며 헤맸고, 세상을 알아갈 때 상실을 겪은 프루스트는 자기 안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시간을 끝내 헤맸다. 삶으로 문학을 했던 시인, 문학으로 삶을 되살리려 한 소설가의 삶이 닮은 듯 대비된다. 『랭보의 마지막 날』과 『프루스트의 독서』는 비장하게만 여겨온 이 두 사람의 면면을 새롭게 보여줄 책이다. 암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마지막 순간에도 탈출을 갈망하던 랭보는 그저 순수하고 정 많고 베풀기를 좋아하며 툴툴거릴 줄 아는 보통 사람이었다. 또 평생 천식을 달고 산 프루스트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비평가답게, 부드럽고 감상적일 거라는 짐작과 달리 신랄한 비판과 유머로 책을 읽으며 자신의 경험을 풀어놓는다. 이 두 책은 세월을 거듭하며 빤하고 관습적인 인상으로 굳어진 랭보와 프루스트의 숨결을 한결 가까이서 맡게 하며, 이들의 문학적 기원 혹은 종착지를 친근한 모습으로 보여줄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는 자존심이 아주 강해서 모든 요리가 성공하기를 바랐는데, 요리에 관해 아는 바가 없어서 요리를 망쳐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이따금, 사실은 아주 드물게 요리를 망쳤다고 인정했는데, 그건 순전히 우연의 결과였다. 대고모의 언제나 의욕 넘치는 비평은 오히려 요리사가 어떤 요리를 제대로 할 줄 몰랐다는 의미여서 할아버지에게는 정말이지 용납하기 힘든 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종종 할아버지와 논쟁을 벌이지 않으려고 대고모는 입술 끝으로 맛을 보고는 의견을 내놓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즉각 호의적이지 않은 의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독서에 관하여」, 『프루스트의 독서』 27-28쪽 『랭보의 마지막 날』 너무 일찍 시를 완성한 천재의 순수하고 인간적인 마지막 모습 『랭보의 마지막 날』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여섯 살 터울의 막냇동생 이자벨 랭보가 시인의 마지막 모습들을 기록한 산문과 가족에게 보낸 편지다. 타향을 헤매던 아르튀르 랭보가 무릎에 종양을 달고 마르세유로 돌아왔을 때 누구보다 먼저 그를 찾아 1891년 11월 10일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곁을 지킨 것은 이자벨 랭보였다. 그녀는 글과 그림에 내공이 깊고 시인이자 화가인 파테른 베리숑을 남편으로 두었을 만큼 예술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인물로, 시인의 유산을 물려받아 정당하게 관리한 상속자로서 훗날 오빠에 관한 글을 묶어 여러 권 책으로 내기도 했다. 이자벨 랭보는 힘든 수발을 오롯이 애정만으로 견뎌냈다. 『랭보의 마지막 날』은 그런 애정만이 관찰할 수 있는 아르튀르 랭보의 진솔한 모습을 담았다. 제가 사장님 계좌에 남겨둔 게 없는지 여쭤보려고 연락드립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배편을 오늘 바꾸고 싶습니다. 어쨌든 아피나르에서 출발하는 배편입니다. 온갖 배편이 곳곳에 있는데 저는 불행히도 몸이 불구가 되어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첫 번째 개조차도 그렇게 말 할 겁니다. 그러니 아피나르에서 수에즈까지의 뱃삯을 제게 보내주세요. -『랭보의 마지막 날』 61-62쪽 아르튀르 랭보가 스무 살 무렵 문학을 버리고 이국을 방랑한 이래 그의 곁에 시는 없었다. 하지만 그 단호함도 그의 기질을 속이진 못했다. 그는 죽기 전날까지도 이국으로 떠날 배편을 부탁할 만큼 ‘다른 곳’을 갈망했다. 그에게 시는 살아내는 것이어서 글로는 다 담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관습에 안주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죽음을 앞두고서도, 처음 시를 쓰듯 순수하게, 두려움보다는 동경이 더 컸다. 『랭보의 마지막 날』은 아르튀르 랭보에 관한 기억들로 시인의 삶에 관한 고찰을 마련할 것이다. 그는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아비시니아와 아덴의 풍습과 사실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얘기했다. 단 몇 마디 말로 정확하고 매혹적으로 많은 걸 설명했다. 때로 그는 모든 걸 조롱하며 농담을 했다. 과거, 현재, 미래, 그를 둘러싼 사물들, 그가 아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조롱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도 그는 청중이 눈물을 흘리며 웃게 만들 줄 알았다. -『랭보의 마지막 날』 96-97쪽 『프루스트의 독서』 독서는 정적과 고독 속의 미로 문장 사이의 틈을 메우는 수백 년 된 침묵 속으로 “프루스트를 읽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자신 있게 읽었다고 대답할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 많이 안 읽히는 작가, 작품을 끝까지 읽는 것이 위업처럼 여겨지는 작가들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프루스트다. 3000페이지가 넘고 4세대에 걸쳐 200명 넘는 인물이 등장하며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뻗어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번 들어가면 무사히 출구를 찾을지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작품이다. -「들어가며」, 『프루스트의 독서』 7쪽 마르셀 프루스트는 서른여덟 살인 1909년부터 집 안에 틀어박혀 13년 뒤 세상을 뜰 때까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필했다. 삶의 후반부를 꽉 채운 집요한 대작 때문에 그는 오히려 불멸의 고전을 상징하는 보통명사처럼 자리 잡았다. 그 위엄 탓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문을 처음 연 『스완네 집 쪽으로』가 거듭 출간을 거절당하다 자비로 출간된 경력이 있다는 점도, 1909년 이전의 프루스트가 신랄한 비판과 유머를 갖춘 평론가이자 번역가로서 사교계의 총아였다는 점도 잊히기 일쑤다. 『프루스트의 독서』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침잠하기 전의 프루스트를 알 수 있는 세 편의 산문을 모았다. 이 산문들은 프루스트가 불어로 번역한 존 러스킨의 『참깨와 백합』과 작가 폴 모랑 등의 책에 부친 서문으로, 책에 대한 단순한 해설을 넘어 프루스트의 예술론과 독서법을 알려주는 명문이다. 특히 1906년 발표된 첫 산문 「독서에 관하여」는 서평가로서도 탁월했던 프루스트의 진면목이 드러나며, 후에 출간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서정을 예고하는 글로서 어떤 식의 글쓰기와 사유로 자신의 글을 다져갔는지 보여줄 중요한 텍스트다. 그 뒤 이어지는 「침울한 주거지에 행복을」은 프루스트가 죽기 3년 전인 1919년에, 「달콤한 비축품」은 죽기 1년 전인 1921년에 발표된 글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결하는 데 쇠약한 몸을 바친 와중에도 말년까지 명석한 사고와 재치를 간직한 대작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문체가 스탕달에게나 보들레르에게 동일한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는 건 분명하다. 벨은 어느 풍경에 대해 “이 매혹적인 장소들” “이 눈부신 장소들”이라 말하고, 그의 여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에 대해 “이 사랑스러운 여자” “이 매력적인 여자”라고 말하며 그 이상 자세히 쓰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그에게 무한히 긴 편지를 썼다”라고 말할 정도로 줄여서 말했다. 그러나 생각의 의식적 조합이 가리고 있는 무의식적인 골조를 문체의 일부라고 간주한다면, 스탕달에게도 그건 존재한다. 나는 쥘리앵 소렐이나 파브리스가 부질없는 걱정을 벗고 이해관계를 떠나 향락적인 삶을 살 때마다 그들이 언제나 높은 곳(블라네스 신부의 종탑 망루, 파브리스의 감방 혹은 쥘리앵의 감방)에 있다는 사실을 즐거이 입증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살해했다는 걸 알아차린 인물의 발끝까지 고개 숙여 절하는 인물들, 새로운 천사를 닮은 그 인물들만큼이나 아름답다. -「달콤한 비축품」, 『프루스트의 독서』 123-124쪽 |